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드라마 <유나의 거리> 속 서유정을 지금 다시 떠올리게 된 이유.
<유나의 거리> 12회 한 장면.
2016년 2월호 < GQ >에는 ‘여우女優의 순간’이라는 특집 기사가 있었다. 전문은 이렇다. “그 여자가 웃을 때, 그 여자가 갑자기 빨리 걸을 때, 그 여자가 멍하니 있을 때, 그 여자가 말을 걸 때, 그 여자에게 대답하고 싶을 때…. 지난날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 그 여자를 문득 마주쳤던 장면, 그리고 영원히 방부해버린 표정과 모습을 모았다. 여자 혹은 여배우를 기억하는 방식으로서 우리는 추억이 아니라 순간을 택했다.” 그러고는 묘지에서 기괴한 표정으로 루즈를 꺼내 바르는 <마더>의 김혜자부터,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울고 웃었던 故김자옥까지 여러 배우의 다양한 장면을 기념했다. 그런데 에디터로서 이 기사를 다시 떠올리며 한 가지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꼭 들어갔어야 하는 한 사람을 빼놓았군 하는 아쉬움 때문에. 그 이름은 서유정. 늦었지만 늦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유나의 거리>에서 ‘미선’을 연기했던 그녀를 향한 짧은 글을 여기에 쓴다.
2014년 JTBC에서 방영한 <유나의 거리>는 좋은 드라마다. ‘한국 드라마의 역사’ 같은 덩치 큰 맥락을 붙여서라도 표나게 기념하고 싶은 작품이다. <서울뚝배기><서울의 달><파랑새는 있다> 등을 통해 도시의 골목을 살아가는 인간군상에 대한 따뜻한 관찰과 애정을 아낌없는 이야기로 풀어낸 김운경 작가는 <유나의 거리>를 통해 가히 아름다운 드라마를 완성했다. 어떻게 이렇게 모든 인물을 사랑할 수 있을까, 이런 연민과 공감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 좋은 대사란 무엇이며, 좋은 작가란 무엇인가, 드라마를 보며 울고 웃는 내내 생각을 계속 이끌어낸다.
<유나의 거리> 20회 한 장면.
주인공 유나(김옥빈)를 비롯한 모든 배우의 연기가 만개하니, 그걸 보고 있으면 ‘연기력’ 같은 말은 오히려 시시해서 들이대기가 민망할 지경이다. 가령, 미선(서유정)이 방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우는 장면을 본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느낀 날, 유나와 집 앞 주차장에서 치고 받고 돌아온 그녀는 눈물이 터진다. 느닷없으니 그 눈물을 설득하려거든 진심밖에 뭐가 있을까. 미선이 울면서 말한다. “미워요. 세상 사람들이 다. 그냥요. 아무 이유 없어요. 그냥 미워 죽겠어요.” 눈물이란 이런 것이려니, 누군가 운다는 건 타인에게 이런 것이려니, 그 장면을 보며 우리는 덩달아 운다.
미선은 말하자면 ‘꽃뱀’이다. 유나의 표현을 빌리면 “유부남 꼬셔서 등쳐먹는 걸로는 최고 중의 최고”다. 김운경 작가는 ‘미선’에게 캐릭터를 만들어주기보다 스스로 ‘미선’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는 서사를 끌어낸다. 마냥 자신을 살아가는 여자, 울어야 할 때라면 끝까지 울어버리는 여자. 언젠가 <그대 그리고 나>(1997, MBC)라는 드라마를 떠올리건대, 당시 신인이었던 서유정이 목놓아 울던 장면은 누군가에게는 아로새겨질만큼 벅차고 아름다운 연기였다.
<유나의 거리> 40회 한 장면.
<유나의 거리>에는 얼굴에 멍이 든 인물이 자주 나온다. 거의 돌아가며 번갈아 멍이 든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는 뜨거운 인물들에게 주먹은 그렇게도 가까운 걸까. 하지만 멍든 얼굴로 흘리는 눈물에는 속수무책 무방비다. 그리고 미선은 시종일관 서늘하고 우아하다. 그렇게 그녀가 흘리는 눈물은 끝내 자신을 지킨다. 옆방 사는 창만(이희준)의 전화기에 미선은 이렇게 저장되어 있다. ‘미선언니’. 나라도 그렇게 저장했을 것이다.
- 에디터
- 장우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