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에 태어난 나는 올해 스무 살이 되었고 처음 대선 투표를 했다.
늘 가늠하기 어려웠다. 아빠의 기분이 좋은지, 좋지 않은지, 혹은 아주 나쁜지. 먼저 알아차릴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 사실은 과자가 든 검은 비닐봉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나, 효자손을 장판에 두드리며 호통치는 소리로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어느 날은 “이쁜 공주님”이라고 부르며 볼에 뽀뽀를 해대다가 어느 날은 “네까짓 게 뭐가 잘났냐”며 뺨을 연거푸 쳤다. 내가 특별히 잘못을 하지 않아도, 혹은 잘못을 해도 맞거나 맞지 않는 건 순전히 운이었다. “오늘 공부 얼마나 했어?”, “일기 썼어?”, “학원 이번 주에 몇번 갔어?”, “한자 어디까지 외웠어?”라는 끝없는 불심검문에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아빠는 내가 태어날 무렵 명예퇴직을 당했다. 1998년, 경제 위기에 따른 구조조정 때문이었다. 그때 아빠는 32세, 엄마는 27세였다. 엄마와 아빠는 전라남도 시골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광주광역시의 사립대학을 다녔다. 당시 대학 진학률이 지금처럼 높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가족의 기대와 지원을 많이 받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아빠는 성남의 번듯한 회사에 취업했다. 얼마 안 가 직장을 잃고, 가족들이 있는 전라남도로 돌아왔다. 그토록 바라던 금의환향이 아닌, 튼실한 갓난이만 달고 돌아온 초라한 귀향이었다.
나는 속 모르고 먹기만 잔뜩 먹었다고 한다. 자다가 입이 심심해서 엄마 젖꼭지를 깨물었고, 엄마는 새벽 어스름 속에서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를 밀치고 등을 돌렸다. “아야!” 삼촌은 내가 밥상 앞에 앉으면 공기에 밥을 고봉으로 얹는 시늉을 하며 내가 얼마나 많이 먹고 많이 쌌는지에 대해 떠벌렸다. 나는 얼굴이 벌개져서 삼촌을 노려봤다. 나를 보면 할머니는 아빠를 가리켜 “대학까지 나와서 노가다나 한다”고 깎아 내리다가, “너 먹여 살리려고 이 더운 날 땀 뻘뻘 흘리면서 일한다”고 했다. “니는 아냐?” 제발 좀 공부하고 출세해서 일을 그만하게 하라고 말했다, 혹은 그렇게 들었다. 그 말을 밥처럼 꼭꼭 씹어 먹었다.
초등학생이 되어 어버이날 카네이션 카드 뒷면에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 꼭 호강시켜 드릴게요”라고 꾹꾹 눌러 썼다. 엄마는 그걸 속 옷 넣는 서랍장에 넣어두었는데, 나는 과자를 사먹기 위해 그 서랍장을 뒤져 동전을 꺼내면서 늘 그 카드를 다시 봤다. 내가 훌륭한 어른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학교에서 책에서 TV에서 하여간 온갖 장소와 매체에서 한없이 쏟아졌다. 어른들의 말을 잘 따르되 경직되지는 말 것. 창의적이되 허무맹랑하지는 말 것. 당돌하되 예의 바를 것. 똑똑하되 잘난 체하지는 말 것. 어린이다운 희망과 열정을 가지되 어른 못지않게 바쁜 하루를 보낼 것.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미리 알되 돈에 욕심을 가지지는 말 것. 알면서도 모른 체할 것. 또 우리는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책에 쓰여있고, 어른들이 책을 읽으라 했고, 책에는 어른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쓰여있으니까. 모든 게 맞아떨어졌다.
때로는 생각했다. 이 세상은 아이들을 속이기 위한 어른들끼리의 음모가 아닐까. 주문들은 모순적이거나, 허황되거나, 우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시라도 어른들에게 사랑받지 못하면 생존이 불가능하므로 그런 위험한 생각에 깊이 빠질 겨를이 없었다. 꿈이 뭐니, 장래 희망이 뭐니, 하는 질문에 우리는 가열차게 대답했다. 회사 사장이요, 선생님이요, (유명한) 화가요, (베스트셀러) 작가요, 아무튼 돈 잘 벌고 존경받는 사람이 되리라는 포부를 대었다. 그 확신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는 시키는 어른도 우리 중 누구도 몰랐다.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되지 못하면 죽어버리겠다는 맹세를 했다.
그것은 경쟁 지옥으로 돌진하는 결사특공대의 선언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던 2007년 어느 날, 사회 선생님이 교실에서 영상을 틀어주었다. <2007, 대한민국에서 ‘초딩’으로 산다는 것>. 교실에 앉은 우리는 “학원을 조금만 다니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태권도 도복띠로 목을 맨 또래의 이야기에 눈물지었다. 한편으로는 굳이 하고 싶지는 않은 학원 교습이나 과외 혹은 학습지를 몇 개 하는 데 그친, 그렇게 가혹한 환경에 놓이지 않은 것에 안도했다. 한편 부모의 고된 노동은 내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들을 호강시키는 번듯한 어른이 되는 것은 어느새 내 행동을 판단하는 기준이자 삶의 목표가 되었다. 그것이 키워준 값을 치르는 당연한 도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도리를 다하는 길은 세상에 대해 또 나에 대해 알아갈수록 요원해졌다. 결국 이 세상에서 나는 번듯한 어른이 되기는 글러 먹었다는 결론이 자꾸만 나왔다. 내 유년기와 청소년기 전반은 ‘내가 글러먹었다’, ‘내가 태어나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는 작은 목소리가 지배했다.
나의 수치심은 늘 마음속에 웅크려 있었다. 나에게 학교는 수치심을 깊이 안은 아이들이 네모난 방 안에 꽉꽉 채워 넣어져 부대끼는 공간이었다. 중학교 1학년 막바지이던 2011년 겨울 무렵, 대구의 중학생이 학교 폭력으로 인해 자살한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학교 폭력(학생 간 폭력)이 이슈로 떠올랐다. 어떤 사람들은 ‘어린 중학생들’이 물고문을 위시한 심한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혹자는 게임에 중독된 미성숙한 중학생들이 게임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해 폭력을 저질렀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나는 오랜 기간 학생 간 폭력의 피해자였고, 때로 방관자였고, 가해자였다. 우리는 시시하지만 치명적인 역할 바꿈을 하는 데 힘을 쏟고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자신의 약점을 숨기기 위해 누군가의 약점을 까발리고, 내가 잘 적응하기 위해 누군가의 적응을 가로막았다. 그를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고, 구분 짓기를 원했다. 욕망은 체육대회 때 그로 하여금 반과 동떨어져 앉게 하고, 급식을 혼자 먹게 하고, 반 아이들 누구나 그를 싫어한다는 믿음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실현되었다. 누구나 공공연히 싫어할 수 있는 대상이 되는 것, 그것은 좁은 교실 안에서일지언정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어떤 사람은 “어떻게 어린 학생들이!”라며 공포스러워했지만, 그 역시 ‘순수한 아이’ 판타지에 지나지 않는다. 피해자이면서, 방관자이고, 가해자라는 이름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굳이 나의 세대를 말하는 글에서 쓰는 이유는, 2015년 메갈리아 이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혐오를 이름 짓고 말하기 시작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몰락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전 세대에서 혐오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메갈리아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혐오를 남성에게 그대로 비추어 돌려줌으로써 가시화하고 나아가 여성 혐오라는 이름을 붙였다. ‘김치녀’, ‘개념녀’, ‘삼일한’ 등 현재하는 일상의 혐오를 호명하는 여성의 언어로 가져왔다. 혁명이었다. ‘여성혐오’라는 개념이 널리 익숙해짐에 따라 다른 소수자 운동에서도 단지 싫어한다는 의미가 아닌 입체적으로 존재하는 ‘혐오’ 라는 개념에 대해 설명하기 수월해졌다. 그러면서 장애 혐오, 청소년 혐오, 이주민 혐오, 노인 혐오 등 다양한 혐오의 개념이 등장하고 운동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청소년 운동에서는 ‘나이주의’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나이에 따른 위계질서와 생애주기 별로 보편적인 삶을 설정 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청소년인권을 단지 청소년의 문제가 아닌 전 세대의 문제로 확장하려 시도하는 것이다.
1998년에 태어난 나는 올해 스무 살을 맞았다. 생일이 3월이라 5월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를 할 수 있었다. 술과 담배도 기분 내키면 살 수 있고, 더 이상 사사건건 친권자 동의 서류를 구비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고 일상에서 충분히 존중받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어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씁쓸한 마음은 가시지 않는다. 모순된 요구 아래 ‘내가 글러먹었다’는 수치심만 머금었던 날들. 가정과 학교 외에 다른 공간과 관계를 갖지 못한 탓에 폭력에 홀로 맞서야 했던 날들. 성숙하고 잘나지는 못했지만, 어른이 말하는 답에 의문을 품으면서 자긍심을 느꼈던 ‘나’들. 그런 시간들을, 그때의 ‘나’들을 잊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내 생각에 청소년의 ‘주적’은 아이 시절의 자신을 편집해서 얼간이라고 폄하하거나 영웅이라고 치켜세우는, 올챙이 적 잃어버린 개구리 어른이다. 꼭 그런 어른이 청소년을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 너희 나이 때는~” 혹은 “나 때는 말이야~”라며 왜곡된 청소년관을 휘둘러 괴롭히더란 말이다. 설핏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래야 청소년기에 겪은, 현재하는 청소년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용인할 수 있을 테니까. 청소년과 어른의 기로에 서 있는 나의 세대에 묻고 싶다. 우리는 개구리가 돼도 올챙이 적을 잊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부디 그랬으면 좋겠노라고 빌어본다.
세대론은 다만 함정일까? 그것에 대해 말하느니 결국 스스로 덫을 놓는 격일까? 의심하며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고 답한다. 나와 내 세대는 무엇인가? 서로 다른 해에 태어난 12인의 칼럼과 서울에 사는 젊은 사진가 7명이 ‘세대’라는 테마로 자유로이 작업한 사진을 나란히 싣는다.
- 에디터
- 글 / 밀루(1998년생,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
- 포토그래퍼
- 이강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