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1백만원 받을 때, 여자는 62만원을 받는 나라. 대체 여기서 누가 누구를 차별한단 말인가?
내게는 편견이 하나 있다. 남자가 여자에 비해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주장하거나, 그런 입장에 동조하는 남자는 지적으로 수준이 낮고 인격적으로도 신뢰할 만한 사람이 못 된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그런 남자는 타고난 용모가 빼어나도, 나이를 먹을수록 얼굴이 못생겨지는 것 같기도 하다.
이것은 편견이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직접 경험하거나 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바, “요즘은 남자가 역차별 당하는 세상 아냐” 하는 남자로서 쓸 만한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런 남자를 편의상 ‘역차별남’이라 불러보자. 그는 지하 주차장에서 “여성 전용 칸은 있는데 왜 남성 전용 칸은 없냐”고 궁시렁대는 자다. “여자들은 손이 없냐, 왜 정수기 물통 갈 때만 날 부르냐”고 투덜거리기도 한다. 생리 휴가에 대한 불평 불만은 역차별남의 주요 레퍼토리 중 하나로, 그는 자신이 경험해본 적 없는 신체 현상을 두고, 도리어 “좀 참았다가 하면 되지 않느냐”는 식으로 말하기도 한다. 특히 데이트 비용을 남자가 전부 혹은 더 많이 내는 것은 부당하다며 역차별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바로 그런 남자, 역차별남이 불량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역차별남은 인류 역사, 한국 사회의 경제적 현황, 통계, 수치 해석 등 다양하고도 중요한 여러 측면에서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 교정할 능력이 없다. 무엇보다 지적 수준의 문제인 셈이다. 둘째, 역차별남에게는 타인, 특히 여성의 생각과 감정을 이해하고 상호작용할 만한 감수성과 사회적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어떤 남자가 역차별 타령을 하고 스스로의 억울한 사정에 함몰된다면, 그는 점점 더 남자의 야성을 잃어 가게 된다.
객관적인 지표를 살펴보자. 2014년 OECD에서 발표한 통계 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남녀 임금 격차는 100:62다. 즉, 남자가 100만원을 벌 때 여자는 62만원밖에 벌지 못한다는 얘기다. 여자들이 그만큼 쉬운 일만 해서 그런게 아니라, 출산 및 육아 과정에서 경력 단절이 발생하고, 그 결과 고임금 정규직 일자리를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새정치민주연합 이인영 의원이 2008년부터 2012년까지 국세청의 과세 대상 남녀 근로자 소득 백분위 자료를 분석한 결과, 2012년 기준, 남성 노동자는 상위 1퍼센트가 평균 2억 9천7백83만원을 받은 반면, 여성 노동자는 상위 1퍼센트라 해도 평균 1억 4천2백28만원밖에 못 받는 것으로 드러났다. 상위 1퍼센트의 연봉을 받아도 여자는 남자의 절반 정도에 그친다.
한국 사회를 두고, (남자를 역차별해서) 여자가 더 살기 좋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물어 보자. 그럼 남자가 여자를 역차별하는 세상을 만드는 대신, 앞으로 모든 데이트 비용은 여자가 내고 남자는 얻어먹기만 하며, 모든 생수통은 여자가 갈아 끼울 테니, 여자가 1백만원 벌 때 남자는 62만원 벌도록 사회 구조를 바꾸자면 그러겠냐고.
이는 세계 어딜 가도 마찬가지다. 비슷한 일을 하는 여성의 임금이 남성의 임금에 비해 더 높은 나라는 레소토 뿐인데, 레소토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내에 지리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그런 나라다. 레소토를 뺀 전 세계 모든 국가에서 남자는 여자보다 소득이 높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나 데이트 강간, 유리 천장, 성추행 등 온갖 경우를 제하고 오직 돈의 논리로만 보더라도, 여자가 남자보다 더 벌면서 편하게 사는 곳은 지구상에 없다.
여자는 비교적 소득이 낮은 직종에 종사하고, 남자는 상대적으로 고소득 일자리를 얻기 때문에 소득 격차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현실은 그보다 복잡하다. 일단 남자가 여자에 비해 소득이 높은 일자리를 먼저 차지하는 현상 자체가 성차별의 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취업 준비생이라면 한번쯤은 겪어봤을 것이다. 필기시험 점수가 같고, 그 외 스펙도 동일하다면, 대부분의 기업은 여자보다 남자를 먼저 뽑는다. 심지어 성적이 더 낮아도 남자를 뽑는 경우도 허다하다. 성인 남자로서, 한국 사회에서는 남자라는 것 자체가 스펙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면, 그는 관찰력이 부족하며 통계를 이해할 능력도 갖추지 못한 셈이다.
한국은 이토록 남성 중심적인 사회지만, 적잖은 남자가 억울한 감정을 느낀다. 그 이유는 역차별남이 남자로서 다소 하자가 있는 두 번째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한국 사회는 남성 간의 유대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있으며, 그런 비공식적 관계와 유대가 개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영문학자 이브 세지윅의 표현을 빌자면, 한국은 대단히 호모소셜homosocial한 나라다. 호모소셜이란 ‘성적인 것을 억압한 남성 간 유대’를 의미한다. 세지윅의 이론을 소개하고 있는 우에노 치즈코의 말을 빌려보면, “호모소셜적인 연대란 성적 주체(로서 서로가 인정한 사이) 간의 연대를 말한다. (…) 호모소셜한 남자가 자신의 성적 주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이용하는 장치가 바로 여성을 성적 객체화하는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집단적으로 성적 대상화하고 비하하는 걸로 남자로서의 동질감을 느끼는, 그게 일상이 된 사회다.
회식 등 직장 술자리 문화에 대해 생각해 보자. 직장마다 다양한 형태의 회식이 있겠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남자들끼리의 술자리를 만들어 유대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남자 대 남자로 툭 터놓고 이야기해야 비즈니스가 된다고 믿는 이가 아직 많다. 그런 사고방식은 근본적으로 여자를 대상화하고, 또한 여자 같은 남자를 2등 시민으로 만들어 밀어냄으로써, 배제의 논리를 통해 남자를 정의하고 그 남자끼리 권리와 재화를 독점하는 체계를 낳는다.
어떤 남자는 진심으로 회식을 즐긴다. 남자 끼리의 끈끈한 연대와,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술자리와, 사석에서 형님 동생 하는 회사 생활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기는 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설령 남자라 해도, 호모소셜한 남성중심적인 문화 속에서 행복하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해법은 더 많은 여성이 다양한 조직에서 다각도로 활동하는 것뿐이다. 가령 술잔을 부딪치면서 “성공과 행복을 위하여!”를 줄여 “성행위!”라고 외치는 것은 남성 중심적인 호모소셜한 조직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한 일일 테니 말이다. 어느 집단에서건 여자들이 더 많이 섞여 있어야 실은 남자들도 편하다.
적잖은 남자들이 그걸 적어도 머리로는 알고 있다. 걸림돌이 되는 것은 그들에게 밴 습속이다. 사회의 다양한 분야와 조직에 진출한 여성들이 기존의 호모소셜한 문화에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은 남자들의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 온다. 자신이 여성 친화적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나 그렇게 주장해온 남자도, 본인이 던진 농담에 상대방이 정색을 하고 반발할 경우, “이래서 한국 페미니스트들은 안 된다”는 반응을 내놓는 것이다. 그런데 몸에 배어 있는 조건반사적인 반응을 스스로 인지하고 통제하는 것, 그건 한 남자가 신사로 성장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 교육 과정 아니던가?
여성이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그 어떤 사회도 완전한 성평등을 이룩한 적이 없다. 그리고 여성의 요구가 자신을 향한다고 해서 대뜸 발끈한다면, 그는 남자다움의 미덕을 실천할 기회를 놓친 셈이다. 머리로 알고 있다면 몸으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남자들이여, 부디 억울해하지 말자. 남자가 여자에게 억울해할 수 있을 만한 합당한 근거는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사 이래 지금까지 모든 사회는 남자에게 유리했고, 그 과실은 모든 남자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았다. 보다 많은 사람이 평등하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려면, 남자는 기꺼이 여성과 연대해야 한다. 꼰대들과 함께 여자를 손가락질하면서는 절대 그 꼰대들을 이길 수 없다.
이렇게 거창하고 건설적인 이유를 접어두 더라도, 역차별남이 되어서는 안 될 이유가 더 남아 있다. 뭔가 억울해하는 남자는 매력이 없다는 엄연한 사실 말이다. 이건 숫제 자연의 법칙이다. 번식철, 모든 수컷은 암컷에게 잘 보이기 위해 먹이도 바치고, 깃털도 뽐내고, 목청을 자랑한다. 유독 한국 남자만은 그런 숙명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납득이 안 되면 일단 외우는 것도 좋다. 역차별은 없다. 역차별을 주장하는 것은 남자 자신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역차별을 항변하는 남자만큼 매력 없는 존재도 없다. 억울한 기분을 이겨내고, 더 좋은 남자가 되어보자는 말이다.
- 에디터
- 노정태(칼럼니스트, 저자)
- 일러스트레이터
- 문수미(MUN, SU M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