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살 때였다. 나는 주말을 이용해서 종종 이웃 나라 벨기에로 맥주 여행을 갔다. 그런데 내가 간 벨기에 시골의 한 브루어리에서 그 얼마 전에 한국 수입사가 다녀갔다고. 그것도 한 달 동안에 3개의 수입사가 다녀갔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의 쏠림 현상이 맥주까지 왔구나’라는 씁쓸한 생각이 잠시 들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대형 마트 수입 맥주 코너에 가보니 ‘정지화면 아님’ 같은 자막이 들어가야 할 만한 상황이 예전보다 자주 목격되었다. 카트를 몰고 가다가 맥주 코너 앞에서 멈춰 선 채 무슨 맥주를 사야 할지 몰라 한참을 고민하는 사람들 말이다. 이마트나 홈플러스 같은 대형 마트의 비즈니스 모델은 저가의 소품종 상품으로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것일 터 인데, 우리나라 마트의 맥주 상품 구색은 다양성 측면에서 이미 미국 홀푸드나 트레이더 조 Trader Joe’s를 따라잡고 있다. 원래 다품종 소량 판매는 온라인 채널이 해야 하는 역할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주류의 인터넷 판매가 허락되지 않고, 대형 보틀 숍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신기하게도 대형 마트가 이 역할을 담당한다.
그런데 올해 초를 기점으로 상황이 흥미롭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영국 테스코에서 한국의 사모펀드인 MBK로 주인이 바뀌고 드디어 정신을 차린 홈플러스는 안 팔리는 맥주, 상미 기한이 다 되어가는 맥주를 헐값에 떨어버리기 시작했다.(그렇다! 맥주에도 상미 기한 Best-by Date이 있다!) 네티즌들은 이런 상황을 ‘홈플대란’이라고 표현했다. 홈플러스가 정신을 차리고 맥덕질(맥주 덕후질)을 그만두기로 맘 먹은 듯했고, 이마트도 슬금슬금 따라 하기 시작했다. 직원들은 “이번 프로모션이 끝나면 해당 제품은 재입고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맥주 덕후들의 폭풍 구매를 부추겼고, 어떤 맥주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실시간으로 어느 점에 어떤 맥주가 몇 병 남았는지 점별 상황이 중계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신이 예전에 맛있게 마신 벨기에 수도원 맥주는 이제 더 이상 마트의 매대에 없다. 몰티한 맛이 특징인 영국의 비터 맥주도 이제는 끊겼다. 간단히 말하면 의욕적으로 수입했는데 안 팔려서 땡처리하고 다시는 수입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처음에는 수입사들도 수입 맥주 시장이 성장하고, 마트에서 수입 맥주에 할애하는 매대의 크기를 늘렸기 때문에 이것저것 많은 물량을 수입했다. 그래서 이른바 파이프라인 볼륨 Pipeline Volume, 즉 제품을 처음 론칭할 때, 유통 채널에서 매대에 비치하기 위해 구매하는 물량이 꽤 컸다. 하지만 그러한 다양성을 소비자가 아직 소화할 수 없었기에 유통 채널의 매대에서 팔리지 않고 몇 달동안 잠자고 있던 맥주들에 대해 유통사가 땡처리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 것이다. 수입사는 이제 더 이상 그런 맥주들을 수입할 이유가 없다. 너무 일찍 다양성에 노출되어버린 한국 소비자들은 앞으로는 오히려 다양성이 제한되는 역풍을 맞았다.
벨기에 브뤼셀에서조차 물량이 달려서 구하기 어려웠던 구즈 Gueuze도 수입되더니만, 지난 2월에 오픈한 한 펍에서는 미국의 유명 맥주 평가 사이트에서 몇 년째 1등을 하고 있는 맥주를 비행기로 몇 박스만 한정 수입해서 판매한 적도 있다. 이 맥주의 수입 소식은 국내 맥덕 커뮤니티에 전해지면서 해당 물량이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하지만 다음 번 물량이 언제 올지에 대한 기약은 없다. 이미 마셔볼 사람 들은 한 번씩 다 마셨고, 이들은 입맛을 다시며 또 다른 맥주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다. 이런 맥주의 감동을 받아 소주나 와인을 버리고 크래프트 맥주로 전향한 사람들은 이 맥주를 구경 조차 못했다.
아직 성숙하지 않은 한국 크래프트 맥주 시장에서 ‘다양성 경쟁 모드’로는 크래프트 맥주 저변이 넓어지지 않는다. 맥주를 마시지 않던 사람들을 맥주로 입문시키는 맥주가 아니라, 수입사들은 ‘더 희귀한 맥주 수입하기’, 유통사들은 ‘더 다양하고 큰 맥주 매대 있다고 자랑하기’, 소비자들은 ‘더 다양한 맥주 마셔봤다고 자랑하기’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이래서는 크래프트 맥주 열풍이 찻잔 속 소용돌이로 끝날 수 있다.
최근에는 유명 수입 맥주 브랜드가 들여오면 의례적으로 탭 테이크오버 Tap Takeover 행사를 한다. 이태원이나 가로수길에 있는 유명 펍을 하루 빌려 그날은 그 수입 브랜드의 맥주 전 종류를 맛볼 수 있게 하는 행사다. 이런 행사에 가면 매번 똑같은 얼굴들이 보인다. 수입업이나 유통업에 종사하는 ‘업자’가 아닌 순수 소비자들인데, 행사에는 계속 똑같은 얼굴들이 보인다. 저변이 넓어지는 게 아니라 마시던 사람들만 마신다.
크래프트 맥주의 특징은 ‘다양성’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그동안 다양성이 너무 억압되어왔다. 하지만 수입사나 유통사 모두 다양성 중심의 덕질을 멈추고 어떻게 하면 와인과 소주 마시는 사람들을 크래프트 맥주로 끌어들일 수 있을 정도의 맥주를 만들지 좀 더 진지한 고민을 해야만 한다. 결국 미국 크래프트 맥주 시장도 맥덕들이 열광하는 ‘오크 배럴 에이지드 벨지안 사우어 세종’이 아니라 ‘사뮤엘 아담스’ 한 방으로 보편화를 이룩했다. 이제 수입사들은 가능성이 있는 몇몇 브랜드에 집중해 장기적으로 키우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자꾸 여기저기 모래성을 짓지 말고 단단한 건물을 높이 쌓아야 멀리서도 보고 몰려들 테니 말이다.
- 에디터
- 글 / 김태경(시서론, ‘어메이징 브루잉 컴퍼니’ 대표)
- 출처
- Gettyimages / 이매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