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포르쉐 911 터보 S를 시승했다. 배기량은 3.8리터였지만 이전보다 20마력이나 높은 580마력을 내고 시속 330킬로미터까지 달렸다. 타고 또 타도 질릴 틈이 없었다.
남아프리가 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최신 911 터보 시리즈를 시승했다. 쿠페와 카브리올레, 타르가로 구성된 포르쉐 카레라 4 시리즈도 같이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영화 < 디스트릭트 나인 >이나 < 채피 >에서 엿본 것이 전부였던 남아공은 치안이 불안한 혼돈 상태의 나라였다. 요하네스버그의 연간 10만 명당 살인율은 30여 명. 나쁜 의미에서 전 세계 상위권이다.
착륙 직전 내려다본 요하네스버그는 예상과 딴판이었다. 사자가 얼룩말을 쫓는 대자연은 없었다. 빽빽이 늘어선 건물 사이로 널찍한 도로가 쭉쭉 뻗은 대도시였다. 고물차와 고급차가 나란히 달렸다. 남아공의 빈부 격차가 도로 풍경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우리를 태운 버스가 신호대기에 멈춰 서자 낯선 광경이 펼쳐졌다. 도로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분무기로 자동차 앞유리에 물을 뿌린 뒤 돈을 요구하거나 이것저것 잡다한 물건을 팔았다. 다음 날 같은 길을 포르쉐 911 터보로 지날 생각 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도로 양쪽의 상가는 가게마다 촘촘한 쇠창살을 씌웠다. 주택가 대문과 담벼락엔 ‘전기 주의, 무장경비’란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거리에서 백인은 코빼기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우린 잔뜩 주눅이 든 채 숙소로 들어섰다. 설상가상으로 포르쉐 스태프가 긴장을 부채질했다. “개별적으로는 절대 숙소 밖으로 나가지 마세요.” 리조트 입구를 지키는 경비원이 수호천사로 보였다.
남반구에 자리한 남아공은 우리와 계절이 반대다. 지금은 기온이 섭씨 25도를 넘나드는 초여름이다. 우린 잠시 에어컨 바람으로 더위를 식힌 뒤 다시 버스에 올랐다. 다음 날 시승에 앞서 포르쉐가 준비한 프레젠테이션을 듣기 위해서였다. 버스는 호객꾼과 잡상인을 묵묵히 헤치며 요하네스버그를 빠져나갔다. 한 시간 정도 달려 우린 키알라미Kyalami 서킷에 도착했다.
키알라미는 줄루족 언어로 집이란 뜻이다. 한국에서 온 우리에게는 낯설었지만 사실 이 서킷은 꽤 유명하다. 1961년 문을 연 이후 아프리칸 그랑프리와 F1 등의 경주를 치렀다. 그런데 몇 년 전에 이 서킷이 경매에 나왔다. 그걸 남아공에서 포르쉐를 수입해 파는 사업가가 덥석 사들였다. 최근에는 리노베이션 공사를 마쳤다. 그렇게 새로 단장한 이후 치르는 첫 행사가 바로 이번 시승회였다.
포르쉐는 서킷 피트에 행사장을 차렸다. 이날 포르쉐는 신형 911 터보의 전반적인 내용을 소개했다. 신형 911 터보는 외모를 좀 더 날카롭게 다듬었다. 911 카레라 시리즈와 맥을 같이한 변화다. 헤드램프를 위아래 두 개의 광원으로 나눴다. 도어 핸들은 테두리처럼 주변을 에워싼 테두리 없이 문짝에 바로 붙였다. 한층 더 깔끔하다.
앞 범퍼는 흡기구를 키웠다. 가운데 흡기구 좌우엔 열을 빼내기 위해 가로로 칼집을 냈다. 꽁무니 엔진룸 커버엔 기존의 가로 대신 세로 그릴을 씌웠다. 911 카레라 시리즈에서는 왠지 참빗이 떠올라 아쉬웠다. 터보 시리즈는 우람한 뒤 범퍼가 시선을 압도해 그나마 낫다. 머플러는 네 가닥으로 뽑았다. 터보는 크롬, 터보 S는 블랙 크롬으로 단장했다.
테일램프는 마칸처럼 표면을 울룩불룩하게 새로 다듬었다. 브레이크 페달을 밟으면 램프 하나당 네 군데에서 불을 밝힌다. 엉덩이는 역대 911을 통틀어 가장 빵빵하다. 911 카레라의 차체 너비는 1,808밀리미터, 사륜구동 방식의 카레라 4는 1,852밀리미터다. 반면 911 터보는 1,880밀리미터로 자연흡기 911의 기함인 포르쉐 911 GT3 RS와 같다.
지난해 911 카레라 시리즈는 코드네임 991의 후기형으로 진화했다. 7.5세대인 셈이다. 이때 엔진을 바꿨다. 카레라의 3,436cc 엔진과 카레라 S의 3,800cc 엔진을 3.0리터, 2,981cc로 줄였다. 그 대신 터보차저를 얹었다. 성능과 연비를 다시 한 번 끌어올렸다. 이제 카레라는 370마력, 카레라 S는 420마력을 낸다. 각각 20마력씩 올라갔다.
이제 911 카레라는 모두 터보 엔진을 쓰게 됐다. 따라서 기존 911 터보의 상징적 위상이 다소 모호해졌다. 하지만 포르쉐는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다. 포르쉐가 스포츠카의 성능을 끌어올리는 전략을 보면 당구 고수가 점수 빼는 모습이 떠오른다. 이번 진화만 해도 그렇다. 더도 덜도 아닌 딱 20마력씩 올렸다. 한마디로 장사의 달인이다.
이번 911 터보의 엔진은 수평대향 6기통 3.8리터 트윈 터보였다. 기존 911 터보와 같았다. 하지만 출력은 터보 540마력, 터보 S 580마력으로 이전보다 각각 20마력씩 높아졌다. 최대토크는 터보가 72.3㎏·m로 5.09㎏·m 늘었고, 터보 S는 76.4㎏·m로 변화가 없다. 시속 100킬로미터 가속 시간은 각각 0.2초씩 줄였다. 터보는 3.0초, 터보 S는 2.9초다. 최고속도는 터보가 시속 315킬로미터에서 320킬로미터로, 터보 S가 시속 318킬로미터에서 330킬로미터로 늘었다. 동시에 연비는 6퍼센트 개선했다. 제원만으로는 워낙 까마득한 성능이라 감이 오지 않을 수 있다. 그럼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시속 330킬로미터로 달리는 911 터보 S가 1초 동안 이동하는 거리는 얼마나 될까? 무려 91미터다.
실내에서 눈에 띄는 변화는 스티어링 휠이다. 지름을 360밀미리터로 줄여 감싸 쥐기가 한층 편해졌다. 스티어링 휠엔 918 스파이더처럼 다이얼을 달았다. 0이 노멀, S가 스포트, S+는 스포트 플러스, I는 인디비주얼의 약자다. 가운데 빨간 버튼을 누르면 차가 미쳐 날뛰듯 한다. 어떤 모드에서건 20초 동안 스포트 플러스 모드로 변한다. 20초씩 반복해서 계속 쓸 수 있다.
911 터보의 변속기는 자동 7단 PDK다. 수동 모드에서의 조작법은 경주차처럼 위=다운 시프트, 아래=업 시프트로 바꿨다. 사륜구동 시스템인 포르쉐 트랙션 매니지먼트 PTM은 구동력을 옮기는 과정을 좀 더 빠르고 정교하게 개선했다. 포르쉐 커뮤니케이션 매지니먼트 PCM은 드디어 애플 카플레이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다음 날 아침, 요하네스버그 포시즌즈 리조트 앞마당에 911이 도열해 있었다. 터보와 터보 S, 카레라 4 각각의 쿠페와 카브리올레가 섞여 있었다. 난 터보 S 쿠페를 배정받았다. 다 같이 호텔을 벗어날 때, 걸걸한 배기음에 고막이 다 얼얼했다.
요하네스버그 시내는 이른 아침부터 꽉꽉 막혀 있었다. 공포의 교차로에 멈춰 섰다. 역시 원주민들이 다가왔다. 우린 바짝 얼어서 모르는 척 앞차 꽁무니만 노려봤다.
드디어 키알라미 서킷에 두 번째로 들어섰다. 카레라 4로 예습 삼아 서킷을 돌았다. 3.0리터 터보 엔진의 느낌이 정말 궁금했지만 역시 포르쉐였다. SUV에 스포츠카의 느낌을 감쪽같이 담았던 솜씨가 녹슬지 않았다. 터보차저를 붙이고도 자연흡기 엔진의 특성을 기가 막히게 흉내 냈다. 최대토크를 뿜는 시점도 슬그머니 고회전 영역으로 미뤄놨다.
이제 911 터보 S의 운전석에 앉았다. 포르쉐의 정예 교관은 911 GT3 RS를 몰고 우릴 이끌었다. 첫 랩은 탐색전이라며 안심시키더니, 911 GT3 RS는 출발과 동시에 아득히 사라졌다. 911 터보 S의 행렬이 반사적으로 페이스카를 뒤쫓기 시작했다. 시속 100킬로미터 가속시간 2.9초의 가속은 정말이지 살벌했다. 911 GT3 RS의 펑퍼짐한 엉덩이가 순식간에 줌인하듯 가까워졌다.
911 터보 S는 가속페달을 밟을 때마다 76.4㎏·m의 토크를 콸콸 쏟아냈다. 트랙 주행 때 코너에서 타이밍을 놓쳐 엔진 회전수를 떨어뜨리면 김이 쏙 빠진 가속을 가까스로 이어가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911 터보 S와 함께할 땐 그럴 걱정이 없었다. 어떤 속도, 어떤 엔진 회전수에서도 격렬한 가속을 이어갔다. 콱콱 치솟는 파워를 어떻게 다독이느냐가 매끈한 주행의 관건일 정도였다.
이번 911 터보의 엔진은 가속하다 잠시 페달에서 발을 떼도 드로틀 밸브를 연 채 기다렸다. 터보차저의 부스트압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다시 가속하고 싶을 때 엔진에 보다 신속하게 흡기를 쑤셔 넣을 수 있다.
신형 911 터보 S는 스티어링 휠 조작의 스트레스도 한층 줄어들었다. 접지력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예쁘장하게 궤적을 그려야 한다는 강박에서도 자유로웠다. 코너를 공략하는 라인이 삐뚤빼뚤해도 신경 쓸 필요 없었다. 가속페달만 지그시 밟으면 모난 라인은 어느새 뭉개지고 흐릿한 궤적을 알아서 다듬어 달렸다. 정교한 전자장비와 사륜구동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시너지였다.
이번 911부터 더한 네 바퀴 조향 시스템 4WS도 거의 순간 이동에 가까운 코너링을 돕는 일등공신이었다. 911 터보와 터보 S의 경우 뒷바퀴를 시속 0~40킬로미터에서는 앞바퀴와 반대 방향으로, 시속 80~330킬로미터에서는 앞바퀴와 같은 방향으로 0~2.8도 꺾는다. 제동 성능도 개선했다. 시속 100킬로미터에서 정지 상태까지의 제동 거리를 0.7미터 줄였다. 브레이크와 타이어를 손질한 결과다.
911 터보 S는 궁극의 욕심쟁이였다. 압도적인 힘과 위상, 쉬운 운전까지 한 번에 거머쥘 수 있는 911이었다. 911 터보 S의 성능은 이제 반론의 여지조차 없이 무르익었다. 왕초보부터 왕년의 레이서까지 실력에 구애도 없이 모두를 너그럽게 받아준다. 게다가 비슷한 성능의 소위 슈퍼카와 달리 매일 타도 크게 불편하지 않다.
이런 흐름이라면 다음 세대 911 터보 S를 예상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아마도 출력은 20마력 높이고, 시속 100킬로미터 가속시간은 0.2초 정도 줄이겠지. 예측은 할 수 있다. 수치로 드러난 911 끝판왕의 진화는 늘 이런 식으로 여운을 남긴다. 하지만 일단 몰아보면 그 이상을 상상하기 어렵다. 예측을 초월하는, 그야말로 평생 잊지 못할 감동과 충격을 안겨줘서다.
- 에디터
- 컨트리뷰팅 에디터 / 김기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