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계에서는 ‘쓸모없음의 쓸모’라는 신화가 여전하다.
문학 비평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런 의심을 던질 때마다 자판기처럼 나오는 대답이 있다. 쓸모없음의 쓸모. 문학 비평뿐 아니라 문학, 아니 인문학 전반의 존재 근거에 대한 만능 답변. 어쩌다 이런 신화에 물들었는지 모르지만, 문학 비평의 입지를 고민하는 자리라면 우선 ‘무용지용’을 버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쓸모없음의 쓸모’는 쓸모없고, 문학 비평은 쓸모가 있(어야 한)다.
만능 답변은 보통 이렇게 제시된다. ‘쓸모없음의 쓸모’란 이윤을 만들지 못하는 비생산적인 것, 물질적인 것과 대비한 정신적인 것, 단기적이고 가시적인 성과가 없어 불필요하다고 오해받는 것의 쓸모를 말한다. 문학 비평은 자신의 쓸모없음으로 쓸모만 중시하는 세상을 불편하게 하고 독자를 성찰로 이끈다. 그렇게 문학 비평에 담긴 인문적 사유는 세상과 삶 사이에 낯선 거리를 만든다.
언뜻 이상할 것 없는 이런 답변이 뭐가 문제일까. 먼저 이렇게 물어보겠다. ‘쓸모없음의 쓸모’는 누구에게 쓸모가 있을까. 그걸 통해서 얻을 수 있다는 거리에는 누가 위치할까. 그 쓸모와 거리는 불편과 성찰로 요청하는 세상의 변화를 가져오는 데 무슨 작용을 할까.
‘쓸모없음의 쓸모’는 불편 이후의 세상이 굳이 오지 않아도 되는 사람에게 쓸모가 있다. 그래서 그 거리는 실천을 예비하는 비판적 거리가 아니라 구경하고 관찰하기에 안전한 거리이기 쉽다. 불편 이후의, 성찰 이후의 세상이 정말 필요한 사람에게는 다른 쓸모와 다른 거리가 필요하고, 문학 비평은 비평적 사유로 그걸 제시해야 한다.
사실 문학 비평을 이끄는 인문적 사유만큼 삶에 직접적인 쓸모가 있는 게 있을까. 인간은 서사적 존재이고 인간의 삶이 서사로 구성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면서 알게 모르게 비평적 사유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의식하건 그렇지 않건 아마추어 비평가로서 자기 삶의 서사를 (재)구성한다. 비평적 사유는 그 과정에 함께하면서 언제나 자신의 쓸모를 드러낸다. 문학 비평은 자신의 ‘쓸모 있음의 쓸모’를 말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그런데도 ‘무용지용’같은 신화가 이렇게 널리 퍼진 이유는 뭘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나를 포함한 문학 비평가들이 무능하기 때문이다. 문학 비평의 쓸모를 스스로도 믿지 못하고, 그 쓸모를 인정받을 기회를 알면서 모른체했던 문학 비평가들이 자신의 무능을 감추는 그럴듯한 알리바이다. 자신의 무능을 세상의 무용과 바꿔치기하며, 자신의 무능에는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어떤 깊이가 있다는, 자기 연민이 가득한 뒤집힌 우월감의 태도.
문학 비평가들이 무능하다는 실례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최근에 문학비평이 개입할 수 있었던 사회 문제들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나. 문단 내 성폭력, 김훈, 박범신 등의 소설에 깔린 여성 혐오, 지하철 스크린도어의 시대착오적인 시 등 금방 떠오르는 일만 해도 여럿이다. 시류를 따라 이런 문제들에서 자신의 쓸모를 실험하지 않는다면, 대체 어디에서 그걸 확인할 수 있을까.
주례사 비평, 선후배로 얽힌 인맥, 과도한 이론화로 인한 자폐적 비평 등 수없이 지적된 주변 요인 중에서 누구도 어쩔 수 없는 구조적 문제가 있나. 사회 전반의 문화를 바꾸는 것도 아니고, 채 1만 명도 안 되는 업계의 규율 하나 만들지 못한다면 무능한 게 맞다.
물론, 문학 비평가들이 무능한 게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환경이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만약 문학 비평가들은 실력과 재능이 넘치는데, 업계를 둘러싼 후진 문화가 커다란 걸림돌이라면 왜 바꾸지 않을까. 주례사 비평, 선후배로 얽힌 인맥, 과도한 이론화로 인한 자폐적 비평 등 수없이 지적된 주변 요인 중에서 누구도 어쩔 수 없는 구조적 문제가 있나. 사회 전반의 문화를 바꾸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넓게 잡아도 채 1만 명도 안 되는 업계의 규율 하나 만들지 못한다면 무능한 게 맞다. 그것 때문에 변화도 성과도 더디다고 오랫동안 한 목소리로 비판하는데도 여전히 그런 습속이 유지된다면, 불평은 알리바이고 오히려 그 문화가 편한 게 아닐까 의심하기 마련이다.
무능한 상태에서 ‘쓸모없음의 쓸모’를 말하는 게 얼마나 허망한지 최근 화제인 TV 프로그램 <알쓸신잡>의 한 장면을 빌려본다. 우리말의 호칭, 존댓말 등이 어떻게 일상의 위계를 만들어 자유롭고 평등한 소통을 가로막는지 비판하던 장면. 그 자리에서 오가던 인문적 비판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쓸신잡>의 5인방은 스스로 증명한다. 그 비판이 쓸모가 있었다면, 적어도 시즌이 끝날 때까지라도 그것이 반영된 5인방의 존칭과 호칭 공동체를 꾸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장면 이후 그들은 다시 선생님과 선후배의 세계로 돌아간다. 자신들은 그 세계에서도 자유롭고 평등한 소통을 할 수 있는 예외적 존재라는 걸까. 5인방이 통쾌한 일침을 날렸고, 사람들은 사이다를 마셨고, 세상을 불편하게 하면서 우리는 성찰했으니, 그걸로 충분한 ‘쓸모없음의 쓸모’의 무능.
그런데 문학 비평가가 유능하고 문학 비평이 유용하면, 문학 비평의 입지가 달라질까. 그건 전적으로 시민사 회에 달렸다. 문학 비평은 본질적으로 무력하다. 쓸모가 있다면서 무력하다니? 무력하다면 무용한 것 아닌가 반문하겠지만, 그건 마음의 습관 탓이다. 예컨대 이런 질문들. “혼자니까 외로우시겠어요.” (아니오.) “가난해서 불행하겠네.” (꼭 그렇진 않아요.) “실패했으니까 실망했겠죠?” (아닐걸요.) 무능, 무용, 무력처럼 서로 충분히 분리되는 개념을 마음은 습관적으로 이어 붙인다. 무능해도 쓸모 있을 수 있고, 쓸모 있어도 무력할 수 있다. 그러니까 문학 비평은 유용하지만 (현재는) 무능하고 (여전히) 무력할 것이다. 문학 비평이 무력한 이유는 뭔가. 수천만의 황빠가 날뛰어도 황우석의 논문 조작 사실을 바꾸진 못한다. 하지만 문학 비평은 과학이 아니고 민주주의와 대화가 우선하는 세계에 속한다. 가장 유능한 문학 비평가가 엄청 유용한 문학 비평을 선보여도, 독자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이다. 대화의 세계에선 누구라도 마지막 대답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돌려놓을 수 있으니까.
무력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말, 그 말을 통한 설득, 거기까지가 문학 비평이 할 수 있는 전부다. 하지만 이 쓸모를 시민사회가 거부하면 그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반지성주의 풍조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과제로 떠오른다. 반지성이란 무지가 아니다. 또 무지는 지식의 부족이 아니다. 자기의 지식에 부족함이 없(다고 믿)는 상태, 자기의 옳음에 흔들림이 없는 상태가 반지성이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최근 탁현민 문제가 있었다. 청와대 주재 한국 남성 강간 문화 대사 탁현민의 문제는 그가 저술한 몇 권의 책에서 비롯됐다. 그 책들을 어떻게 읽는가가 사태를 파악하는 데 필수인 만큼 문학 비평이 개입할 근거도 충분하다. 그런데 그 책들을 통해 탁현민이 범죄자에 준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할 근거는 부족하다. 그렇게 (과도하게) 읽어내는 것은 읽기의 실패고 무능이다. ‘사람이 먼저인 나라’보다 ‘탁현민은 물러나라’가 우선이라는 데 동의한다 해도, 그 주장을 정당화하는 근거에 반지성주의가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야 한다. 사람들이 연대하는 이유는 단순히 탁현민의 해임이 아니라 탁현민 이후의 세상이 지금보다 더 낫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니까.
탁현민이 어떤 사람이라고 성마르게 규정짓지 않고도 탁현민의 임명이 문재인 정부가 내세운 페미니즘 가치와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점으로 싸울 수 있다. 여기서 상술하진 못하지만, 탁현민이 ‘픽션’이라는 아둔한 울타리를 꺼내든 선택이 “불세출의 공연 기획자”로서의 자신의 진정성은 물론 문재인의 진정성마저 농담거리로 만든다는 비판을 덧붙여도 좋겠다. 진정성 장르는 ‘픽션’을 허용하면 무너지고 만다는 기본을 자기 안위를 위해서 위반하고, 문재인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자산일 진정성마저 오염시키는 데 앞장서는 최측근이라니.
하지만 ‘무학의 통찰’로 무장한 반지성주의자들은 (아니, 듣기라도 좋게 지성의 미니멀리스트라고 부를까.) 공격적 무지를 사방으로 분출하고, 청와대는 위민한다더니 ‘대체 불가능한 인재人災’를 위탁하고선 흔들림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가 주장하는 입장의 근거를 비평적 사유를 통해 점검하고 재구성하자는 제안은 쉽게 ‘쉴드/안티’의 딱지가 붙어 저만치 밀려난다.
그렇지만 우리는 반지성주의에서 벗어나, 무력하더라도 기품을 지키면서 싸워야 한다. 그게 탁현민 이후의 세상을 현재에 미리 살아내는 길이다. 한편, 탁현민의 텍스트가 환기시킨 한국 남성의 강간 문화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따로 계속 이어가야 한다. 그 논의는 탁현민이라는 이름을 지우고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그게 바람직하다.
탁현민 문제와 관련해서도 문학 비평의 역할은 한계가 분명하다. 하지만 쓸모를 증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자기 몫의 사회적 참여를 건너뛰고서 문학 비평의 입지가 달라지길 기대할 수는 없다. 청와대를 반지성주의가 점령한 지성의 다이소가 되도록 내버려둘 것인가.
비평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비평의 권위는 사라졌다. 비평적 콘텐츠는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지만 비평은 소비되지 않는다. 누구나 비평적인 목소리를 내지만 비평가를 자처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근데 비평이 존경이나 관심과 가까웠던 적이 있기는 한가. 이달 < GQ >는 비평의 절대 변할 수 없는 불편과 이 시절의 고쳐 앉은 자세를 모두 들여다본다.
- 에디터
- 글 / 박준석(문학평론가)
-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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