CULTURE

당신의 이름, 당신의 얼굴

2013.03.13GQ

당신이 떠올랐습니다. 하필 당신의 젊은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돌이켜 추억을 말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당신의 얼굴에 들어 있는 당신의 이름과 당신의 이름에 들어 있는 당신의 얼굴이 지금 여기에 함께 있습니다. 추억이 아니라, 추억 따위가 아니라, 여기에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꽃을 드리려 합니다. 당신에게 드리려 고른 말과 함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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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불암 목요일 저녁마다 당신을 본다. 한국인의 밥상을 찾아 당신은 백팩을 바투 메고 성큼성큼 길을 걷는다. 그러다가도 담장 밖으로 가지를 내민 석류에 ‘너였니?’ 시선을 줄 땐 어느새 멈추어 서 있다. 물으면 대답해줄 것 같은 얼굴, 모르면 결정해줄 것 같은 목소리, 말 없이도 열어줄 것 같은 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이름 앞에 손쉽게 ‘아버지’를 놓지는 못하겠다. 그건 당신을 향한 유일한 말이 아니라고 느낀다. 혹, 사나이라면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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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자 당신은 약하다. 어머니의 노동으로서 걸레로 방을 훔칠 때도, 할머니의 본능으로 손주를 안아볼 때도 당신의 몸 한쪽은 ‘아야야’ 힘에 부쳐 떤다. 당신은 강하다. 무모하리만치 강하다. < 마더 >에서 “내 아들이 안 죽였거든요!” 유난히 검은 눈동자로 강조할 때, 당신은 행여 마주칠까 두려운 맹수 같았다. 한국 사람 대부분이 인자하고 따뜻한 ‘어머니’ 김혜자를 안다 하는데, 이 기이한 사진 속에도 김혜자가 들어 있다. 당신이 그때도 김혜자였는지, 이젠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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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해 < 전국노래자랑 > 무대에 등장한 수천수만 명의 얼굴을 합치면 당신의 얼굴이 될까? 여든다섯의 당신은 여기 이 사진 속 얼굴보다 물방울처럼 둥글어졌지만 그건 곧 시간의 선물이기도 하다. 구봉서, 배삼룡과 함께 콩트를 하던 젊은 얼굴을 찾아본다. 흐릿한 화면만큼이나 아스라하게 멀고, 짙은 눈썹을 빼면 알아챌 단서도 없다. 스탠드 마이크 앞에서 팽팽한 목소리로 옆 사람과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시작하니, 그제야 < 전국노래자랑 >의 당신과 초점이 맞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당신의 자리는 마이크 앞이고 국민들의 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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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예진 김수현 드라마에서 두 번, 당신이 우는 걸 봤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동사 소식을 듣고 다리를 절며 뛰던 선희(1987년 < 사랑과 야망 >). 그리고 ‘예뻐하려고 해도 예뻐지지가 않는’ 며느리가 쓴 카드를 읽고 화장대 앞에서 툭 터지려는 눈물을 티슈로 닦던 유정(2013년 < 무자식상팔자 >). 두 눈물 사이에는 어떤 시간이 고여 있을까? 대개의 아역 출신 배우가 그렇듯 당신도 영원히 어떤 얼굴을 방황하는 건 아닌지 새삼 걱정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당신이 아침 참새같이 새침한 얼굴이었던 ‘얄개’시대는 정작 보지도 못했으면서 말이다. 다시, 유정이 터지려는 눈물을 잠시 머금는 표정이 생각난다. 그때 당신의 이름은 새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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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인 “눈이 참 크시네요.” 당신을 몰랐다면 불쑥 그런 인사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신을 보면 ‘아, 유지인이다’라는 느낌표가 먼저 튕겨 나온다. 당신을 포함한 세 명의 여배우를 트로이카라 불렀던 때를 2013년에 돌이켜보기란 만만치 않다. 당신이 눈 위를 걸었으나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는 세간의 투명한 말들이 여전히 그 눈밭처럼 싱싱하게 들리지만, 당신은 확실히 그곳을 떠났다. 다만 한 가지, 유지인이 도시의 이름이자 도시의 얼굴이었다는 점은 건물처럼 남았다. 예감하는 눈, 층진 긴 머리, 바스락 소리를 내는 트렌치코트. 불현듯 당신이 막 생각나려 한다. 그때 건물 모서리에서 어떤 여자를 오랫동안 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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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희 어떤 여자라도 기꺼이 안길 것 같은 남자. 음성은, 가장 낮은 음을 내는 건반을 새끼손가락으로 누르면 그런 소리가 날까? 그런데 언젠가부터 당신의 성난 미간과 주름 잡힌 얼굴이 화면을 채우고 있다. 목소리는 바위를 쪼갤 것 같다. “어머, 한진희가 언제부터 저렇게 무서웠지?” 소파에 기대 앉은 당신이 벌떡 일어서며 호통칠 때, 텔레비전을 보던 어머니가 놀라셨다. 아버지는 그냥 헛기침을 하셨다. 당신은 그대로의 한진희일 텐데…. 일가를 이루고, 자식들 분가시키고, 아내와 둘이 남았으나 표현은 서툴고, 다시 사랑을 말하자니 더욱 어색해진 아버지. 어쩌면 당신의 목청이 공연히 커진 이유도 그런 걸까? 부쩍 침묵이 잦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듯이, 당신의 변해가는 모습 또한 그대로의 진심이었으리라 짐작한다. 그 호통이 새삼 고마워서, 꽃이라도 꺾어 드린다면 당신은 뭐라 하시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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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라고 노래했을 때 당신은 서른이었다. ‘창밖의 여자’에는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많은 사람의 회한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차라리 예언이었다. 당신이 사랑하는 음악과 함께한 삶은 그저 아름다웠다고 하기엔 너무 외로웠다. 개인적인 불행은 차치하더라도, “음악에서 음악에 대한 영감을 얻고”, “음악 외에 사적인 얘기는 거의 하지 않으며”, 1986년부터는 방송 출연 중단까지 선언하면서 음악 안에 감금되는 길을 택했다. 당신은 아직도 “처음부터 탈출구가 없었기 때문에 따로 탈출구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을 한다. 당신의 얼굴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 목소리와 지금의 목소리도 같다. 당신이 지금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라고 부르면,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이 평등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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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신혜 “내 손으로 벗겠어요.” 당신이 했던 대사 중에 하필 이게 생각난다. 1987년 < 애정의 조건 >에서 당신을 침대로 밀치는 남자를 향해 두 눈 똑바로 뜨고 한 말. 그건 여느 ‘미녀’의 말과는 달라서, 남자는 더 이상 당신을 밀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1990년 < 방각하 >에서, 파랗고 노랗고 빨갛게 화장하고 헤프게 웃을 때도 미녀의 흔한 웃음과는 달리 능청이 가득했다. 당신은 한국에서 제일 예쁘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미녀의 외곽을 멋대로 도발하는 여자였다. 그래도 컬러 TV 시대의 천년 여왕 황신혜가 < 연기대상 >이 아닌 < 연예대상 >에서 우수상을 탈 줄은 몰랐지만.

 

영구

심형래 영구는 없었다. 누구나 머리에 ‘땜빵’만 있으면 영구였다. 세상에 영구가 너무 많아서 영구는 없었다. 후배들에게 “조금 더 성의 있게 분장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듯이, 분장이 당신의 진짜 얼굴을 대신하던 시절이었다. 당신은 펭귄, 파리, 칙칙이, 에스퍼맨이었다. 영구라고만 부르기에는 섭섭했다. 영구는 없었다. 당신은 지금 다른 ‘땜빵’ 때문에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맞고 넘어지고 구르는 걸 당신만큼 잘 받아넘기는 개그맨은 본 적이 없다. 영화감독 심형래가 있고, 여전히 영구는 없다. 하지만 당신이 영화감독이 된 이래 지금까지, 사람들은 영구의 빈자리를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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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시내 한 번도 어린 적 없는 얼굴. 스핑크스 머리로 접신의 제스처인 양팔을 휘저으며, 실은 목소리를 휙휙 내던지며 ‘공연히’를 부를 때도, 머리칼을 낫으로 쳐낸 듯 귀를 홀랑 드러내고 ‘목마른 계절’을 부를 때도, 그러다 노래가 끝나고 누가 말이라도 걸면 애벌레한테 속삭이는지 다 기어 들어가는 소리를 낼 때조차, 당신은 어린 얼굴인 적이 없다. 지금도 그렇다. 어리게 보이려 별 수법을 다 쓰는 세상에서 당신은 다만 윤시내라는 무대에 서 있다. 뭣 모르는 시선들이, 나이가 몇인데 그런 의상을 입느냐며 촌스럽게 쑥덕거려도, 당신은 고목이 피우는 꽃처럼 가장 진한 색을 뿜어내려 꿈틀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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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연 삭발 후 이제 막 3센티미터쯤 자란 까까머리로 대종상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타러, 거의 뛰쳐나가다시피 했던 웃는 얼굴이 생각난다. 1989년 < 아제아제 바라아제 > 때, 그러니까 당신이 스물세 살이었을 때. 그보다 2년 전엔 베니스에서 트로피를 받았다.(그럼 그때는 스물한 살이었겠군.) 그 후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았는지, 당신의 이름엔 ‘마지막 영화배우’라는 뉘앙스가 생겼다. 앙다문 앵두 입술처럼 또렷하게도 그걸 느낀다. TV 드라마에 나와 양장 입은 문희도 했고, 한복 입은 정난정도 했지만, 당신은 여전히 그냥 배우가 아니라 꼭 영화배우여야만 할 것 같다. 3월엔 극장에서당신을만나려한다. ‘7년만의 외출’은 아니지만 기분만은 그럴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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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희 “나으리, 좀 색다른 잔으로 술을 올려드릴까요? ” 빨간 술을 당신의 목으로부터 왼쪽 발가락까지 낭창하게 흘렸던 < 어우동 >의 전율, < 무릎과 무릎 사이 >에서 경련하던 하얀 배. 시작은 당신의 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일관된 관능과 느닷없는 순수를 종횡으로 거쳐, 갑자기 억척스러운 엄마…. 당신은 지금까지 몇 명의 여자로 살았을까? 그러면서 “옛날 작품을 본 적이 없어…” 하던, 오후 두 시처럼 나른했던 그 말은 또 무슨 뜻이었을까? 이보희라는 이름과 작은 얼굴, 아직도 가는 몸에서 떠오르는 호기심을 지울 수 있는 날이 오기는 올까? ‘섹시 스타’ 같은 덧없는 말과는 관계도 없이, 처음부터 오늘까지, 세월과도 무관하게, 한순간도 예쁘지 않았던 적 없는 여자로서의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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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원 이제 와 당신은, 발견해야만 알 수 있는 이름이 되었다. 그게 미안하진 않다. 당신을 아는 것이 마치 반짝이는 브로치를 줍는 행운 같으니까. 바다로부터 먼 좁은 길에서 조개껍데기를 밟는 것처럼 야릇하니까. 그리고는 이내 질문이 생겼다. 실은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방백이다.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 세련됐나요? 다른 여자들이 옷장에서 원피스를 입을까 투피스를 입을까 망설일 때, 당신은 혼자서 무슨 ‘패션’ 따위를 생각한 거죠?” 불의의 사고 후, 이제껏 한국에 딱 한 명이었을 것 같은 당신의 얼굴은 사라졌지만, 이름은 남았다. 우리는 그걸로 당신의 하나뿐인 얼굴을 찾기도, 상상에 빠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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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훈 “혹시, 한 번이라도 주눅 들었던 적 있어요?” 당신에게 묻고 싶었다. 구부정한 어깨, 앞으로 뺀 목, 유행 같은 건 신경도 안 쓸 것 같은 청바지에 찔러 넣은 두 손. 1986년 < 깜보 > 이후, 그런 걸음이 당신보다 잘 어울리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러면서 태어날 때부터 웃고 있었던 것 같은 얼굴, 침대 위에서도 가시지 않는 장난기…. “하하하, 그냥 선배님이라고 부르세요, 편하게.” 예의를 갖추면서도 허식은 아닌 당신에 대한 명백한 믿음은 언제, 어디로부터 온 걸까? 지금보다 더 시간이 흐른다 해도, 웃는 얼굴 그대로 잡힌 주름이 더 선명해 진대도, 당신을 ‘선생님’이라 호칭하는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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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진 어렸을 때, 다 큰 누나들의 세계로부터 흘러나온 ‘성숙의 언어’ 중엔 “남자는 천호진처럼 생겨야 돼”도 있었다. 그땐 몰랐으나 소년은 이윽고 남자가 되었으니, 여자를 알고, 세상을 보고, 남자가 왜 당신처럼 생겨야 한다는 건지도 안다. 그건 쌍꺼풀이 있고 없고, 이마가 넓고 좁고, 코가 곧고 휘고 그런 얘기가 아님을, 도리어 보이지 않아도 뿜어져 나오는 기운에 관한 것임을 안다. 누군가, 세상에 자기만 남자인 척 “사랑과 정열을 그대에게!” 외칠 때도 당신은 그저 눈을 조금 찌푸리고 씩 웃어 넘겼겠지. 세월은 당신의 얼굴에도 ‘아버지’를 구겨 넣고 자식밖에 모르는 처량한 표정을 요구하지만, 당신의 눈에서 언뜻 이글거리는 뭔가를 본 것 같다는 생각은 지우려야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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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선 요즘은 흔한 말이 ‘파격’이지만, 1986년 당신이 두근거리는 비트에 맞춰 “이제 우리 서로가 남남인가~!” 안면을 뒤집어버릴 듯 노래할 때, ‘파격’은 제 뜻을 아예 ‘비주얼’로 보여줬다. 당신은 ‘칼라’ 그 자체였다. 신중현과 김창훈과 이장희와 손무현이 계속해서 당신에게 바친 노래에 연하게 칠해진 뭔가는 없었다. 연했다 한들 당신이 삼켜버렸을 것이다. 훗날 당신은 그 모든 것이 억압된 것이었다며 가늘게 울먹였지만, 그 억압마저도 독처럼 아름다웠다고 말하려 한다. 누가 제2의 김완선일 수 있나. 세상에 그런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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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수 당신의 진한 얼굴은 굵은 붓으로 한 번 그린 게 아니라 얇은 붓으로 여러 번 덧칠한 것 같았다. < 무동이네 집 >에서 서글서글하고 익살스러운 형으로 나올 때조차 당신은 복잡해 보였다. < 모래시계 >의 태수가 분노하고 방황하는 걸 보면서 남자들은 뜨거워졌다. 남성성은 그 뜨거워지는 부분 어딘가에 있다고 여기고 금언처럼 따랐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최민수는 최민수밖에 보지 못했다. 당신이 영영 따뜻하고 자상한 아버지 역할을 맡지 않았으면 좋겠다. 큰 붓 하나를 내미는 아버지보단 붓이 꺾였을 때 더 꺾여도 괜찮다며 다른 붓을 내미는 아버지로 남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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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실 배종옥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최진실씨가 없는 이 자리가 너무 크네요.” 2008년 MBC 연기대상 시상식자리였다. 그녀는 “외로워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담담하게 덧붙였다. 어떻게 저럴까 싶을 만큼 밝고 명랑하고 꿋꿋해 보이는 사람에겐 언제나 말보다 어깨가 필요하다는 걸, 왜 우리는 뭔가 지난 후에야 알아채는 걸까. 당신은 사람들에게 기꺼이 어깨를 빌려주었으나, 사람들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당신에게 ‘예쁘다’는 말밖에 하지 못한 걸 후회한다. 당신은 예쁘기까지 했다. 국민 여동생, 국민 엄마, 국민 배우, 국민 첫사랑, 배우의 이름을 지운 수식이 판을 친다. 하지만 당신은 ‘국민’ 같은 말 없이도, 그 모든 것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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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식 꾸숑. 폼 잡을 일도 없다는 듯 무심히 바이크를 타던, 새파란 당신의 이름이다. 또한 젊음을 파내듯 연기한 < 구로 아리랑 >의 진석도 생각난다. 눈동자는 조금씩 흔들리지만, 그럴수록 몸은 크게만 움직이는 청춘. 그건 무대를 채우려는 연극배우의 움직임이라기엔 학습되지 않은 본능처럼 보였다. 느릿하게 포효하는 호랑이도, 하품이나 시원하게 하는 게으른 사자도 아니었다. 어느새 시간의 더께가 진해진 얼굴로, 장도리로 누굴 내려찍거나, 겹겹이 쌓인 턱살을 만지며 정치인 행세를 하지만, 폭발하고 사그러드는 리듬은 바이크를 타던 꾸숑처럼 그저 무심하다. 그렇게 최대와 최소가 하나인 얼굴. 시퍼렇게 뜨겁고 델 듯이 차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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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연 1987년 < 사랑이 꽃피는 나무 >의 당신을 본 적은 없지만, 어느 캠퍼스 국문과 수업에는 반드시 있을 것 같은 판타지 속에서, 당신은 여전히 웃고 있다. 그게 대체 누구의 품이냐며 교실바닥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초콜릿 광고도 있었지만 당신은 애교 많은 애인이기 보다, 안아줄 것 같은 누이로서 남자들을 들썩거리게 했다. 갖고 싶지만 가질 길 없는 몇 장의 사진 같은. “대학교에 입학하면 이미연 같은 여대생만 있을 줄 알았지.” 웃던 형들을 바보 같다 단정할 수 없었다. 거기 당신이 앉아있는 잔디밭이 어느 캠퍼스인 것만 같다는 생각에, 시간은 미처 못 잡았어도, 청춘이라는 말은 여전히 푸릇푸릇하게 돋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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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스 얼굴은 완전히 달랐지만 김성재와 이현도, 당신들의 목소리엔 비슷한 결이 있었다. 남자의 목소리는 응당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서로 완전히 다른 춤을 추는데도, ‘칼 군무’보다 잘 어울렸다. 듀스란 이름이야말로 꼭 거기에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서태지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흔들며 “난 알아요” 하면, 듀스는 팔을 풍차처럼 돌리며 “나를 돌아봐”라고 말하는 식이랄까? 친구와의 우정을 가늠하는 용도로 듀스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해체한 뒤에도 둘 사이는 전혀 문제없어 보였으니까. 그러다 어느 겨울부터 그 노래를 더 이상 웃으며 부를 수 없게 되었다. 11월 20일이란 날짜는 딱히 기억하지 않으려 해도 기억나곤 한다. 많은 남자의 멋과 청춘이 거기서 불현듯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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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 꾸러기라는 말. 악동이라는 말. “어디서 저런 맹랑한 애가 나왔대? ” 좀처럼 SBS가 잡히지 않는 지방 사람들은, 이상하게 귀엽고 황당하게 얄밉다는 당신의 이름을 풍문으로나 들었다. 찰랑찰랑 다듬은 머리로 후줄근한 터틀넥부터 형광색 니트까지 제 멋에 겨워 입고는 “ 안녕하시렵니까? ” 닭 모이 쪼듯 때때때 말하던 서울 남자. 그 후 당신은 대한민국 개그맨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스스로 닦으며 행진했다. 장군처럼 하지 않고, 별의 별 ‘코스튬’을 다 입어가며 ‘변태’ 소리가 무슨 대수냐 밀어 붙였다. 그리하여 지금도, 김 오르는 두엄자리 옆에서 “음, 향기로워라” 할 것 같은 꾸러기 무드는 여전히 당신만의 것이다. 다 그만두고, 당신을 보기만 해도 실실 웃음이 나기 시작한다. 꼭 얼굴이 아니라 귀나 발바닥만만 봐도 그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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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성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걸치고 “냉면처럼 가늘고 길게 살 거야 ” 하고 웃던 < 비트 > 속 당신의 어린 얼굴에도 주름은 있었다. 지금 막 새로 만든 얼굴처럼 흠집 하나 없는데도, 소리치면 눈가에 파동이 쳤다. < 빠담빠담 > 속 강칠이 입을 크게 벌려 “좋다!” 외치는 얼굴도, < 태양은 없다 > 포스터에 잡힌 도철의 얼굴도 옅게 주름졌다. 눈 코 입, 보이는 모든 선이 연하고 약해서 잡히는 청춘의 주름. 우악스런 오토바이 앞에 서야 강해 보인다고 믿었던, 당신이 상징하는 청춘이라는 표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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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하 긴 머리, 감춰지지 않는 얼굴, 당신이 기억난다. 아니, 기억난다 말하기엔 모든 게 완강히 그대로다. 당신이 있었던 자리로, ‘차세대 심은하’ 여럿이 다가간다지만, 청순과 우수와 파열이함께인당신에비할바는아니다. < 마지막승부 >의 다슬이, < 8월의 크리스마스 >의 다림이, < 미술관 옆 동물원 >의 춘희, < 청춘의 덫 >의 윤희는 어쩌면 남자가 꿈꿀 수 있는 이상형의 총합이 아닐까? 그걸 좀더 구체적인 취향으로 나누고 나눠도 결국 당신의 이름, 심은하로 남는다. 20세기의 마지막 해, 영화 < 인터뷰 >에서의 짧은 머리를 끝으로 당신은 다른 곳으로 갔다. < 8월의 크리스마스 >에서 당신은 홀연히 사라진 남자를 원망하며, 유리창에 돌을 던졌다. 어떤 남자는 12년째 하릴없이 저수지에 돌을 던진다.

    에디터
    GQ 피처팀
    포토그래퍼
    경향신문 포토뱅크, 김한용, 조선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