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와 레이스가 찰랑이는 슬립을 늘 갖고 싶었다. 란제리 가게에서 그 차가운 천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놓는 일은 더 많았다. 슬립은 내게 유혹이나 관능이라기보단 ‘결혼 생활’에 더 가깝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 꺼내 입을 수도 있지만, 늘 이런 옷을 입고 잔다는 건 누군가 옆에 있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가장 일상적이고 가장 내밀한 순간에도 흐트러지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체면 혹은 가면과 비슷하달까. 슬립을 입은 여자의 모습을 떠올릴 때 선명한 향기와 뻑뻑한 일상과 뜻모를 불안이 뒤엉켜 있다고 생각하면 그건 또 너무 별스러운 걸까. 지금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고 가는 슬립이 어울리는 여자 몇몇, <나를 찾아줘>의 에이미, <하우스 오브 카드>의 클레어, <사랑과 야망>의 미자…. 제임스 설터의 소설 <가벼운 나날>을 읽으면서도 이 차가운 천을 두른 네드라를 내내 상상했다. 세세하게 엮인 일상, 연극적인 흥분과 행복, 마모되어가는 시간, 비눗방울처럼 떠올랐다 이내 터져버리는 나날들 속에서 슬립을 입고 잠들지 못한 여자를 생각했다. 그리고 여전히 실크와 레이스가 찰랑이는 슬립을 갖고 싶다는 내 생각도 잠들지 못했다.
- 에디터
- 손기은
- 포토그래퍼
- 정우영
- 제품 협찬
- 우먼시크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