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이나 2는 당장 파악되는 숫자입니다. 3은 복잡하지 않고 작은 단위의 최대치입니다. 스포츠의 메달 셋, 트로이카 배우, 성경의 삼위일체도 그래서겠지요? 4는 약간 어렵습니다. 그래서 로마인도 1, 2, 3은 Ⅰ, II, III으로 표기했지만 4는 ⅢⅠ가 아니라 IV로 썼잖아요? 5는 쉬운 단위입니다. 해부학적인 이유로. 15는… 엄지부터 약지까지면 끝나는 나의 수리력으론 접근 범위 밖의 숫자입니다. 하지만 평면에 찍힌 점 열다섯 개는 인지과학자들도 한 번에 헤아리지 못할 것입니다. 중세 목판화나 타로 카드에서 해골이 든 큰 낫이 문득 15로 보입니다. 목소리에서 연기가 나는 과부하의 시기엔 왕왕 있는 일입니다. 마감 땐 내일쯤 미칠 것 같은 게 아니라, 어제 이미 미쳤기 때문에. 심지어 지금은 창간 15주년 기념호 마감 중입니다. 편집실 밖은 불가해한 빛의 와인처럼 어두운데 소똥 속에서 질식사한 헤라클레이토스가 괜히 생각납니다. 취향에 관한 미완의 에세이를 남긴 채 죽은 몽테스키외도 있군요. 한 달을 현재형 시제로 묶어 살며 자기가 만드는 잡지를 통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자문해온 15년이 이런 식으로 지나고, 나는 성년이 되었습니다. 당신도 이 질문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 무엇을 하는지 알만큼 충분히 나이 들었고, 여전히 뭔가 도모할 만큼 젊습니다. 짐작되는 15년간의 이야기는 나의 것이면서 같은 목적지로 향하는 당신의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서로 완전히 연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혼란스럽게 이해하지만 더 공개된, 공유 가능한 문화에선 두 개의 언어를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플래시가 터지고 개인적인 향수가 이어집니다. 알파벳으로 말하는 사람들, 익사시킬 것처럼 쌓인 잡지들, 예쁜 옷이 범람하는 장소들, 독자의 수용성이라는 허가 혹은 일치…. 회상은 일화와 삽화, 건망증과 중독, 생각 없이 축적된 지식과 경험의 희미한 자국으로 이끕니다.
창간 무렵의 나는 차를 마시는 정제되고 부드러운 매너도 잘 몰랐습니다. 입는 것도 제 편한 대로, 신발도 채 안 신고 넘어질 듯 비틀대는 아이처럼 무신경했습니다. 오직 인간의 본성 중 가장 필요한 충동만 컸습니다. 가지는 순간 나를 포기하고 떠나는 충동. 이렇게 결핍된 사람이 게토 같은 한국 남자의 세계로 뛰어들어 법칙을 제시하고 새로 정의를 내리며 불현듯 계몽할 수 있는 걸까? 다수가 포함된 화두에 견고한 지식으로 참견할 수 있을까? 직업적으론 분명 과장된 시간이었습니다.
우선, 글자가 흑임자만큼 빽빽한 문학전집이 네 벽에서 퍼붓는 것 같은 감각의 시대에 복식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작은 디테일이 가장 중요한 단서를 지닌다는 사실과, 실용적인 의도가 적고 필수적이지도 않은 사물을 대할 때의 풍성한 감각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말을 할 때 단계와 정도가 존재하듯이 옷도 목적과 대상, 장소의 적절한 척도에 의지한다고 곁들였습니다. 모두가 떠들지만 아무도 정확히 모르는 규칙도 정리 정돈했습니다. (행커치프는 어떻게 접어야 하는지, 코트 길이는 다리의 어디까지 내려와야 하는지, 바지 넓이는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 특정한 옷을 왜 입는지보다 중요한, 어떤 옷은 왜 안 입는지에 대한 난감한 주제도 다루었습니다. 인문학적인 섭렵이 주는 지위, 음식, 기기, 음악이라는 친숙한 요소, 기득권 문화로서의 여행과 피트니스가 현대 르네상스맨의 기준인지 멍을 남긴 난타인지는 지금도 헷갈리지만, 21세기의 불운을 입증하는 사회와 기울어진 의문들, 먼 길을 돌아온 속물적 근성과 페이지마다 뒷받침되는 통계는 <지큐 코리아>가 가진 크로스오버적 어필의 이면을 드러냅니다.
문제는, 잡지를 만들 땐 대상에 대해 어떤 입장 또는 태도를 취할지 정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엔 종종 파우스트적인 기미가 있습니다. 입장이 다른 요구를 ‘수락’하면 잡지가 가진 영혼의 일부를 잃고, 뭔가 기분이 상했습니다. 자존심을 매체의 금본위 가치로 고수하는 건 편협한 생각일 수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불확정성, 아이러니, 음침함이 좋았습니다. 특히 퉁명스러운 직설법, 옹색한 현학이 좋았습니다. 우아한 오브제들을 페이지 가득 실으면서도 미숙하게 냉소하며 얕은 불행과 연결시키는 기질, 어디서든 주시 받는 걸 싫어하고 그걸 좌우명처럼 여기던 시간은 심화되었습니다. 나는 스스로를 증오하는 한 마리 푸들이 취해가는 것처럼 소극적이고도 부산스럽게 21세기에 융화되었습니다.
막간에 15년의 결과를 조립해봅니다. 합은 부분보다 중요합니다. 나라는 흩어진 조각의 퍼즐은 보기 좋게 짜맞추어졌을까요? 그때 알던 사람을 만나면 나를 다시 소개해야 할 만큼 훌륭해졌을까요? 재검토하려는 건 당신과 나, 누구의 과거에 대한 감각일까요? 어떤 식으로든 그때의 안절부절못하던 미숙아, 침울한 멍청이보단 나을 거라고 자신하지만, 상상보단 덜하고 기대엔 못 미칩니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통찰력이 저절로 새겨진 자유 승차권은 없습니다. 누구도 나의 플라톤적인 이상과 동떨어져 있다면, 나 스스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장수長壽는 시간의 가치를 부정하는 세상에 최고의 상품이자 마일리지지만, 그래봤자 <지큐 코리아>는 이제 겨우 열다섯 살 소년에 불과합니다. 몸은 커졌고 에너지는 통제할 수 없는 채 원숭이처럼 웃고, 플라멩코처럼 걷는. 그리고 유년기와 성인기의 교차가 감동적인 챕터로 쓰이는 경험을 맛볼 순간이 왔습니다.
규율은 사라집니다. 패션도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 다만 조금씩 바뀔 뿐입니다. 두 번째 여정도 처음 발자국에서 시작됩니다. 열다섯 살 소년은 목적지에 다다를 때쯤 극적인 변화의 경계에 있는 도시의 스무 살처럼 떠 들썩해질 테지만, 잠깐 망설입니다. 방금 떠난 길에선 어떤 신발을 신어야 했을까? 열다섯 살의 정수리에 쏟아지는 햇볕이 간질간질합니다.
- 에디터
- 이충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