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퍼 블랙넛은 2014년 데뷔 싱글 ‘100’ 이후 싱글을 발표할 때마다 적잖은 논란을 일으키며 한국 힙합 시장의 ‘이벤트 맨’으로 자리매김했다. 명확한 캐릭터로 도발적 심리 묘사를 펼치는 데 재능이 있다 보니 그 파급력 역시 강하다. 논란은 늘 그가 쓴 가사가 주는 불편함 때문에 발생한다. 그리고 그 불편함은 여성 혐오, 나아가 이를 포함하는 약자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데서 기인한다. 보이스웨어 프로그램을 사용한 랩 퍼포먼스로 이목을 끈 김콤비 시절이나, 이후 MC기형아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공개 곡들의 문제적 가사까지는 언급할 필요도 없다. 놀랍게도 블랙넛이 정식으로 데뷔한 후 발표한 모든 싱글에 여성 혐오 표현이 끊임없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치기 어린 시절의 ‘흑역사’가 아니라 그가 현재 내세우는 캐릭터의 핵심이라는 말이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것이 그에게 열광해 마지않는 이들에게 묘한 쾌감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잠깐, 이쯤에서 조금 떨어져 바라보자. 나는 어쨌든 블랙넛을 비판하는 기사를 쓰고 있고, 그를 비판하는 이유는 그가 여성 혐오 가사를 쓰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그만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블랙넛의 여성 혐오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나는 블랙넛이 자신을 여성 혐오자로 인식한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블랙넛이 여성 혐오자라서 사람들이 그를 좋아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블랙넛은 매번 여성 혐오 가사에 집착하고, 그것이 그의 음악을 듣는 이에게 제대로 꽂히는 ‘셀링 포인트’임은 부정하기 어렵다. 대체 왜 이런 황당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까? 바로 이 사회가 ‘여성 혐오’라는 용어를 너무나 단순하게 받아 들이고 곡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 혐오는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을 어떤 식으로든 불합리하게 대상화하고 이를 확장해나가는 모든 사회 문화적 태도를 포함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성적 성향을 단순히 대입하고는 자신은 여성 혐오자가 아니라고 판단해버린다. “나는 여자를 좋아하니까 여성 혐오자가 아니야”라는 식이다. 블랙넛도 마찬가지다. 그의 가사에는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설정한 뒤 드러내는 비틀린 애착이 가득하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이것은 블랙넛 자신이나 그의 음악을 듣는 이들이 자신은 여성혐오자라는 자기 경멸에 빠지지 않게 한다.
물론 이정도로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블랙넛이 가사 안에서 여성을 다루는 방식과 단어 들은 극도의 불편함과 저급함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누구든 이런 가사를 흡수하고 즐기기는 쉽지 않고, 그러기 위해서는 또 다른 감상(혹은 동조)의 동기가 필요하다. 이미 블랙넛도 그 음악을 듣는 자신도 여성 혐오는 아니라고 스스로 결론을 내린 상황. 블랙넛은 이런 자가 당착의 상황에 빠진 이들에게 아주 간단하지만 강력한 명분을 제공한다. 자기를 연애 한번 못해보고 섹스도 한번 못해본 남자로 규정해 버린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블랙넛은 여성을 언제나 잠재적인 성욕 해소 대상으로 바라보며 그 눈물겨운 절실함도 랩으로 녹여낸다. 성공의 목표는 “버스 한가득 창녀들을 태운 뒤에 (‘100’)” 돌아오는 것이라 말하고, 선망하는 래퍼를 찬양할 때도 “빈지노의 파트너 여대생부터 Super Model 맨날 바뀌어(‘빈지노’)”라며 성적 판타지에 취하곤 한다. 그가 가사 속에서 유일하게 비하하지 않은 여성은 어머니인데, 잠재적 성욕 해소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블랙넛의 처지는 정말 눈물겹지만, 그냥 웃어넘길 일은 아니다. 실제로 이 점은 면죄부나 마법의 카드처럼 작용한다. 마치 블랙넛을 누가 뭐래도 여성을 혐오할 수 있는 어떤 자격을 갖춘 사람으로 잘 꾸며놓았다. “솔직히 난 키디비 사진 보고 딸 쳐봤지 물론 보기 전이지 언프리티(‘Indigo Child’)”라고 대상을 적시한 성희롱 가사를 써도 “성적으로 억압받고 있는 불쌍한 사람이 자위한 이야기가 왜?”라는 괴상한 공감을 얻기도 한다. 소개받은 이성과의 만남을 포기하고 사창가로 걸음을 옮기는 내용인 “8만원” 역시 동정인 남자의 안쓰러운 신파극으로 기능하면서 곡 안에 녹아 있는 비틀린 여성관은 쉽게 희석된다. 아무도 억압하지 않았지만, 마치 억압받은 듯 자신은 그래도 되고 그럴 자격이 있다는 궤변이 모든 곡에 깔려 있다. 언뜻 20대 후반까지 섹스 한번 못 해본 남자라는 자기비하로 보이지만, 그 틈으로 삐져나오는 분노와 증오가 결국 자신의 성욕과 상관없는 불특정 여성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치졸한 방식이다. 블랙넛이 다른 사회적 약자를 다루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그는 “치매 걸린 노인 똥구녕처럼 Drop Your Shit Easy(‘Indigo Child’)”라고 치매 환자를 비하하고는 다음 곡에서 “약자 비하? 우리 할머니도 걸렸었어 치매(‘Part.2’)”라는 가사를 썼다. 여성 혐오를 펼치는 방식과 완전히 동일하다. 우선 약자 비하가 아니었다고 부정하고 그 이유로 자신의 가족도 치매 환자였다고 말하면서 그런 가사를 쓸 자격이 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얼마나 실소가 나오는 자기 변호인가? 정작 안타까운 점은 이곳이, 이런 수준 낮은 궤변이 어느 정도 통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차라리 블랙넛이 자신은 여성 혐오자에 약자 비하를 서슴지 않는 래퍼라고 가사에 드러나는 대로 말하면 반어법 조금 섞어서 한번 들어보라고 추천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어설픈 자기부정으로 대중에게 자신의 음악을 호소하는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 블랙넛은 언제나 자신이 가장 솔직한 래퍼라며, 이런 가사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가사조차 부정하는 블랙넛은 래퍼로서 가장 비겁한 방식으로 솔직하지 못하다. 이것이 내가 래퍼 블랙넛을 비판하는 이유다.
- 에디터
- 글 / 남성훈(웹진 '리드머' 부편집장)
- 출처
- Gettyimages / 이매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