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처음 만난 이정재

2013.11.25GQ

올해, 이정재는 계절처럼 새로웠다.

바다색 턱시도 재킷, 하얀색 턱시도 셔츠, 검정색 보타이 모두 톰 포드.

바다색 턱시도 재킷, 하얀색 턱시도 셔츠, 검정색 보타이 모두 톰 포드.

최근 ‘이정재 20주년 특별전’이 있었어요.
선배들도 안 하신 분이 많은데, 부담스러웠어요. 이제 정말 ‘막차’인 건가 싶기도 하고요. 하하.

한편으론 올해 이정재를 처음 만난 것 같기도 합니다.
연기하는 게 썩 즐겁지 않던 시기가 있었어요. 좋은 캐릭터가 한동안 없었죠. 올해는 흥미로운 캐릭터들을 연기하다 보니까 연기가 다시 재미있어졌어요. 관객 분들도 저의 ‘흥’을 본 것 같아요.

지금 <빅매치> 촬영 직전이고, 연달아 출연할 작품이 정해져 있죠?
그래서인지 시나리오가 안 들어와요. “시나리오가 쌓였나 보다. 우리 거 읽겠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2월에 인터뷰했을 때, <신세계>와 <관상> 모두 흥행을 예측하는 데 조심스러워했어요.
솔직히 <관상>은 시나리오를 보면서 잘될 거라는 예감을 좀 했어요. 요즘 개봉하는 영화 안에는 관객을 생각하게 하는 신이나 대사가 적었던 것 같아요. 근데 <관상>은 관객을 고민하게 하는 편이었어요. 하지만 수양대군의 반응이 이렇게 좋을지는 예상 못했어요. 거친 캐릭터를 꼭 해보고 싶었는데, 제가 표현할 수 있는 마초여서 다행이었죠. 그럼에도 저보단 설경구, 황정민, 최민식 같은 선 굵은 배우가 연기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아 연습을 많이 했어요. 어느 순간부터 목소리에 힘이 생기고, 자신감도 생기면서 아이디어도 따라왔죠.

<신세계>는요?
<신세계>에서 연기한 이자성은 사실 묻어가는 거였죠. 하하. 최민식, 황정민한테 너무 밟히지만 말아야지 하는 움찔거림이랄까요? ‘나도 살아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는 그런 몸부림? 근데 또 너무 선배들한테 대적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은 했어요. 예전에 뻗대는 식으로 연기하다가 굉장히 안 좋았던 경험이 있어요. <신세계>는 하면 할수록 ‘과연 맞는 표현인가’ 하는 의구심이 굉장히 많았어요.

그런 불안이 영화에서도 보였어요. 그게 그대로 이자성 같았습니다.
연기를 안 하고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니까 엄청 힘들었던 것 같아요. 반면 <관상>은 하면서 굉장히 재밌었어요. 재미를 붙이다 보니 오히려 오버 액션이 되기도 했죠. 혼자 신나서 도를 넘을 때도 있었어요. <신세계>는 하면 할수록 좀 답답했고, <관상>은 하면 할수록 시원했죠.

두 영화 모두 연기에 대한 호평이 있었죠.
이제 한 20년 하다 보니 아주 좋다거나 기분이 축 처지지는 않아요. 좋은 평가를 받으면 그저 감사할 뿐이에요. 괜찮은 평가를 못 받아도 이 일을 그만두지 않고 계속해야 하니까요. 예전엔 한없이 안 좋을 때는 집 밖에도 안 나갔지만, 어차피 해도 해도 모자라고 만족감이 들지 않아요. 그냥 할 뿐이죠.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좋은 반응에 대해 감사함이 생겼다는 거예요. 이젠 감사함이 확 다가와요.

예전엔 당연하다고 생각했나요?
좀 형식적이었어요. 크기와 깊이를 몰랐달까요?

새삼 이정재란 이름이 희미했던 시절이 생각나네요.
한창 쉴 때, 사진전에 갔는데 고등학생 무리가 있는 거예요. 애들이 삿대질하면서 “저거 연예인 아냐? 누구지” 이러며 몰라보는 거예요. 그때 진짜 충격이었어요. 하하. <모래시계> 때 좋았고 <태양은 없다> 때가 최고였어요. 연기도 인정받고, 광고도 엄청 했죠. 그러곤 일을 많이 안 하니까 인지도가 많이 떨어지고, 시나리오 들어오는 횟수도 적어졌어요. 가끔 출연한 영화는 성공을 못하니까 ‘이정재는 티켓 파워 없는 배우구나’라는 인식도 생겼죠. 그때는 ‘어디까지 내려가는 건가’ 싶을 정도였어요. 올해 <관상>, <신세계> 모두 잘됐지만, 그런 거조차도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작품들, 새로운 것들에 다 묻힐 거예요. 그래도 이젠 연기에 집중하려고요.

결혼은 멀어지는 건가요?
결혼은 일보다는 나이하고 상관 있는 것 같아요. 남자가 한창 혈기가 왕성할 때는 나가서 놀거나, 연애를 하거나, 에너지를 써야지만 잠을 푹 자고, 휴식이 돼요. 근데 나이를 먹으면 에너지가 별로 없어요. 하하. 자연적으로 그렇게 돼요. 옛날에는 촬영이 새벽에 끝나도 친구들이 있는 곳에 무조건 갔어요. 이제는 힘들어요. 사실, 돌아다녀야 새로운 여자도 만나고, 소개도 받는데….

반짝거리는 검정색 수트, 흰색 셔츠, 검정색 보타이 모두 톰 포드.

반짝거리는 검정색 수트, 흰색 셔츠, 검정색 보타이 모두 톰 포드.

 

고동색 로브, 연한 갈색 포켓스퀘어, 물방울 무늬 스카프, 흰색 셔츠 모두 톰 포드.

고동색 로브, 연한 갈색 포켓스퀘어, 물방울 무늬 스카프, 흰색 셔츠 모두 톰 포드.

이상형이 혹시 ‘처음 만난 여자’인가요?
으하하하. 아니 기회가 있어야 만나는데, 밤이 벅차요. 촬영할 때가 오히려 속 편해요. 사람들이 촬영하는 줄 알고 안 불러주니까요. 요즘엔 <빅매치> 준비하느라 운동을 많이 해서 잘 못 나가죠. 나이 드니까 근육도 잘 안 붙어요.

주연급 배우가 여러 명 나오는 영화들이 트렌드예요. 다음 작품들도 그럴 것 같은데, 그것도 에너지 안배 때문일까요?
요즘 대중 분들이 한 명이 두 시간을 이끌어가는 걸 많이 지루하게 생각해요. 버라이어티한 이야기 내지는 다양한 색깔의 배우들이 출연하는 영화를 선호하죠. 같은 값이면 종합 선물 세트를 가지고 가고 싶은 심리일까요? 투자사나 제작사도 그런 영화를 선호하는 추세고요.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선 배우를 하나씩 다 살리려니까 머리가 아프겠죠. 그러다 편집도 많이 되는데, 아쉽기도 하지만, 좋은 배우들과 일하면 자극도 많이 받고 많이 배우니까 현장이 항상 즐겁죠.

올해 가장 행복했던 날을 뽑을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새로운 소속사에서 해준 20주년 파티였어요. 사실은 사적으로 (정)우성 씨와 함께 20주년 파티를 열려고 했어요. 한국은 파티 문화가 아니잖아요. 얼마 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인적 네트워크라는 게 굉장히 중요해졌는데, 여러 사람이 모여서 사교나 인맥을 넓힐 수 있는 자리가 많지 않아요. 그래서 우성 씨 지인들과 제 지인들을 불러 파티를 열려고 했죠. 한데, 우성 씨도 바쁘고 저도 바빠서 흐지부지됐어요. 포기하고 있는데 회사에서 데뷔 20주년 파티를 열어줬죠. 장소도 좋은 데로 빌려주고, 회사에서 초대까지 해줬어요. 우성 씨도 굉장히 부러워했어요.

인맥 관리에 신경 쓰는 편인가요?
관리를 잘하고 싶은데, 잘 못해요. ‘내 마음 알겠지’ 하면서 연락 안 하는 쪽이죠. 서운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어요.

어떤 감독이 평상시 매너 좋고 너그러운 배우는 연기가 별로일 때가 많고, 다혈질이고 소심한 배우 중에 연기가 엄청난 배우가 많다고 했어요.
저도 많이 생각하는 주제예요. 실력이 아주 출중하면 좀 막 살아도 용서가 되는 걸까? 혹은 실력이 출중하지 않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라도 나이스하게 해서, 사회생활에 도움을 받아야 하는 건가? 어떤 쪽으로 내 몸을 움직여야 하는 건가에 대한 고민.

결론은요?
그걸 정한다고 될 일이 아닌 것 같아요. 실력이 출중해서 빛을 본다고 생각 안 해요. 시대의 유행이란 게 있는데 그 파도가 자신에게 왔을 때 빛을 보는 거죠.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항상 이 정도로만 했는데,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대했는데, 어떤 때는 빛을 못 보고 어떤 때는 상상 이상으로 반응이 좋을 때가 있어요. 그래서 굳이 어떻게 해야지 잘될까, 하는 생각은 안 해요. 제가 방금 인맥 관리라고 했지만, 결국 실력 있고 뛰어난 사람들은 모이게 돼 있어요. 마치 흙바닥에서 자석을 굴리면 쇠붙이가 다 붙어 오듯이. 자석이 쇠붙이를 쫓아가진 않잖아요? 쇠붙이가 쫓아오지. 그런 현상인 것 같아요.

이정재는 어느쪽인가요?
상황에 따라 자석일 때도 있고, 쇠붙이일 때도 있죠. 아무리 자석이어도 더 큰 자석이 나타나면 끌려갈 테고. N극과 S극도 바꿔야 하고요.

올해의 ‘쇠붙이’가 있을까요?
<관상> 무대 인사를 다닐 때 하루에 여섯 개에서 여덟 개 정도의 극장을 돌았는데, 극장 대부분을 같이 다닌 팬들이 있어요. 항상 극장 맨 앞자리를 전부 예매하고 코스튬을 입고 있죠. 호랑이를 어깨에 붙이고, 상투를 뒤집어쓰고, 얼굴에 흉터 자국을 내고. 그러곤 커다란 플래카드를 들어요. 아, 그 플래카드 보고 한참 웃었어요. ‘40이면 한창 귀여울 나이’래요.

한국 나이론 마흔하나….
하하. 내년에는 또 그렇지 않겠죠. 하지만 올해 정말 고마웠어요. 그 친구들 악수라도 한번 더 해주고 싶고, 사진이라도 한 장 더 찍어주고 싶어요.

귀엽다고 생각해요?
귀여운 것보다 고맙죠. 아…저요? 귀엽냐고요? 어휴, 징그럽지 무슨!

붉은색 턱시도 재킷, 흰색 셔츠, 검정색 보타이, 검정색 바지, 검정색 구두 모두 톰 포드. 검정색 긴 방석은 은채.

붉은색 턱시도 재킷, 흰색 셔츠, 검정색 보타이, 검정색 바지, 검정색 구두 모두 톰 포드. 검정색 긴 방석은 은채.

    에디터
    양승철
    포토그래퍼
    신선혜
    스탭
    헤어 / 케이, 메이크업 / 이가빈, 소품 스타일리스트/ 문지윤, 어시스턴트 / 이채원, 박현상, 정봄이, 의상 스타일리스트 / 인트렌드 정윤기 권혜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