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유난 떠는 30대

2017.06.12GQ

30대가 유난히 유난한 세대가 되기를 바란다.

양승철 , 2010

양승철 <태종대 남매>, 2010

미세 먼지 때문에 못 살겠다. 사람들이 한국이 싫다고, 여길 떠야겠다고 노래를 불러도 나는 꿋꿋했다. 나갈 방법도 없었고 나간다고 해서 딱히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글로 먹고사는 사람이 외국에서 뭘 할 수 있겠나. 약해 빠진 동양 남자를 육체 노동자로 채용 해줄 일도 없다.

그렇지만 올해 봄을 계기로 생각이 바뀌었다. 굶어 죽으나 미세 먼지 먹고 죽으나 마찬가지 아닌가. 외국인 노동자로 근근이 살아도 맑은 공기와 파란 하늘이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 한국에서도 근근이 사는 건 똑같은데 더러운 공기까지 마셔야 하다니. 나는 ‘미세미세’라는 귀여운 이름의 앱을 쓰는데 미세미세가 최근 일주일간 내게 보낸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최악! 절대 나가지 마시오!! 매우 나쁨! 외출을 삼가세요!!

“나는 날씨에 아주 민감합니다.” 롤랑 바르트는 말했다. 그는 날씨를 말하는 건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했다. 오늘날과 같은 날씨는 사랑을 포기하게 만든다. 내게 날씨는 생명이다. 테라스에서 시간을 보내고 공원을 산책하는 게 삶의 유일한 낙이다. 소일거리가 아닌 생명 연장 수단이다. 그러니까 나는 미세 먼지 때문에 1) 사랑을 잃었고 2) 생명도 잃을 것 같다.

일주일 전 경상도에 사는 고등학교 동창이 서울에 왔다. 학회 때문에 1년에 한 번씩 서울을 방문하는 친구로 올 때마다 가볍게 만나 커피를 마시거나 술을 마신다. 친구는 늘 그렇듯 피곤에 절어 있었고 직장 생활과 박사 학위, 결혼 생활이라는 버뮤다 삼각지대에 갇혀 사라지는 자신의 삶을 한탄했지만 나는 그의 삶에 관심이 없었다. 그 역시 글을 쓴다고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하는 비쩍 마른 몰골의 미혼남에게 관심이 없겠지만 우리는 그래도 형식적으로 반가워하며 서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오랜 친구 사이의 대화란 원래 그런 법이다. 문제는 미세 먼지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가 번졌을 때 일어났다. 친구는 서울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고 다니냐고 물었다. 당연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방에서는 아직 못 쓴다. 왜? 유난 떠는 것 같잖아.

친구는 마스크 쓰는 걸 유난스럽다고 보는 시선이 있다고 했다. 유난이라니. 지금 사람이 죽게 생겼는데!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고 그런 전근대적인 사고를 하다니, 그러니까 홍준표가 도지사를 했지! 같은 인신공격을 하고 말았다. 친구는 왜 갑자기 성질이냐며 당황했고 우리는 어색한 표정으로 헤어졌다. 1년에 한 번 보는 친구인데 좀 잘해줄 걸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가 말한 유난이라는 단어가 잊히지 않았다. 남자가 뭐 그거 갖고 유난이고, 여자들은 유난스러워서 싫다, 같은 경상도 방언이 섞인 익숙한 말들이 연이어 떠올랐다.

작년 연말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남자 넷이서 술을 마시는 자리였다. 오래된 친구와 친구의 친구가 섞인 가벼운 술자리였는데 회사 내에서 성적인 농담을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친구들의 부적절한 언행에 대해 한마디 했고 그들은 유난스럽게 굴지 말라는 식으로 대응했다. 그러니까 자신들의 농담은 전혀 심각하지 않으며 여성 직원들도 즐거워하거나 용인한다는 이야기였다. 사실 유무와 상관없이 유난이라는 말이 신경을 건드렸고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친구들은 네가 회사도 안 다니고 책만 읽어서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것 같다고 말하며 대화를 중단했다. 이것들은 트위터도 안 하나! 내가 말하자 그들이 대답했다. 응, 트위터 안 하는데. 요즘도 그거 하는 사람 있어?

유난 떤다는 건 뭘까. 세대 문제일까? 사회 문제와 연결되는지도 모르겠다. 유난 떤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으며 살아왔다. 옷차림이나 정치 성향, 선호하는 카페, 좋아하는 영화, 생활 습관, 새로운 사조나 문화 등을 얘기하면 유난 떨고 있네, 꼴값 떠네 등의 말이 돌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1년 동안 여러 일을 겪으며 든 생각은 지금까지 떨었던 유난은 유난도 아니었다는 거다. 우리는 오랫동안 유난 떨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살아왔다. 또는 유난 떨지 않아도 문제가 없어 보이는 세상에서 살아왔다. 아무렇지 않게 성적 대상화를 하고 외모 비하를 하고 외국인 혐오 발언을 했으며(농담인데 뭐 어때!) 건강과 환경을 챙기는 이들에게 유난 떤다는 딱지를 붙였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그런 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여자는~, 남자는~ 같은 말을 습관적으로 입에 담았고 TV에서 외모나 피부색을 희화화 하는 건 일상이었다. 동물을 보호하기 위해 채식주의를 한다고 말하면 유난 떤다고 하고(회식 분위기 흐리지 마!) 환경 보호를 위해 샴푸를 쓰지 않겠다고 하면 당신 혼자 유난 떨어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식의 핀잔을 들어야 했다.

그런데 이대로 계속 가도 되는 걸까. 환경은 어느새 엉망이 되었고 하늘이 미세 먼지로 덮여 노래졌는데도 마스크를 쓰면 유난 떤다고 한다. 화장실에 여성을 노리는 범죄자가 있거나 몰카가 있을까 봐 경계하면 유난 떤다고 하고(사람이 죽고 추모 행렬이 줄을 이어도 모든 남자가 그런 건 아니야! 유난 떨지 마!, 라는 말이 돌아온다)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말은 잘못 됐다고 지적하면 생각도 말 못 하는 거냐고, 유난스럽게 왜 그러냐고 반문한다. 뭐가 유난스럽다는 것일까.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 무신경했고 한국은 헬조선이 되었다. 사람들의 의식은 점점 섬세해지고 삶의 형식들은 다양하고 복잡해지는데 한국 사회는 아직도 점잖은 반응을 요구한다. 문제는 이 점잖음으로 포장된 반응이 전통적이고 가부장적인 태도와 연결되며 진보적이라고 생각되는 의제 앞에서만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가 넘은 지 10년이 넘었다. 소득 증가와 더불어 수많은 의제가 속출하는데도 2000년 이후 한국 사회가 제대로 해낸 건 아무것도 없다. 여성 인권은 바닥이고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도 바닥이며 환경, 복지, 사회 문화 인프라 등 뭐 하나 나아진 게 없다. 이제 좀 유난스러워져야 할 때 아닌가. 유난의 사전적 의미는 “언행이나 상태가 보통과 아주 다름”이다. 지금 한국의 상태는 보통과 아주 다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점잖은 인내가 아니다. 유난스럽고 섬세한 대응이다. 우리는 좀 더 유난을 떨어야 한다.

세대론은 다만 함정일까? 그것에 대해 말하느니 결국 스스로 덫을 놓는 격일까? 의심하며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고 답한다. 나와 내 세대는 무엇인가? 서로 다른 해에 태어난 12인의 칼럼과 서울에 사는 젊은 사진가 7명이 ‘세대’라는 테마로 자유로이 작업한 사진을 나란히 싣는다.

    에디터
    글 / 정지돈(1983년생, 소설가)
    포토그래퍼
    양승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