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의 한국 시인들은 시인을 넘어 신화다. 시에 대한 문학적 평가는 건너뛰고 삶과 업적을 말하는 기이한 역사를 통해 완성됐다. 시인 이상과의 가상 인터뷰를 통해, 어둠 속에 파묻혀 있던 그 시대의 시를 조금 꺼내봤다.
요즘 시조나 판소리 대신 새롭게 등장한, 경성 ‘인텔리겐차’를 중심으로 신문화의 첨병으로 각광받는 ‘모던한 시’에 대한 의혹이 있습니다. 알고 보니 유명한 시인들의 시가 서양 시의 표절이라는 것입니다. 온당한 의혹입니다. 이 얘기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이 처한 특수한 상황을 알아야합니다. 조선이 일본의 일부로 편입되면서, 과거와 급격히 단절됐습니다. 한 나라의 사회와 문화의 여러 가지 특수하고 모순된 현상이 불가피했습니다. 우리는 문화적·공식적으로 이제 한글을 쓰지 못하는 것에 대한 울분이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나라가 제구실을 못해 남의 나라 치하로 들어갔기 때문에, ‘조선’이라는 전통 사회에 대한 애증을 갖고 있습니다. 신문학은 신문물의 일종인데, 이에 대한 동경에는 일본인들의 정치적 억압에 대한 저항심과 조선 전통에 대한 ‘모던보이’들의 자발적인 문화적 반발감이 공존합니다. 조선이라는 전통은, 우리같은 신지식분자들에게는 전적으로 미워할 수도 전적으로 사랑할 수도 없는 것이죠. 물론 지금 조선 대중에게 가장 인기 있는 작가인 이광수 선배같이 철저히 서양 신문물을 지지하고, 조선적인 것을 증오하는 사람도 부지기수고요.
조선의 국민 시인으로 칭송되는 김소월이나 한용운, 그리고 면전에서 죄송하지만 이상 시인의 시도 그 의혹 대상입니다. 조선의 ‘현대시’는 전통적 운율과 호흡법을 통해 노래로 불린 ‘시조’와 과격한 단절을 선언했습니다. 지금 세계 문명의 중심에 있는 파리와 영미권 시인들의 시를 번역하고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습니다. 평북 오산학교 출신인 안서(김억) 선생이 가장 선구적인 사례입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작업은 프랑스 상징주의 등 지금 ‘현대시’의 세계적 전형을 만들고 있는 서양 시를 번역한 것이지요. < 태서문예신보 >에서 그 일을 하다 조선 최초의 번역시집 < 오뇌의 무도 >를 묶어 출판했는데, 여기에는 보들레르, 베를렌, 예이츠, 구르몽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유명한 시집 < 기탄잘리 >, < 신월新月 >, < 원정園丁 >도 잇달아 번역 했지요. 이런 맥락에서, 그가 출판한 조선 최초의 현대창작시집 < 해파리의 노래 >도 창작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습니다. 서양 어디에서 많이 보아온 정서나 몸에 맞지 않는 부자연스러운 묘사와 언어 표현과 감정 과잉이 있는데, 이것은 그 시의 개인적 한계이기도 하지만, 문화의 형식 자체를 우리 땅의 역사에서 가져오지 못한 식민지 사회의 불가피하고 쓸쓸한 산물입니다. 자기 역사와 폭력적으로 단절되고, 문학 이전에 말과 정서의 표현 양식 전체를 통째로 서양에서 수입해왔으므로, 이건 개인적 ‘표절’이라기보다 문화의 ‘이식’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이해가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에서 모델이 된 것은 개인이고 사회고 할 것 없이 자기 경험이 아닌 서양의 ‘프레임’이었으니까요.
김소월의 어떤 시에는 예이츠 시의 ‘번역’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똑같은 표현이 있고, 한용운 선생의 < 님의 침묵 >은 경악할 만큼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 기탄잘리 >와 유사한데도요? ‘창작’이 지닌 고유한 의미에 비춰볼 때 그것이 완전한 면죄부가 될 수 있을지요? 독자는 새로운 언어의 등장에 열광하고 있지만, 실은 수준이 떨어지는 작품도 많고요. 교묘한 문화적 신화에 속고 있는 건 아닐는지요. 창작자 입장에서 면죄부를 받고자 이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사실’을 정확히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사실의 단편적 일면이 아니라 그 사실을 둘러싼 정황 전반, 해석의 맥락 전체를 함께 보는 일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 인간의 실존처럼 문화도, 또 조선의 시도 사려 깊게 이해하지 않으면 그 현상의 매우 복합적인 실존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 반대편 시각에서의 문제가 있긴 합니다. 조선 문단의 유명한 시인과 그들의 작품에 담긴 불편한 사실을 숨기려고 합니다. 창작자들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신화를 만들고 신화 파괴를 원치 않는 대중의 집단무의식과 신화에 기초해서 먹고사는 전문가 집단의 ‘모르쇠’ 공모도 한몫합니다. 공평하게 보자면, 작품성에도 개인의 수준 차가 있으며, 문화적 이식-표절에도 개인에 따라 다른 창조성이 발휘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안서 선생의 경우, 저는 누가 뭐라든 그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가 없었으면 조선의 ‘현대시’가 이렇게 생겨날 수 있었을까요. 불가능했을 겁니다. 문화의 변화와 확장 과정에는 불가피한 변곡점이 있습니다. 지금 서양에서 다윈 같은 양반이 원숭이가 진화해 인간이 됐다고 주장해서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 진화 과정이 제가 생각하기에는 어떤 완만한 축적의 그래프를 그린다기보다는 혁명적인 변곡점에 의해 ‘돌연변이’처럼 툭 몇 단계 도약하는 것 같습니다. 조선의 현대시에서는 그 계기가 바로 안서 선생의 서양 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그가 가장 많이 번역한 게 베를렌의 작품인데, 시는 물론 소설을 포함한 조선의 신문학을 베를렌 번역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습니다. 형태와 정서, 심지어는 거기에 달라붙고 그를 통해 표출되는 말과 사물의 세계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안서는 단순히 시를 번역한 게 아니라 특정한 문화 전체를 번역한 것입니다. 제가 죽고 난 후 20세기를 통틀어서도 그와 같은 과격한 문화적 전변의 사례는 조선 문학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하지만 안서의 번역가적 기여와 별개로, 번역 작업의 엄청난 그늘 아래 있었던 안서의 시가 어땠는 지는 달리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문학적 탐구의 재능과 개인 창작의 재능은 분명히 다릅니다. 안서가 가장 사랑한 제자 소월이 그 극단적인 실례입니다. 조선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들이 들으면 실망할 수 있겠지만, 소월의 시에는 기존 서양 시에 등장했던 문학적 표현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학 창작에는 이런 말이 있지요. “하수는 남의 것을 베끼고, 고수는 훔친다.” 소월은 그 사례가 될 만하다고 보입니다. 그가 “베끼지 않고 훔칠 수 있었던” 것은 제 몸과 땅에서 얻은 경험을 시 속에 녹여내려고 그 스승보다 훨씬 더 애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안서가 학자였다면, 소월은 제자지만 좀 더 예술가적인 몸과 혼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학자는 남의 생각을 탐구하려하지만 예술가는 상대적·본능적으로 자기 이야기를 합니다. 저와 문학적 스타일은 많이 다르지만, 만해 한용운 선생에게도 이 이야기는 적용됩니다. 타고르의 < 기탄잘리 >와 만해의 < 님의 침묵 >을 비교하면 요즘 말로 ‘싱크로율’이 너무 높지요. 누군가 ‘아이디어 표절’이라고 주장해도 반박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입니다. 요즘 조선 문단의 민족주의자나 인텔리겐차 일부, 그리고 많은 독자가 만해의 아름다운 시에 매료된 나머지 타고르의 시와 그의 시가 얼마나 유사한지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이지요. 중요한 것은 이 사실을 어떻게 볼 것이며, 어떤 차이가 그들을 다르게 하는지를 발견하고 해석하는 일입니다. 저는 이 해석의 문제에서 조선 문단의 비평가들이 상당히 나태했고, 해석적 무능을 노출해 왔으며, 한편으로는 사실 자체를 쉬쉬하면서 직무유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 님의 침묵 >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타고르의 < 기탄잘리 >와 너무나 유사하면서도 많이 다르며, 제 개인적 평가로는 < 기탄잘리 >보다 더 뛰어난 시집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본보다 뛰어난 ‘복사본’이 있단 말인가요. ‘싱크로율’ 이 대단히 높지만 만해의 시집을 복사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해의 문학적 성장 배경은 김억, 김소월과 많이 다릅니다. 요즘 시 쓰는 젊은 인텔리겐차들이 신식학교를 다니거나 일본 유학생인 것과 달리, 서당에서 전통 한학을 배웠고, 소싯적에 동학에 가담했다가 설악산의 오세암, 백담사 등에 들어가 불도를 수행한 승려지요. 여기에서 제가 경성에서 어울리는 다른 동료 문인과 그의 공통점, 차이점이 드러납니다. 공통점은 그 역시 과거의 전통 언어 유산과 문화에서 뭔가를 찾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한학을 공부하다 동학에 가담하고, 실패한 후 전통적 사유 체계인 성리학이 아니라 불도에 귀의하고, 다시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행로는 그 역시 전통에 기댈 수 없는 궁핍한 시대의 시인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는 경성과 일본 등에서 제도 교육을 받은 제 동료들과 달리, 제도 세계의 주변부인 동시에 그 몰락을 촉진하는 대안적 지식 체계에 속했습니다. 그래서 만해가 선택한 언어는 전적으로 한학의 사유 체계에 기반한 것일 수도, 일본-서양의 문화에 기대는 것일 수도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가 유희적인 창작자로서의 실존을 갖기 어려운, 저항하는 인간이었으며 사실상 사상가였다는 사실입니다. 만해는 십중팔구 안서가 번역한 타고르의 시를 읽었으며, 감각적이지만 형이상학으로 충만한 타고르의 언어에 깊이 경도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나 절박한 식민지 백성이었던 만해는 이를 좀 더 실천적이고 순도 높은 자기 실존과 역사의 언어로 벼리고 사유하려 했으며, 제가 보기에 그러한 시도는 놀랍게도 타고르의 언어보다 더 불편하고 첨예한 지점으로 나아갔습니다. 이 시집에는 타고르의 언어를 ‘벤치마킹’하되 훨씬 더 현실 밀착적이며, 비타협적이면서도 숭고한 역사 감각이 아름다운에 로티시즘과 종교적 감성속에서 교차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시대를 통틀어, 우리가 이 시집을 가졌다는 사실에 가장 감사합니다.
그 정도인가요? “북의 소월, 남의 영랑”이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소월은 얘기했고, 남의 영랑이라…. 단 한 편의 시로 신화가 되는 일은 우리처럼 새로운 시대를 사는 이들에게는 오히려 쉬운 일이죠. 후대의 작가들은 아무리 좋은 시를 많이 써도 문학사에 기억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영랑의 경우, 저는 그의 다른 시들이 그 외에 무엇이 있는지 잘 떠오르지 않는군요. 우리 시대에는 그런 시인이 적지 않습니다.
유보적이시군요. 시인의 사후 폭발적으로 팔리고 있는 윤동주는 어떻습니까? 한번 뜯어서 읽어본 적이 있는데, 상징을 많이 사용해서 그런지 상투적인 표현이 많더군요. 저는 그의 시가 ‘작품’이라기보다 일기, 요즘 식으로 ‘자전적 에세이’라고 느낍니다. 시적 화자가 텍스트의 화자와 너무 강력하게 밀착되어, ‘예술적 가상’을 추구하는 문학적 원리와는 언어 배치 방식이 달라요. 그러나 그의 언어에 담긴 어떤 순결한 진실이 가상 위에서 빚는 그 어떤 문학적 수사보다 감동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윤동주의 잘 알려진 시들보다 그의 ‘동시’에서 훨씬 더 강력한 문학적 순결성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고 있는 당신의 시는 어떻습니까. 당신의 시에 있는 ‘센세이셔널한 측면’들이 서양과 일본에 다 있던 거라고 비아냥대는 사람들이 있던대요. 마지막으로 자기 품평을, 객관적으로 해주실 수 있을까요? 제게는 이 논란을 후대까지 영원히 유지하고 싶은 변태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발표한 소설 < 날개 >에 썼듯이 “오해는 오해대로 절름발이”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어떤 종류의 작가에게는 오해 자체가 영광인 경우도 있죠. 서양학자 헤겔의 표현을 빌리자면 저는 ‘조선 문단의 영원한 아이러니’로, 영원한 오해로 남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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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글/함돈균(문학평론가)
- 포토그래퍼
- 정우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