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DITOR’S LETTER – 한가한 소리

2016.11.28이충걸

소수의 예외를 빼고 연말의 레스토랑은 너무 따분해서 때로 실존주의 소설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시작은 조명. 너무 센 나치 스타일의 조도부터 이미 괴로울 때, 머리 위 둥근 조명은 달처럼 이지러진다. 들여다 보는 게 무의미하도록 표준적인 메뉴, 격렬히 덮인 크림소스, 고무 같은 냉동 칩, 가죽 같은 로스트 포테이토, 치즈 가루가 비듬마냥 살포된 시저 샐러드, 안초비와 케이퍼를 하도 조금 뿌려서 찾자면 돋보기가 있어야 하는 피자에 절망해 그 무정한 사장한테 영국 최악의 피시앤칩스조차 여기 한우 스테이크보다 맛있겠다고 울부짖으면, 그럼 당장 영국으로 꺼지라고 하겠지? 그런데 영국으로 꺼지면 여기보단 나은 걸 먹게 되겠지? 이곳은 돈 갖고도 천대받는 맛집 권세의 나라. 맹숭맹숭한 영국까지 휩쓴 음식 혁명이 기어이 비켜 간 도시. 도저히 수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차피 식문화는 소생 불가능하고 경제 구조가 뿌리까지 뭉개진 판이라면 내가 나서면 왜 안 되는 건데?

그치만 레스토랑 사업 채산성은 낮은 편이라는데 이윤은 어떻게 남기지? 정신 제대로 박힌 사람들의 지불 저지선을 훌쩍 넘기면 될까? 아예 예약제로만 운영한다면? 하지만 최고급 요리의 성전聖殿이란 정말 무리수다. 일단 푸아그라의 덫에 걸려들면 그보다 나은 덫은 만들기 어렵지. 매달 계절 나초 메뉴, 당나귀 소스 여행 같은 새 아이템을 소개하면 너무 정신없으려나? 아님 일관되게 간명하고 생생한 프렌치-아메리칸 식당? 우주선도 부식시킬 극강의 홍어집? 막판에 쫓겨서 피자 체인점을 차린다 해도 나를 ‘피자집 아저씨’ 말고 ‘피자 전문 셰프’라 부르라고 해야지. 피자 자르는 스태프는 ‘슬라이서’가 아니라 ‘슬라이세요리뇨’로, 바닥 청소하는 사람은 ‘종업원’이 아니라 ‘일 마에스트로 델라 스코파 에 델라 스위퍼’라고 부르게 하곤 그걸 어기면 집중 피자 교실에 한 3년 보내버려야지. 혹시 모험심 강한 주방장조차 식용으론 찝찝해하는 내장 요리 전문점이 나의 종착역일까? 인기 메뉴는 들소 담즙, 달팽이 횡격막, 자벌레를 버무린 엔젤 케이크! 종국엔 하다 하다 테이블 하나짜리 마이크로 식당으로 축소되겠지? 작은 것은 아름다우나 큰 건 더 아름답건만!

근데 레스토랑 매출의 주요소는 테이블 회전율일 텐데 초코 머핀 한 조각 시켜놓고 동틀 때까지 앉은 딱풀족이며, 생트집 잡아 드잡이하듯 공짜 접시를 낚아채는 얌체들은 어떻게 퇴치하지? 평수도 작은 마당에 테이블 몇 개 더 끼워 넣어야 돈이 남을까 고심하는 건 욕심이 아니라 순수한 경계 확장 맞지? 테이블 8개인 레스토랑에서 하루저녁 두 번 교대 하게 되면 식탁보는 16개, 냅킨은 64개가 필요할 텐데 그걸 언제 빨고 다리나? 손님이 물건을 부술 땐 마냥 웃으며 넘겨야 하나? 그가 시킨 흰 살 생선 샐러드는 1만2천원, 깨진 리델 비늄 카베르네 와인 잔은 7만원.

고객의 기분, 서비스의 상태, 각각의 테이블에 필요한 걸 살피는 한편, 자리가 매끄럽게 차고 비는지, 포크가 바닥에 떨어졌는지 누구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는지, 누가 대화를 원하는지 아예 입을 닫는지, 누가 조언을 구하는지 만사가 귀찮은지를 주시하는 빗나간 상태에선 더 급한 일들이 속출한다. 이달 올려줘야 할 직원 임금, 고객의 부가티를 또 긁은 주차 관리인, 단골이 훔쳐가는 재떨이와 카드 수수료, 맛도 모르면서 말은 많은 블로거와 직원이 받는 멸시, 주인의 신념을 몰래 흉보는 매니저와 내일 딴 데로 옮길 거라고 오늘 통보하는 주방 보조…. 사장의 심정은 나로선 알 길이 없다…. 게다가 레스토랑 경험은 금방 사라지지 않으니 와인 가격 매기는 것도 조심조심. 오늘 마신 와인을 며칠 뒤 뒷집에서 더 싸게 받는다는 걸 아는 순간 추억은 바가지로 끝난다. 최후로, 주방 가스관을 타고 쪼르르 도망가는 생쥐가 구청 환경과 직원의 위생검사에 딱 걸리면, 잘 모르겠지만 스페인 카탈루냐에선 들쥐도 요리한다고 우길까,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야박하게 그러지 말라며 할복이라도 할까.

모두가 맛 감정가이자 레스토랑 컨설턴트인 채 먹고 죽자는 사람들 천지인 11월, 미슐랭 가이드가 처음 공개되자 업계와 비평가와 미식가들은 토론과 분석으로 분분했다. “모든 행복한 가족들은 서로 닮은 데가 있지만 모든 불행한 가족들은 그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불행하다”는 톨스토이를 떠올리게 하는 반응들. 롤러코스터를 탄 듯 흥분되면서도 여자 친구가 수능 직전 갑자기 헤어지자면서 이유도 말 안 해줄 때처럼 어리둥절하달까. 러브 레터 같이 동기를 주는 동시에 비굴하게 만드는 이 가이드는 서울의 레스토랑 연대기를 이렇게 새로 쓴 걸까? 투명 망토를 두른 채 세계를 누비는 닌자 패널들은 왜 그렇게, 거의 고의적으로 보일 만큼 면麵을 좋아한 걸까? 민족주의야말로 우선시되는 가치였을까? 흰 식탁보를 갖춘 레스토랑의 맹목적 우수함과 아방가르드한 요리나 극적인 멀티 요리는 무관한 걸까? 그 심장이 프랑스에 있어서?

모든 평가가 지닌 성가신 약점은 주관성과, 만사에 순위를 매기려는 인간의 본능일 것이다. 그리고 거론되는 순간, 좋은 레스토랑을 혼자 갖고 싶은 집착적인 사람들이 떼지어 몰리고, 복음은 전파되고, 예약 명단은 향후 480년 동안 가득 찬다. 영원한 뫼비우스의 띠. 하지만 별 받은 레스토랑의 메뉴와 아티스트급 셰프의 동태를 교리인 듯 염탐하는 미슐랭 오타쿠라 한들 평생 몇 번을 들를 것인가. 자체의 메뉴는 재능과 노력의 봉헌물. 입 대기 전, 불타는 묘기가 투하됐단 걸 안다 해도 갑자기 더 맛있어질 리 없다. 패널들은 맛집 순례 루트엔 답하지 않는다. 그건 요리 엘리트들의 관심사를 순간 포착한 사진 같은 것. 모든 레스토랑은 하나의 작은 국가이며, 모든 테이블은 각각의 세계라는 걸 잊으면 안 된다. 한 세대의 기쁨은 다음 세대의 호기심. 우리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이가 늙어서까지 그날 오후의 맛을 기억한다면 고맙긴 하겠다. 마음에 육박하는 슬픈 노래가 사무실로 돌아가는 동안 혀뿌리에 튀김옷처럼 입혀진다면. 하지만 마데이라 소스를 끼얹은 어제의 트러플은 약간 토사물 맛이 났다. 조리법이 변해서가 아니라 어차피 미각은 바뀌기 때문에. 즉, 나는 좋은 손님은 모르겠지만 좋은 식당 주인이 될 자신은 없다. 누구의 노래도 들을 수 없고 어떤 책도 읽을 수 없게 된 요즘, 돼지 정강이 살을 철학적으로 사색하는 게 무슨 의미라고? 미식의 무한한 가능성?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이 다 불만이고 꿈도 헤쳐진 지금에 와선 퍽이나 한가한 소리.

    에디터
    이충걸
    포토그래퍼
    정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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