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깜짝 놀랄 얘기를 들려주마. 아마 기쁘게 듣지는 못할 거다.
스물일곱 김원중의 인생엔 놀라운 일들이 많았다. 가장 화려한 팬덤을 거느린 언더그라운드 유명인이자 패션 왕국의 황태자, 멋과 상징성에 헌신한 뉴웨이브 청년상의 지표. 그 이름만으로도 지금 서울 남자의 새로운 장르로 설명되는 김원중이 스튜디오로 들어왔다. 어떤 순간 눈은 아름다운 것에만 집중한다. 원중이 나타난 이후 공간은 오롯이 그의 것이 되었고, 견딜 수 있는 한 오랫동안 그를 보고 싶었다.
어떻게 그런 포즈를 해요? 몸이 어쩌면 그렇게 움직일까.
따로 연습을 하진 않아요. 책 보는 걸 싫어하거든요. 가끔 멋있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이 지금 왜 아름다워 보이는 건지 그런 생각은 해봤어요. 순간을 관찰하는 재능은 있는 것 같아요. 기억도 잘하고.
타고났나 보네.
모델 일은 꿈도 안 꿨어요. 어렸을 땐 내가 대통령이나 과학자가 될 줄 알았거든요. 전공을 정해야 하는 때가 왔을 땐 집안 어른 중에 그 일을 하시는 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건축을 택했고요. 직업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한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뭐가 됐든 멋있어 보이는 일을 하고 싶다, 그랬죠.
그럼 모델로 데뷔한 것도 멋있어 보이고 싶어서였나요?
아주 많이 그렇죠. 대학에 들어가 보니 너무 재미가 없는 거예요. 첫 학기 학비를 부모님이 대출 받아서 마련해주셨는데 공부는 안 하고 드럼 치고 술 마시고 허송세월만 했어요. 이 돈이 어떤 돈인데, 엄마 도장 몰래 파 가지고 가서 당장 자퇴하고 동대문에 들어갔어요. 옷 팔면서 한 달에 백오십인가 벌었어요. 그 돈이 얼마나 커요. 그런데 그 돈도 흥청망청. 이렇게 살면 안 되는 건 알겠는데 방법은 없고, 무작정 군대에 갔어요.
제대하고 아메리칸어패럴 매장에서 일했죠? 그러다 모델 제의를 받았고.
청담 매장에서 수습 기간을 끝내고 명동에 지원 나가려고 할 때였어요. 키 크고 멋있는 사람이 와서 모델 할 생각 없냐 하는데 결정을 못하겠는 거예요. 솔깃하긴 했지만 돈은 많이 못 번다는 얘기를 들으니까 그게 좀 싫었어요. 이제부터 열심히 돈 벌어서 가족에게 보탬이 되고 아들 노릇도 하고 싶은데 이걸 해도 괜찮나? 그런데 성현이 형이, 그때 사장님이에요. 돈은 못 벌어도 비싸고 좋은 옷은 질리도록 입을 거다, 얘기한 순간 아, 이걸 해야겠다 단번에 결정했어요.
비싼 옷을 입는 게 왜 그렇게 좋았을까?
나이가 들면서 패션 디자이너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커졌거든요. 좋은 걸 경험해야 좋은 걸 만들 수 있다는 건 아는데 무슨 수로 비싼 옷을 입겠어요. 좋은 옷 실컷 입고 공부 많이 하려고 모델 일을 시작했어요.
데뷔를 하고 보니 정말로 돈은 못 벌고 좋은 옷은 실컷 입던가요?
네. 정말로 그렇더라고요. 잠깐만 내 것이지만, 비싸고 좋은 옷은 원 없이 입고 있어요. 남자 모델들에게 돈은 늘 껄끄러운 이슈예요.
일을 시작하자마자 유명해졌죠?
2009년 10월에 데뷔했는데 제가 그 전 세대 모델들이랑은 분위기가 다르잖아요. 아주 멋진 얼굴도 잘생긴 얼굴도 예쁜 얼굴도 아닌 얼굴. 그게 그 즈음에 괜찮아 보였나 봐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성공이 운만으로 가능한 걸까요?
운도 실력이에요.
매 순간 행운이 곁에 있는 사람은 없어요. 일하면서 아마 불행한 순간도 많았겠죠.
회사 옮길 때 힘들었어요. 복잡했어요.
결국 돈 문제였나요?
맞아요. 하지만 흔히 상상하듯 누가 누구의 돈을 떼먹고 약속을 지키지 않고 그런 게 아니에요. 상황이 바뀌고 일은 점점 많아지는데 계약 조건은 처음과 같으면 누구든 마음이 달라져요. 보상이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고 개선을 요구하게 되죠. 하지만 그게 받아들여지기가 쉽지 않잖아요. 각자 자기 입장이 있으니까. 화도 나고 무섭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했는데, 그게 타인에 대한 것만은 아니었어요. 나 자신을 향한 분노도 있었죠.
지금은 어때요?
지금은 부티크 개념의 작은 에이전시에 있어요. 좋아요. 해외 컬렉션 나가는 것도 도와주고 신경을 많이 써주세요.
해외 컬렉션은 어땠어요? 프라다 쇼 이후에 이제 서울에선 못 보는 건가 했어요.
체류 기간이 짧아서 생각만큼 일을 많이는 못했어요. 그리고 세 번째 나갔을 때 결과가 별로였어요. 외국인이 생각하는 아시안 뷰티하고 저하고는 차이가 있나 봐요. 생각 같아선 1년 정도 머물면서 천천히 일하고 싶은데 제 여건상 그렇게는 못해요.
왜죠?
부모님도 모셔야 하고 누나도 곧 결혼해요. 하고 있는 사업도 있고 저 좋자고 여기 것들을 다 내팽개치고 나갈 순 없어요. 전 이미 어린 나이가 아니에요. 내년이면 스물여덟이 돼요.
가끔은 나만 생각할 때도 있어야죠.
지금은 아닌 것 같아요. 무분별하게 살고 싶지 않아요.
책임감이 강한 편인가요?
전 안정적인 걸 원해요. 주변 친구들은 아직도 신나게 연애하고 아침까지 놀고 정신없이들 살죠. 전 빨리 결혼하고 아이 낳고 부모님 모시고, 화목하고 평화롭게 살고 싶어요. 위험하고 아슬아슬하고 그래서 스릴 넘치는 인생을 멋있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어떻게 살면 성공한 삶일까요?
부모님 잘 모시고 싶어요. 어떤 일로도 마음 상하는 일 없게 보호하고 싶어요. 아내와 아이가 하기 싫은 일 안 해도 될 만큼 돈도 벌고 싶고요.
배우가 되면 지금보다 더 유명해지고 성공도 빨리 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해봤어요?
제안은 많이 받았어요. 모델 하다 배우로 돌아서서 잘된 유형들도 많고. 그런데 전 안 내켜요.
모델이 천직이다 그런 건가요?
아니죠. 모델 일로는 성인 남자가 제대로 살기 힘들어요. 저는 일을 많이 하니까 나은 편이지만 생활이 전혀 안 되는 모델도 많거든요. 이 일을 하면서 다른 일을 찾아야 하는 건 맞아요. 그런데 배우가 되고 싶진 않아요. 이미 다른 사업을 하고 있기도 하고요.
아, 87MM?
몇 년 전에 87MM이라고 브랜드를 하나 만들었어요. 87년생 동갑끼리. 옷에 대한 구상은 제가 하고 기술적으로 도와줄 분들을 구해서 그 팀이 옷을 만들어주세요. 계산도 잘하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친구가 경영을 맡고요, 저는 스타일과 비주얼에 관한 걸 많이 해요. 나름대로 일이 분업화 되어 있고 사업이 꽤 체계적이에요. 옷들이 잘 팔려서, 요즘은 10월에 파리 쇼룸에 들어갈 새 라인을 만들고 있어요. 싸고 예쁜 옷 많이 만들었으니까 이젠 풍부하고 풍요로운 옷을 만들고 싶어요.
요즘은 무슨 생각을 많이 해요?
우선은 학교에 다시 들어가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사실 일하면서 대학에 꼭 가야 한다는 필요는 못 느꼈어요. 하지만 나중에 내 아이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아빠 학벌 때문에 뭔가 피해를 볼까 봐, 괜한 걱정이지만 하여튼 그래서 대학에 가려고요. 생각은 별로 안 해요. 어렸을 때는 누군가 내 마음을 상하게 하면 그게 너무 힘들었어요. 요즘은 굉장히 바쁘니까 그럴 틈이 없어요.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상황 때문에 성격이 바뀐 것 같아요.
사랑을 합시다, 라는 영화도 있어요. 사랑은요?
여자친구가 있어요. 결혼하고 싶어요. 어른스럽고 생각도 깊고 좋은 사람이에요. 저는 나쁜 여자 아주 싫어해요. 그런 여자한테 끌리지도 않고요. 집에선 멍하니 있는 시간이 많은데, 옥상에서 안 입는 옷에 페인트칠하는 거 빼고는 주로 소파에 앉아있어요. 할아버지처럼. 텔레비전을 넌지시 틀어놓고 멀리서 봐요.
뭘 그렇게 넌지시 틀어놓죠?
홍상수 영화요. 여자친구가 다 모아서 보내줬어요. 일상적인 얘기들인데 가끔 난데없이 웃기고 좀 찔리게도 만들고. 그래서 그 감독님 영화가 좋아요.
그렇게 많은 옷을 입었는데도, 아직도 옷이 좋은가요?
좋죠. 너무 좋죠. 하지만 요즘은 허름하고 허술하게 입고 싶어요. 옛날엔 가죽 바지, 엄청 화려한 비즈 달린 재킷 이런 게 예뻐 보였어요. 요즘은 플란넬 셔츠에 청바지가 제일 멋있어요.
오늘 인터뷰 촬영 중 입은 옷 중에선 뭐가 제일 마음에 들었어요?
흰색 터틀넥 니트요. 제일 간단한 거.
- 에디터
- 강지영
-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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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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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어&메이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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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시스턴트
- 백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