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공적 발화로서의 한국어

2014.10.01GQ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자꾸만 힘을 얻은 채 언론을 통해 공적 지위를 얻는다. 말 같지 않은 말이 공적으로 유통돼 영향력을 가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어 탓은 아니다. 이제 거부할 수 있는 시기도 됐다. 그런 말은 더 이상 한국어가 아니다.

Society판형

 

어떤 한국어는 늘 위에서 아래로 꽂히듯 들려왔다. 진위 여부를 가릴 여지도 별로 없었다. 그럴라 치면 논의의 핵심은 갑자기 다른 곳을 향해 돌진했다. 정치의 영역으로 넘어가면 거의 답이 안 나오는 수준까지 왔다. 일상에서 접하는 공적차원의 한국어 문장은 그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글자와 단어에는 죄가 없을 것이다. 알 수 없는 것은 늘 누군 가의 입이었다. 응당 힘을 가진 위치에서 공적으로 하는 말, 그러니 그런 줄 알라는 말, 그 말을 어떤 의심이나 문제제기, 여과도 없이 활자화 하는 언론. 이를 두고 누군가는 한국어 자체가 풍성한 형용사와 세세한 감정표현에 최적화 된 언어라서, 논리가 부족한 것은 한국어의 태생적 약점이라고 푸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지경에 우리는 지금 소통을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주체는 누구고 대상은 누굴까?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둘러싼 판결은 한국 어의 논리를 다시금 의심하게 만들었다. 판결을 요약하면 이렇다. “국정원이 정치활동을 한 것은 유죄이나 대선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한겨레 21>은 “손등은 내 것 인데, 손바닥은 내 것이 아니오”라는 새정치민 주연합 정청래 의원의 말을 인용했다. 비슷한 어법으로는 이런 말이 있다. “상처 줄 의도는 아니었지만 상처를 받았다면 진심으로 사과한다.” 이건 사과일까? 송영선 전 새누리당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세월호 참사, 큰 불행이지만 국민 의식 재정비 기회 된다면 꼭 불행인 것만은 아니다. 좋은 공부의 기회가 될 것.” 사과는 이렇게 했다. “제 말에 의해 상처를 받으신 분, 털 끝만큼이라도 상처받으신 분이 계시다면, 용서하십시오. 너무 죄송합니다.” 미국 순방 중 성추행 의혹을 받고 있는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사과는 이랬다. “문화적 차이로 인해서 그가 이드한테 제가 상처를 입혔다면 거듭 이해해달라.” 사과에는 가정법이 있어선 안 되고, 이해는 당사자에게 “해달라”는 말을 한다 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몰라서 하는 말일까? 조건과 가정이 섞여있는 그런 말은 사과가 아니다. 그들은 사과를 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호한 말을 언론은 ‘공식사과’라는 말과 함께 가책도 없이 보도했다. 모호함에 권위를 실어줬다.

한 나라의 언어는 생활어와 공식어로 분리할 수 있다. 생활어는 ‘일상생활에서 늘 쓰는 말’이다. 한국은 지난 2천 년 동안 두 개의 언어를 쓰던 나라였다. 생활어는 한국어였고 공식어는 오랫동안 중국어였다. 영어학자 김미경 대덕대 교수는 그의 책 <영어학자의 눈에 비친 한국어의 힘>에 이렇게 썼다. “조선시대에는 중국어(한문)와 크리올(이두)이 상위어로 공식어 의 역할을 담당했다. 한국어는 하위어로서 생활어로만 사용되었다.” 크리올은 두 언어의 요소가 혼합된 언어가 하나의 형식을 이룬 것이다. 이두는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한국어를 적던 표기법이었다. 일제 시대의 공식어는 일본어였다. 김미경 교수는 이렇게 이어 썼다. “일본어와 한국어의 역할이 엄격히 구분되었으며, 그 지위도 달랐다. …지난 2천 년 동안 한반도는 한국어를 생활어로, 중국어와 일본어를 공식어로 사용해 온 이중언어 사회였다. …공식어와 생활어가 분리된 이중언어 사회에서 생활어는 아무런 힘이 없다. 공식어가 교육과 정보 나아가 경제를 움직인다.”

한국어를 공식어로 최초 선포한 건 1894년, 고종 31년이었다. 그 16년 후에 한일병합조약이 있었다. 공식어로서의 한국어 역사가 일단 끊겼던 셈이다. 김미경 교수의 책에는 맥아더 장군의 한국입성 전날, 1945년 9월 8일 뿌려졌던 포고문에 대한 기록이 있다. 포고문 제 1호의 5조에는 이렇게 영어와 한문, 이두로 써있다. “군정 기간 중 영어를 모든 목적에 사용하는 공용어로 한다. 영어와 조선어 또는 일본어 사이의 해석 또는 정의가 불명확하거나 일치하지 않을 때는 영어 원문을 기본으로 한다.” 김미경 교수는 묻는다. “1945년 9월 이 삐라가 뿌려졌을 때 이것을 읽고 그 뜻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전체 한국 국민 중에서 몇 사람이나 되었을까?” 중국어와 일본어의 시대 직후, 영어 공식어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한국은, 말은 한국어로 하면서 공식적인 글은 오랫동안 중국어, 일어, 영어로 썼던 나라였다. 언어는 단절과 권위의 도구였다. 한국어가 다시 공식어로 선포된 것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해였다. 한국어가 법과 정치, 언론과 교육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공적 공간에서 의미와 지위, 권력을 갖기 시작했다. 이제 66년 됐다. 공식어로서 한국어의 역사는 한국인 평균 수명보다 짧고 어리다.

이러니 정부 차원에서도 갈팡질팡했다. 2011년 즈음에는 미국, 유럽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을 비롯한 각종 한글본 협정문에 오류가 무더기로 발견됐다. 한-EU FTA 협정문의 오류는 207개였다. 영어 공식어를 한국어 공식어로 옮기는 과정이었다. ‘역사가 짧아 서툴렀다’ 혹은 ‘분쟁 시엔 영어 협정문이 우선이라 괜찮다’ 말한다고 넘어갈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2012년에는 그것의 수정을 위한 예산조차 편성되지 않았다는 보도가 있었다. 번역가이자 자유기고가 노정태는 말했다. “성경 번역을 기준 삼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경 번역은 라틴어로 된 중세 질서가 깨지고 각국의 근대 언어와 지적 체계가 출발하는 시점으로 간주되곤 하니까요. 루터가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 현대 독일어의 초석을 놓은 것이 16세기였습니다. 한국어 성경이 완역된 것은 1911년, 고작 1백여 년 전이고요. 한문으로 쓰고 읽던 사서삼경과 삼강오륜의 세계가 무너진 시점과 거의 일치합니다. 개신교와 천주교에서 함께 번역한 공동번역 성서는 1977년에 간행됐습니다. 근대적인 지식과 삶을 담아는 언어로서의 한국어는 길게 잡아봐야 1백 년을 갓 넘긴 신생 언어인 거죠. 한국어는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는 거예요. 언어의 큰 흐름에서 보면, 공적 언어로서의 한국어에 대해 절망하기에는 너무 성급합니다. 지금 한국어를 말하고 쓰는 사람에게 한국어를 개발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공식어로서의 한국어는 이제 막 사춘기인 걸까? 좌충우돌, 어떻게든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중학교 교실 같은 상태일까? 논리를 잊은 채, 그 힘을 과시하는 식으로만 그 존재감을 강화하고 있는 걸까? 그런 말을 내버려 두는 건 옳을까? 한국어가 공식어니까 정치인의 말, 법원의 판결문, 언론의 보도는 그대로 인정해야 하는 걸까? 우린 정말 괜찮을 걸까?

약 10년 전, 영어학을 배웠던 대학 강의실에서 교수가 칠판에 문장 하나를 썼다. 그리고 물었다. “Is This English? 이것은 영어입니까?” 문법에 어긋나서, 표현이 어색해서 그 문장이 틀렸다는 건 두루 짐작했다. 하지만 영어로 쓴 문장을 두고 영어가 아니라고 쉽게 말하진 못했다. 교수는 그 문장이 영어가 아니라고 가르쳤다. 이후 그 수업에서, “이 문장은 영어입니까?”라는 질문은 문장의 정확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어쩌면 학술 차원의 얘기일 수 있다 학술적으로 따졌을 때, ‘틀린 문장은 영어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그럼 공식어로서의 한국어는 어떨까? 국어사전은 공식어를 이렇게 정의한다. “정치상 또는 국민 교육상 표준으로 삼아 쓰는 말.”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판결을 두고 범죄과학연구소 표창원 소장은 트위터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즉, 죽인 건 맞지만 살인은 아냐.” ‘유체이탈 화법’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도는 시대다. 정확하게 하자. 그런 말은 그저 말이 안 되는 말, 그래서 이상한 말, 결과적으로는 그 강의실에서처럼 한국어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공식어와 일상어의 차원이 아무렇지도 않게 겹치면서 힘의 균형도 불편하게 흐트러졌다. 그런 말에 힘이 실려선 안 된다.

공식어로서의 정확성과 격을 못 갖춘 한국어가 범람하는데 그 의미조차 모호하니, 지금이 조선 같다. ‘소통’이라는 단어야말로 사치스럽다. 따지거나 혹은 거부하거나, 평가는 듣는 사람의 몫이어야 옳다. 하지만 토론의 규범조차 없는 채, 그저 못된 양반처럼 윽박지르는 데만 익숙한 사람 앞에선 그저 무력해지는 시대인 것 같다. 그럴수록 더 정확하게, 철저히 거부하는 것만이 방법이라고 느껴질 때는 좀 암담한 심정이 되기도 한다. 한글은 우수하고 한국어는 소중하다. 그걸 다 알아도, 이젠 정확하게 거부해야 하지 않을까? 한국어로 말한다고 다 한국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에디터
    정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