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SEX – 사랑방 손님과 어머나!

2015.06.29GQ

어느 봄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게스트 하우스에서 벌어진 일.

“개인실 있나요? 혼자 쓸 수 있는 방이요.” 예약 전에 이미 정보는 충분하다. 게스트 하우스 로비에 바나 카페 같은 곳이 있는지, 밤에 투숙객들끼리 모임을 여는지, 남녀 혼숙인지, 주로 오는 연령대는 어떤지…. 어쩌면 위치, 주변 환경, 교통, 방의 상태보다 더 중요한 일. 홀로 여행을 떠난다는 말이 꼭 완전히 혼자가 되고 싶다는 얘기는 아니다. 대개 떠나기 전엔, 혼자 오래 기억하고 싶은 뭔가(또는 누군가)를 기대하곤 한다. 그 동네보다 또렷한 얼굴과 몸이라든가. 누가 탈지 모르는 버스 옆자리에 예쁜 여자가 앉으면 좋겠다는 기대와 비슷하달까. 물론 그러려고 버스를 타는 게 아닌 것처럼, 여행 역시 꼭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떠나는 건 아니다. 버스는 익숙하지만 여행지는 낯설다는 점에서 기대는 더욱 크기 마련이지만.

떠나기 전엔 집에서 입는 종류의 옷을 꼼꼼히 챙긴다. 좋은 식당이나 전시장에 갈 때 입을 옷을 고를 때만큼 정성을 들인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타이를 매고 돌아다닐 순 없으니까. 차려입기보단 좀 대충 고른 것마냥. 더군다나 게스트 하우스는 호텔이나 모텔과 달리 그런 ‘자연스러움’이 각광받곤 하는 곳 아닌가? 도시와 멀리 떨어진, 실제 자연과 가까운 교외 지역일수록 더욱.

‘배낭여행자의 성지 또는 블랙홀’이라든지 ‘예술가’가 들어가는 이름이 별명처럼 붙은 동네라면, 대개 조용하고 금세 깜깜해지는 데다 주변에 으리으리한 가게 같은 건 없기 마련. 그러니 게스트 하우스야말로 그 지역의 밤을 책임지는 곳이 아닐는지. 처음 보는 남녀가 한 방에서, 또는 아슬아슬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잔다는 것만으로 꽤 섹시한데, 그렇게 낯선 사람들과 며칠쯤 같이 밤을 보내다 보면 미묘한 기분이 들고야 말 것이다. 여행지에서 이미 활짝 열려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감각 또는 감정이, 숙소로 돌아온 밤이라고 사그라질 리도 없을 테고.

더욱더 감수성을 자극하는 곳일수록 그만큼 아슬아슬하다면 비약일까? 손으로 만든 침대, 방 한쪽에 인테리어처럼 놓인 통기타, 벽화가 그려진 대문…. 활활 타오르는 캠프파이어만 없다 뿐이지, 보이스카우트와 걸스카우트가 함께 모인 그 옛날 뒤뜰 야영처럼 모두는 금세 친구가 된다. 그때도 그렇게 우정을 넘어서는 정분이 나곤 했었나? 서로의 텐트를 급습하고, 학교 주변을 깍지 끼고 빙빙 돌던 학생들의 모습을 다 알면서 그날만큼은 눈감아주던 선생님 대신, 게스트 하우스엔 주인아저씨가 있다. <사랑의 스튜디오>까진 아니더라도, ‘러브라인’ 한두 개쯤 있는 TV 예능 프로그램의 사회자만큼이나 능숙한 솜씨로 투숙객들을 이내 친구로 만들어주는.

그렇게 끈끈해질 무렵, 통기타는 전가의 보도처럼 대단한 힘을 발휘한다. 레퍼토리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오, 광석이 형” 소리가 속에서 절로 나오는 가운데…. 취할 만큼 취했으니 아무렴 어떤가, 기타를 못 치면 가사라도 잘 따라 불러야지. 어쩌면 이미 이 밤이 시작된 순간부터 좀 다른 사람 행세를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처음 보는 사람들과 괜히 씩씩하게 인사를 하고, 내일이면 잊어버릴 형님 아우 호칭을 남발하고, 나한테 어울리는 옷 대신 장기 투숙객처럼 보이는 ‘에스닉’한 옷을 골라 입고.

어깨동무하고 술을 마시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쓰러져도, 술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저 반대편에 앉은 남녀가 골고루 섞인 무리들은 아직 썩 취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합류할까? 내 방은 아직 비어 있다. 혼자 쓰는 방. 그것만큼은 서울에서와 같다. 그래서 서울에선 어떻게 말했더라? “집에 가서 한잔 더 하자”고 했었나? 거절당하면 택시를 타고 쌩 집으로 왔든지, 애꿎은 술을 더 마셨든지. 그런데 여기선 피할 곳이 없군. 내일 밤에도 몇몇은 떠나고, 몇몇은 이 자리에 그대로 있을 것이다. 모두의 체크아웃 날짜를 표기한 달력 같은 게 있다면 무척 유용할지도 모르겠다는 짓궂은 생각. 전화번호를 물어보고, 훗날을 기약하기엔 서울에서의 우리는 좀 다른 사람들일 테니.

잠시 소곤거리더니 문밖으로 시간차를 두고 사라지는 남녀, 여전히 자리를 분주하게 옮겨 다니는 주인아저씨, 기타 치는 남자애 앞에 돌하르방처럼 혼자 꼿꼿이 앉아 있는 여자애…. 아마 저 둘은 내일쯤 손을 잡고 아침 식사 자리에 나타날까? 교외 여행지의 밤은 가게가 문을 닫는 순간이 아닌 해가 지는 순간부터 시작이다. 그래서 더 길다. 남이 아닌 내게 몇 번의 밤이 더 남았는지 세어본 뒤, 밖과 달리 썰렁한 게스트 하우스 안으로 들어섰다. 혼자 누운 개인실 창문에선 별이 잘 보였다. 아직 그걸 다 셀 수 있을 만큼의 밤이 더 있다.

    에디터
    유지성
    일러스트
    SO JAE H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