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21세기, 인쇄와 디지털, 필기와 터치. 지금 잘 만든 좋은 종이 한 장을 펼쳐본다는 것은….
줌치(장지방, 서울)ㅣ한껏 주무르고 치대어 만든 종이라 해서 이름이 ‘줌치’다. 자글자글한 주름이 곧 부드러우면서도 질긴 속성을 드러낸다. 예전엔 담배나 동전 등을 넣어 다니는 주머니를 만드는 용도로 많이 써서 아예 이름을 쌈지라 부르기도 했는데, 요즘은 그림을 그리거나, 드물게는 수의를 만들기도 한다. 줌치에 기름을 먹이면 가죽 같은 질감이 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손을 탈수록 맑은 광택이 돈다. 구겨졌다 펴지는 촉감은 거의 ‘스판 덱스’를 연상시킬 만큼 탄력이 좋다.
목판 원고용지(운소도, 교토)ㅣ일본의 쇼와 시대 (1926~1989) 초기에 만든 목판으로 한 장 한 장 판화로 찍어내는 원고지다. 에치젠 종이 중 잠자리 날개처럼 얇은 것을 쓴다. 그리고 2백 자가 아니라 2백 50자를 쓸 수 있다. 여기에 쓰는 말로서 2백50자를 고르는 일이란, 과연 체로 치고 또 친 말을 벼리는 일이 아닐까? 운소도는 1891년부터 목판을 이용한 인쇄물을 만들어 파는 가게다. 교토시청 근처 고즈넉한 길가에서 여전히 정시에 문을 열고 닫는다.
63 x 93cm 2만원, 장지방.
감물지(장지방, 서울)ㅣ이 색은 삭힌 땡감으로부터 왔다. 또한 점을 찍거나 붓을 눕히거나 해서 생긴 모양(패턴)은 장인의 손으로부터 왔다. 장지방에서 만드는 한지는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는 ‘흰 종이’에 국한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스스로 ‘작품입네’ 뻐기지도 않는다. 오직 국산 닥으로 정성껏 만들었다는 사실만을 진지하게 전할 뿐이다. 여기에 무엇을 더할지는 종이를 편 자의 몫. 이 아름다운 종이는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호젓해진다. 곁에서 함께 생각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드리스 반 노튼의 셔츠와 얀 카스의 카펫이다.
11.6 x 15.54 cm 8만원대(카드와 봉투 각 8매씩), 크레인 앤 코 by 애슐린.
살라만다 카드(크레인 앤 코, 돌턴)ㅣ번역하지 않고 그저 ‘아쿠아’라 부르고 싶은 푸른 종이. 그 위로 수놓듯이 정확하고 화려하게 박힌 금색 살라만다. 살라만다가 상징하는 바는 ‘불’이며, “이 종이에 뭔가 쓰는 일은 가장 열정적인 순간과 직면하는 것”이라고 (제품설명서)에 쓰여 있다. 미국 화폐, 그러니까 달러 종이를 공급하는 회사인 크레인 앤 코는 1771년부터 면화를 사용한 종이로 유명세를 떨쳐왔다. 부드러운 표면과 깐깐하게도 빳빳한 두께. 이 카드에 쓴다면 강력한 만년필 말고는 다른 선택이 불가능해 보인다. 또한 유려한 필기체라면 쓱쓱 잘 어울릴 것이다.
10.2 x 15cm 1천8백 엔(18매), 운소도.
겐포요우카 엽서(운소도, 교토)ㅣ‘겐포玄圃’는 ‘신선이 오가는 이상향의 대지’를, ‘요우카瑤華’는 ‘옥처럼 아름다운 꽃’을 뜻한다. 에도 시대의 화가 이토 자쿠추는 미친 듯이 섬세한 닭 그림으로 특히 유명하지만, 다양한 화훼와 작은 곤충 따위를 표현한 이 판화 시리즈를 보면, 밑도 끝도 없이 ‘모던하다’는 말이 튀어나온다. 운소도에서 찍어낸 18장의 엽서는 ‘어떻게 이런 검정색이 가능한가?’ 의문이 들 만큼 찬란하게 검다. 이 검정색을 보면, 다시 한 번 밑도 끝도 없이 ‘뉴 블랙’이라는 말이 저절로 정의되어버린다. 순전히 전통적인 기술로, 완벽히 현대적인 뭔가를 만들어내는 일, 가히 아름답다.
15.7 x 11.7cm 20달러(카드와 봉투 각 6매씩), 테라핀 스테이셔너스.
FUCK OFF 카드(테라핀 스테이셔너스, 뉴욕)ㅣ테라핀 스테이셔너스는 특유의 ‘악동’ 같은 감각으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아기 천사나 파인애플 같은 고상한 뭔가가 있어야 할 자리에 수류탄이나 해골이 있고, 응당 ‘I LOVE YOU’ 같은 글자가 어울릴 자리엔 ‘FUCK OFF’ 일곱 글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새겨져 있다. 이런 위트는 구찌나 마크 제이콥스 같은 패션 브랜드와의 협업(초대장 등)을 거치면서 반향을 일으켰다. 이쯤 되면 ‘WTF’라고 쓰인 카드가 누군가의 이름에서 따온 이니셜이 아니라는 것쯤은 눈치챌 일이다. 뉴욕 힙스터 욕쟁이 문구 브랜드가 지금 한창 물이 올랐다. 15.7 x 11.7cm 20달러(카드와 봉투 각 6매씩), 테라핀 스테이셔너스.
7 x 12.5cm 1만원대(55매), 르 타이포그라프 by 애슐린.
미니 메모 패드(르 타이포그라프, 브뤼셀)ㅣ‘Made in Belgium’이 아니라 ‘Handmade in Brussels’이라고 쓰여 있다. 이 앙증맞은 패드를 한 손에 쥐고, 다른 한 손으로 연락처나 약도를 그려주는 모습을 상상하며, 미리 웃는다.
10.3 x 21.7cm 7천5백원, 포스탈코 by 오벌.
행커치프 봉투(포스탈코, 도쿄)ㅣ여섯 번 접은 봉투로, 안에는 크림색 카드가 들어 있다. 종이는 까실까실 부들부들,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다. 자꾸 꺼내보고 싶은 문구를 만드는 포스탈코의 스테디셀러다.
49.3 x 69cm 무료, 파피에 라보.
포장지(파피에 라보, 도쿄)ㅣ의뭉스러우리만큼 재미난 선을 긋는 마사노 히라야마의 드로잉으로 만든 포장지다. 파피에 라보는 ‘종이와 종이와 관련된 뭔가’에 집요하게 집중한다. 그 결과들이 하나같이 알밤 같다.
24.3 x 32.3cm 4천원, 오벌에서 판매.
서류 파일(미상, 독일)ㅣ정확한 품명도, 브랜드도 알 수 없다. 독일에서 옛날부터 나오던 서류 파일이 지금도 나온다는 사실뿐. 바랜 듯한 색깔로부터 이미 오래 써온 물건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지기 편하고, 쓰기 쉽다.
12.99달러(아마존), 도미노.
오웬 팔렛 < HEARTLAND >(도미노, 런던)ㅣ오웬 팔렛의 아름다운 앨범 < Heartland >는 종이와 인쇄라는 명제를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가장 세련되게 풀어낸, 음반 디자인의 빼어난 수작이다.
16 x 11.4cm 65유로(카드와 봉투 각 50매), 피나이더.
시티 스타일 봉투(피나이더, 플로렌스)ㅣ1774년부터 지금까지, 찰스 디킨스부터 마돈나까지, 피나이더는 실로 방대한 팬층을 거느리고 있다. 몇 가지 컬렉션 라인 중 ‘시티 스타일’엔 경쾌한 선이 들어 있다.
65 x 97cm 2만5천원, 장지방.
주칠지(장지방, 서울)ㅣ붉을 ‘주朱’자를 써서 주칠이라 한다. 칠한 뒤 두 달을 꼬박 말려야 간신히 한 장을 얻는다. 색과 무늬는 그때그때 장인의 손길에 따라 달라지며, 두께는 여러 가지다. 100퍼센트 국산 닥으로 만든다.
9 x 5.5cm 1만5천원(100매), 다이인슈 제지 협동조합.
명함용 와시(다이인슈 제지 협동조합, 돗토리현)ㅣ펜이 굴러다닌다. 눈밭에서처럼 미끄러진다. 필요할 때마다 명함을 직접 써서 건네는 일이 번거롭긴커녕 즐겁기만 하다.
- 에디터
- 장우철
- 포토그래퍼
- 이신구
- 어시스턴트
- 최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