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이 꺼져도 머릿속에 남아 있는 영화 속 풍경을 찾아 지구본을 돌렸다. 카메라도 배우도 채우지 못한 빈자리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로건 2017 미국 뉴멕시코주 애비퀴우 영원히 죽지 않을 것 같았다. 리무진 운전사로 숨어 사는 노쇠한 남자의 모습을 보고, 그처럼 아다만티움 클로를 숨긴 로라의 등장을 보고 어느 정도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여태껏 스크린에서 본 ‘울버린’의 잔상 때문인지 상처가 금방이라도 봉합되고 일어설 줄 알았다. 그가 실험 도구였던 아이들을 만난 곳은 에덴으로 가는 길에 있는 바위 절벽 위. 로건은 그들의 목적지를 만화에나 나오는 곳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로건은 아이들의 길을 막지 않았다. 그곳이 어떤 곳이더라도 자신이 핍박 받으며 살아온 ‘이곳’보다는 나으리라는 희망을 걸고 싶었을 것이다. 로건의 죽음 이후 아이들은 그의 무덤 앞에서 짧은 애도의 시간을 갖고 단호히 에덴으로 향한다. 로건의 죽음에 이유를 만들어주려는 듯이.
원더우먼 2017 이탈리아 풀리아주 몬테성 아마존 데미스키라 왕국은 여자만 사는 섬이다. 신을 다스리는 신 제우스를 숭상하고, 전쟁의 신 아레스가 인간을 저주하는 세계다. 그러니 누군가 ‘진실의 올가미’에 묶여 진실을 털어놔도, ‘갓킬러’라고 불리는 검을 보관하는 성이 따로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성의 위치와 배치를 수학적·천문학적으로 정확하게 배열하고, 성의 모양까지 완벽하고 균형 잡힌 팔각형”의 몬테성이라면 갓킬러를 보관하는 곳으로 합당하다. <원더우먼>은 일종의 성장 영화로서, ‘갓킬러’라는 궁극의 무기는 다른 뭔가가 아닌 자기 자신이라고 역설하는 작품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만들지만 무엇보다 스스로 살아가는 집인 성도 마찬가지다. DC 코믹스의 세계관에서, ‘완전무결한 힘을 가졌다’고 일컬어지는 원더우먼은
이 영화에서 성처럼 홀로 우뚝하다.
프로메테우스 2012 아이슬란드 바트나이외퀴틀 데티포스 폭포 구름을 헤치고 빙하가 쌓인 산등성이가 드러나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자연은 자연이되 빙하 아래 화산이 폭발하면서 만들어진 바트나이외퀴틀의 검은 대지는 아름답다고 말하기 어렵다. 차라리 이 풍경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고 도발하는 듯한 난맥상이다. 카메라는 이 산맥, 빙하, 분지, 강을 지나 마침내 데티포스 폭포에 도달한다. 이 맹렬한 기세조차 상식을 넘어선다. 인류의 기원에 관한 단서로 등장하는 ‘엔지니어’가 뭔가를 마시고 온몸이 분해되는 그 유명한 장면이다. 그의 몸속에선 인간의 시냅스를 닮은 뭔가가 함께 무너져 내린다. 관객은 이 영화에서 시냅스를 처음 보지 않는다. 인간은 바트나이외퀴틀의 축소다.
에일리언: 커버넌트 2017 뉴질랜드 사우스랜드 밀퍼드 사운드 ‘우리는 어디서 왔을까’라는 궁금증, 인간의 두뇌가 폭발적으로 진화하면서부터 인종과 종교를 가리지 않고 등장한 질문이다. 감독은 우리의 창조자를 신이 아니라 우리와 닮은 외계 존재로 가정한다. 이 영화는 그가 영상으로 그린 우리의 근원에 관한 추적 중 하나다. 먼 미래, 이주할 곳을 찾아 사람들을 태우고 떠난 커버넌트호는 우주에서 신호를 감지하고 한 행성에 착륙한다. 프로메테우스호가 먼저 도착한 곳이자 인간을 창조한 생명체가 살던 곳이다. 음침하게 묘사했지만 영화를 촬영한 곳은 사실 뉴질랜드 남섬에 있는 피오르 밀퍼드 사운드다. 낙원이라 불리는 곳을 초토가 된 행성의 배경으로 삼은 것은 단지 감독의 악취미가 아니다. 창조자가 있다면, 그는 폐허에도 있을 것이다.
유스 2015 스위스 플림스 발드하우스 호텔 프레드 발린저는 이 호텔을 20년째 찾고 있는 은퇴한 작곡가이자 지휘자다. 낮에는 숲을 걷고, 밤에는 호텔 야외 공연장에 앉아 졸다 잠든다. 그사이 시간엔 사우나와 마사지를 이용한다. <유스>는 호텔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젊음과 늙음을 명료하게 대비시킨다. 실제로도 알몸으로 이용하는 발드하우스 호텔의 사우나는 영화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그 자체로 은유의 아우성이자 각축장이다. 호텔의 아름다운 조경과 느릿한 시간은 늙음을 비추는 쪽. 1877년에 지은 이 호텔을 압도적인 풍광으로 담아낸 신을 보는 것만으로도 영화의 의도는 절반 이상 읽힌다. 촬영은 다보스의 베르그 샤프알프 호텔에서도 진행했지만, 마이클 케인, 제인 폰다, 폴 다노를 비롯한 스태프들은 모두 발드하우스에 묵었다.
라라랜드 2016 미국 로스앤젤레스 허모사 비치 하루는 길다. 마음에 있는 여자와 만나고 그와 좋은 시간을 보내도, 영화 <이유 없는 반항>을 함께 보자는 다음 약속을 잡아도 ‘데이트’가 아니라 ‘리서치’를 위해 만나자고 한 게 못내 걸리는 순간이 온다. “이게 어떤 행복의 시작일지 아니면 이룰 수 없는 꿈일지” 걸으면서 생각하는 시간이다. 그럴 때면 여지없이 해가 진다. 파란 바다에 반사된 햇빛이 보라색을 머금은 곳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허모사 비치는 세바스찬이 휘파람과 함께 부르는 그윽한 노래 ‘City of Stars’의 배경이었다. 부부로 보이는 두 노인이 허모사 비치의 전망대 위에 서 있고, 문득 그가 여자와 ‘스텝을 밟다가’ 남자에게 핀잔을 듣는 장면이 촌극처럼 지나간다. 하루는 짧다. 사랑하는 사람과 허모사 비치에서 춤추는 시간을 갖기엔.
엑스 마키나 2015 노르웨이 주벳 랜드스케이프 호텔 새로운 인공지능이 비밀스럽게 탄생하기 위한 거처로 삭막한 빌딩 숲이나 허허벌판의 사막 같은 곳을 떠올렸다면, 상상력이 빈곤해졌음을 인정해야할 것이다. <엑스 마키나>의 천재 프로그래머는 노르웨이의 울창한 숲과 계곡 안에 자신의 연구소를 두고 있다. 광활하고 깊은 대자연 속, 폐쇄적인 연구소는 더욱 묘연해진다. 매혹적인 A.I 에이바가 윈도우 배경화면 같은 자연 밖으로 발을 디딜 때는 오싹하기까지 하다. 무성한 풀과 힘찬 물줄기와 둥글고 단단한 돌들 사이, 현대적이고 단순하게 디자인된 이 연구소의 정체는 주벳 랜드 스케이프 호텔이다.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예약만 제 때 한다면 숙박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뜻이다. 숙박비도 의외로 합리적이지만, 옆방에 수상하고 아름다운 A.I.가 머물고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2014 스위스 실스마리아 알프스의 말로야 계곡에서는 구름 떼가 협곡을 통과하는 순간이 있다. 거대한 뱀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 ‘말로야 스네이크’라는 기상현상으로 불리는 광경이다. ‘말로야 스네이크’는 중년 여배우 마리아를 스타로 만든 연극이기도 하다. 연상의 상사 ‘헬레나’를 유혹해 파멸시키는 젊은 ‘시그리드’ 역을 맡았던 마리아는 20년 후 같은 공연의 ‘헬레나’ 역을 맡는다. 그는 연극을 준비하기 위해 실스마리아를 찾는다. 그리고 비서 발렌틴과 함께 산등성이를, 계곡을, 걷고 또 걷는다. 생의 역설을, 젊음의 유한함에 대한 탄식을, 삶의 고비 구석구석을 넘어 맞닥뜨리는 말로야 스네이크. 늘 뒤를 충실히 따라왔으나 어느 순간 돌아보면 사라진 발렌틴처럼, 구름 떼는 묵묵히 실스마리아를 관통한다. 상념이 잦아들고 적요가 찾아오는 곳. 실스마리아는 니체가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더 폴 2006 인도 라자스탄주 조드푸르 꿈속의 푸른 도시, <더 폴>의 오디어스의 성이 자리한 그곳. 소녀 알렉산드리아가 무법자와 함께 마지막 전투를 치르는 이 도시는 그녀의 꿈처럼 아름답다. 타셈 싱 감독이 17년간 찾은 28개국의 로케이션에서 CG 없이 완성한 회화처럼 아름다운 영화, <더 폴>의 로케이션들 중 모든 건물의 벽이 푸르게 칠해진 인도의 한 도시를 소개한다. 인도 북서부 라자스탄주의 조드푸르는 주민 대부분이 힌두교 신자로 ‘블루 시티’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희고 고아한 소들이 일상적으로 오가는 이곳은 몽상과 현실의 경계에 있는 듯한 도시다. 타셈 싱은 이 도시에서 영화를 찍는 조건으로 모든 건물의 외벽을 푸른 페인트로 다시 칠해주기로 했고, 도시는 더 아름다워졌다. 하반신이 마비된 스턴트맨은 푸른 도시에서 무법자가 되는 꿈을 꾼다. 조드푸르는 소녀가 무법자에게 불어넣은 생의 온기처럼 희붐한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다.
문라이트 2016 미국 마이애미 사우스 비치 소년 샤이론이 마약 딜러 후안에게 수영을 배우던 바다, 청소년 샤이론이 친구 케빈과 입을 맞추며 한 손으로 모래를 움켜쥐던 해변이다. 지하철 플랫폼에서 소년 샤이론이 상징적으로 선택하듯이 그가 가고 싶은 곳은 다운타운이 아닌 사우스 비치다. 달력에 마이애미 사진을 실어야 한다면 꼭 촬영해야 하는 곳. 바다, 야자수, 모래사장, 호텔이 어울려 휴양지라는 말의 사전적 정의처럼 아름다운 곳. 누가 거길 마다할까. 후안은 그 바다에서 샤이론의 머리를 받치며 세상의 한가운데 있는 감각을 느껴보라고 한다. 하지만 성인 샤이론이 보여주듯 어떤 삶에는 부력이 없다. <문라이트>의 비현실적인 색채감은 이곳에 빚진다. 삶의 부력을 받고 싶은, 여기 아닌 거기.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2015 나미비아 나미브 사막 맥스는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쫓기는 사람”이라고 독백한다. 사막은 그의 단독자로서의 투쟁과 물 전쟁으로 피폐해진 현실 모두를 강조하는 배경이다. 나미브는 나마족의 언어로 ‘아무것도 살 수 없는 황량한 지역’을 말한다. 배경 정도가 아니라 인물로서 모래를 끼얹고 먼지를 날리는 것이다. 영화 외적으로는 사막이라는 조연과 함께 CG를 최소화한 영화 <매드맥스>의 사실성이 더욱 돋보인다. 나미비아의 대서양 연안을 따라 1천6백 킬로미터에 걸쳐 발달해 있는 이곳은 화성이나 토성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생명을 상상할 수 없는 공간이다. 하지만 퓨리오사가 고향이 사라졌다는 걸 확인한 그 밤, 푸른 별빛이 밝히는 능선이 유독 아름다운 것도 그곳이 사막이기 때문이다.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 2017 중국 홍콩 쿼리베이 익청빌딩 홍콩은 아시아에서도 별나다면 별난 곳이다. 역사를 거론하며 중화풍 혹은 영국풍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무리다. 다양한 인종과 풍습이 다닥다닥 붙은 주택처럼 그 안에 혼재한다. 인간과 기계의 중간이 아니고, 그렇다고 인공지능은 더더욱 아닌 공각기동대의 메이저처럼. 모토코의 집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 메이저의 뒤에는 익청빌딩이 서 있다. 건물과 건물을 블록처럼 이어 붙인 그곳은 해가 중천에 뜨기 전에는 어둠만 흐르는 홍콩의 민낯. 해안선의 화려한 건물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지만, 그곳은 사람이 사는 공간이었다. 메이저가 만난 것은 사람이면서 자기자신이었다. 정의를 위해 싸운다고 생각했던 메이저는 이제 다른 것을 생각한다.
- 에디터
- 손기은, 정우영, 이예지, 이재현
- 사진
- GETTY IMAGES KOREA, WALDHAUS FLIMS, JUVET LANDSCAPE HOTEL, JACQUET ROM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