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DITOR’S LETTER – 목마른 계절

2016.07.25이충걸

조난 상태가 아닌 한 목이 마르지 않아도 매 시간 물을 마신다. 내 머릿 속은 워낙 절실한 생활로서의 음주 벤다이어그램을 그리는데, 물도 그렇게 되었다. 몸 안에 가뭄으로 갈라진 전답이 있는지, 물 의존증 가족력이 있는지, 모태 구갈증인지, 아무튼 물배가 터지도록 마시는 것이다. 술은, 입에 대지도 않는 사람과 주정뱅이 사이의 공간을 점유하거나 중독과 금욕의 양극 중간에서 헤매지만, 술은 술이고 물은 물일 뿐이다.

술은 합법적으로 마실 수 있는 나이가 있지만, 물은 죽음처럼 나이를 안 가린다. 사람들은 또 와인만큼 물에 민감하지 않다. 정수된 물이나 약숫물을 대할 때처럼 개인의 기호를 따지지 않는다. 그래서 수돗물도 마신다. 부유 물질, 용존 산소량, 삼중수소, 수도 배관, 저수조, 물탱크, 중 금속, 병원성 원생동물을 걱정하면서. 소독에 쓰인 염소 맛을 잠깐 찜찜해 하면서. 제품별로 수질을 다 보증할 수 없는 생수나, 관리에 따라 미생물 감염도 우려되는 정수기보다 딱히 안전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여행을 갈 때면 특정 지역의 물은 기피하라는 조언을 듣는다. 모든 목적지가 자체의 특성을 갖는 것처럼, 자체로 특징적인 미생물은 현지인들의 내장에만 친숙할 뿐이다. 빈 잔을 든 채 수도꼭지로 변한 맨발로 조심 조심 걷다 보면 오직 낙타만이 물병 없이 비행기를 탈 거란 생각이 든다.

서양 대도시에서 에비앙 물병을 들고 다니는 게 패셔너블한 과시였던 적이 있다. 석유 왕자라도 된 양 헐렁헐렁 해러즈 백화점을 돌아다닌 경험은 제 나라로 돌아가는 동양인에겐 홀로 잘난 후일담이 되었다. 스타벅스에서 방대하게 폭발한 음료들이 이탈리아 말로 된 변덕스러운 커피 메뉴를 양산한 것처럼, 요즘, 희한한 이름이 새겨진 물이 작은 병으로 쏟겨 아예 홍수가 났다. 게롤슈타이너, 아쿠아파나, 몬테스, 네이키드, 라 우레따나, 산 펠레그리노, 피지워터, 폴란드 스프링, 휘슬러, 봉평 샘물, 타이난트, 볼빅, 페리에, 노르데나우, 아이스필드, 바두아, 삼다수…. 강 저편에 계시받은 물맛 선지자들이 도래하자 새로운 물 세례를 받으려는 지지자 무리도 오병이어처럼 늘었다. 이젠 천안, 이스탄불, 블라디보스톡, 어딜 가든 라벨 붙은 생수가 보인다. 수제 맥주를 들이키는 사람의 법석 이 와인을 홀짝거리는 사람의 호들갑을 슬쩍 밀어낸 것처럼, 생수 리스트가 와인 가짓수를 무찌르고 장편 소설 부피로 불어난 느낌? 이러다 희 귀한 생수를 찾아내려고 카탈로그를 숙독하고, 경매장에도 막 가다가, 어떤 물건이라도 손에 넣는 배급업자에게 마지막까지 전화기를 붙들고 애걸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날이 오면 아빠 고주망태들 때문에 학질을 떼던 가족들과, 소주 한 잔만 마셔도 음주로 집어넣어야 한다고 피 토하는 청정 지역 사람들은 나를 반상회 회장으로 추대하겠지? 하지만 물 한 병 값이 휴고보스 가방과 맞먹는다는 걸 알고 날 죽이려 들겠지?

원료가 화성에서 왔다고 해도 입자 또는 분자 자체로서의 물은 불변의 법칙으로서 H2O의 화학기호를 따른다. 모두에게 표준적이라는 점에서는 콜라를 닮았다. 콜라는 왕자와 거지에게 동일하기 때문에 충칭 제일의 부동산 부자라 해도 더 좋은 콜라를 마실 수 없다. 그런데 참선하는 이의 탁자에 올려진 듯 별 욕구를 주지 않던 물병에 로고가 박힘으로써 모두의 물이 세속적 동기 부여의 새 배경이 되고 만 것이다. 라벨이, 검증된 회사의 술책이 아니라 고소득층의 대안이자 엘리트 취향이며 스타일 부적이 된 건 너무 오래전 이야기. 이상한 건, 늘 그랬지만, 소비 지상주의의 비판적 선민들이 찾는 건 제품 자체가 아니라 배타성이다. 나는 저렴한 물통의 유혹에 지지 않아. 나는 멋의 바늘 끝을 걷는 그룹에 속하거든. 라벨 붙은 생수를 들고 다니는 사람 얼굴은 병 하나로 꾸민 인스타그램 피드. 사랑스럽게 찰랑거리는 물을 마시는 중에라도 그 이국적인 이름 위에 해시태그를 붙여 인스타그램에 올릴 수 없다면 물 한 잔 마시는 의미가 없다. 생수 한 병으로 살 수 있는 더 나은 가치를 쭉 열거해 본들 하나가 다른 것보다 어쩔 수 없이 더 나쁜 가치라고 말할 수 없다. 이 모든 게 물의 성분과 무관한 유행인지 자본의 문제인지와 상관없이 레스토랑에서 당연히 딸려나오는 한 생수는 현상이 아닌 일상인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급성장하는 음료로서 물병의 메시지는 이렇다. 로고 붙은 용기容器가 계속 공급되는 한 물은 미래에도 통할 비즈니스 원천이라는 것. 급기야 리츠 칼튼 같은 호텔, 니만 마커스 같은 백화점, 메이 필드 같은 부티크, 프린스턴 같은 대학교까지 생수 브랜드를 만들어 변하는 시장 트렌드에 가담했다. 가장 잘 디자인된 물은 디자이너로부터 왔다. 알프스의 물이 담긴 예쁜 병엔 DKNY 라벨이 붙었다. 생수가 지하 자원으로부터 나온 뒤 역삼투 같은 다양한 관문을 통과할 때, 라벨은 병 속의 물이 안전하다는 약속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물의 출처나 명시된 성분에 썩 괘념하지 않는 건 그 때문이다. 확실히 식품으로서의 생수는 상대적으로 덜 위험해 보인다. 메르스나 지카 바이러스에 비하면 거의 무시될 정도다. 결국 물도 맛과 향이라는 심미적 쾌락이 결정적 가치가 된 셈이다. 수선화처럼 화사한 맛, 기름처럼 끈적이는 맛, 엄마 젖처럼 밍밍한 맛, 이별처럼 쓴 맛, 녹슨 면도날처럼 혀 옆구리가 아린 맛, 후회처럼 떫은 맛, 표범 고기보다 짠 맛을 순례하다가 문득 증류수처럼 중간이 텅 빈 맛을 대하면, 생수에 쓰인 오존이란 원래 이렇게 무미무향일까, 순수하게 궁금해할 뿐이다. 생수의 품질을 둘러싼 논쟁점(미크론 여과와 오존화는 물이 탱크에 채워지기 전에 이루어지는지, 물은 정교한 미생물학으로 다루어지는지, 크립토스포리디움은 제거됐는지, 공급자, 유통업체, 생산업자 가운데 누구 입김이 제일 센지, 제조 장소는 어디인지, 유통 기한은 언제까지인지, 혹시 정부가 물을 민영화하려는 건 아닌지…)보다 중요한 건 종국에 어떤 라벨이 달렸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사실 이런 논의는 늘 코앞까지 왔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불안을 도외시한다. 물이 고갈된다는 통계는 보수 운동권의 음모론이나 삼류 과학자의 얼렁뚱땅 이론이 아니다. 상상 속의 위험은 말 그대로 구체적인 생과 사의 지점에서 당신의 종말로 뛰어들 거라서. 인류가 이 행성을 분간 없이 요리하고 헬륨이 타오르는 태양에 용광로 역할을 한 뒤, 치유의 쿠르드 샘물은커녕 혀끝에 떨어뜨려줄 물 한 방울 남아 있지 않을 때, 서로가 비로소 떠올릴 것이다. 인체의 70퍼센트가 수분이며, 사람은 물을 마시지 않으면 열흘도 못 산다는 연약한 진실을.

    에디터
    이충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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