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버른에서 만난 ‘이웃사촌.’
호주는 뻔한 곳이다. 탈조선을 외치는 젊은이들이 꿈꾸는, 느긋한 근로 환경과 높은 연봉을 제공하며 소위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이 가능한 곳으로 알려졌다. 소설 <한국이 싫어서>의 계나도 그곳으로 떠났다. 나는 그 뻔함에 끌리지 않았다. 그래서 몇 년 전 교환학생 신청서를 쓸 때도 호주 대학들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뻔한 곳에 갈 바엔 차라리 떠나지 않겠어.’ 뜻밖에도 멜버른행 비행기를 탄 건 그로부터 반년 후다.
멜버른은 마을 같았다. 인구 2천5백만의 수도권에서 자라고, 악명 높은 인구 밀도로 유명한 홍콩에서 대학을 다녔으므로 멜버른이 마을처럼 느껴진 건 당연했다. 실은 4백만 명이 넘게 사는, 시드니와 비등하며 베를린보다 큰 도시였지만 개인주의가 소외로 변질된 도시, 서울과 비교하자니 더욱 착각할 만했다.
멜버른 사람들에게는 타인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성가신 오지랖이나 남을 재단하는 시선과는 다른 ‘관심.’ 그게 너무 당연해서 혼자 신기해 했다. 도착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싼값에 자전거를 구해서 타고 다녔다. 아파트 주차장에서만 타봤기에 안 봐도 뻔하게 자주 넘어졌다. 그럴 때마다 주변에서 누군가 다가와 괜찮느냐고 물었다. 자전거 바구니에서 떨어진 책을 주워주고 피우던 담배를 건네주기도 했다. 민망해서 툭툭 털면서 일어나 “괜찮아, 고마워”라고 말하고 자전거에 오르면서 생각했다. ‘아니, 이게 가능해? 이렇게 큰 도시에서?’
나만의 운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남자친구와 싸우고 울면서 도심을 걷는 친구에겐 지나가던 행인이 휴지를 내밀었고, 이어서 또 다른 이가 다가와 어깨를 토닥여줬다. 사심 가득한 남자들? 아니, 타인을 남으로 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가정 폭력 피해자를 ‘괜히’ 돕지 말라는 ‘친절한’ 조언이 온라인상에 난무하는 한국이 생각나는 순간이 많았다. 마드리드가 고향인 친구 역시 그곳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고 덧붙였다.
타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개인 대 개인의 관계를 넘어 도시의 성향과 색깔을 만들었다. 북쪽에 위치한 세레스 환경 공원에는 자원봉사자의 손으로 일군 친환경 밭과 카페, 유기농 식료품점과 자전거 수리점이 있다.(이곳에서 자원봉사자의 도움을 받아 버려진 자전거를 단돈 4만원에 고쳐서 탔다. 살면서 공구 한 번 만져본 적 없는 내가.) 그곳에서는 난민들 고유의 식문화를 바탕으로 경제적 자립과 정착을 돕는 팝업 스타일 레스토랑도 주기적으로 열린다. 식사가 마무리될 즈음엔 음식을 준비한 사람들이 나와 본인들의 이야기를 서른 명이 넘는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과 나눈다. 가족 모임에 간 듯하다.
물가가 비싼 만큼 최저 시급이 높은 곳이기도 했지만, 돈이 충분치 못한 사람들도 각자가 가진 능력으로 살아갈 방법이 마련된 곳이었다. 심지어 한 하우스 메이트는 함께 일주일 동안 한 푼도 쓰지 않고 살아보자고 제안했다. 배가 고프면 도시 곳곳에 있는 채식 레스토랑 ‘렌틸 애즈 애니싱’에 가서 신선하고 건강한 음식을 먹은 뒤 낼 수 있는 만큼의 돈을 내거나 그마저도 없으면 그릇을 닦고 일을 도우면 된다. 이 모든 건 양심적으로 이루어지지만 별 탈 없이 굴러간다. 이 레스토랑이 얼마나 사랑받았느냐면, 한 지점이 임대인의 변덕으로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하자 많은 사람이 몇 달간 온·오프라인에서 목소리를 높여 자리를 지켰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원주민이 쫓겨나는 게 당연해진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와 극명하게 대조된다.
사심 가득한 남자들? 아니, 타인을 남으로 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가정 폭력 피해자를 ‘괜히 ’돕지 말라는 ‘친절한 ’조언이 난무하는 한국이 생각나는 순간이 많았다.
한 사람의 목소리가 너무나 쉽게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는 한국 사회에 익숙했던 나는, 초등학교 바른 생활 시간에나 들었을 법한 공동체적 사회라는 개념의 실재를 체감했다. 함께 목소리를 더해주는 사람들 덕분에 잠시 거쳐가는 나 같은 사람조차도 공동체의 문제에 귀 기울이고 나만의 방식으로 참여했다.
애초에 호주에 관심을 두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영어권 국가에서 보이는 단조로움과 폐쇄성 탓이었다. 이민자의 나라를 자처하는 미국은 ‘멜팅 팟’에 다양성을 섞어 녹여버렸고, 한국은 그 미국 문화를 서양 문화로 퉁쳐 받아들였다. 하지만 멜버른은 그저 영어를 쓰는 앵글로색슨의 무미건조한 도시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난 세기 동안 다양한 이민자가 뿌리내려 각각의 동네를 형성하고 전통을 이어온 장소였다. 가령 2차 세계대전 후 이탈리아 이민자가 대거 정착한 ‘칼턴’에서는 영어보다 이탈리아어가 더 많이 들린다. 잠시 살았던 그 동네의 집도 수다쟁이 이탈리아 할아버지가 세를 준 곳이었다. 뒷집 할아버지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아침 일찍 깨곤 했지만 내가 상상했던 ‘단조로운 영어권 국가’의 삶과는 참 다른 날들이었다. 그 외에도 그리스, 레바논, 에티오피아, 유대계 이민자가 자리 잡은 동네들이 있었는데, 예외 없이, 한국인인 내가 어느 동네에 가도 눈에 띄거나 배척당 하기는커녕 다양성을 존중받을 수 있었다. 호주로 떠나기 전, 인종 차별을 조심하라는 조언이 무색했다. (물론 호주의 북쪽, 퀸즐랜드주로 올라갈수록 차별적 정치, 사회적 경향은 가시적으로 짙어진다.)
단조로움에 대한 걱정은 멜버른에 도착한 첫날부터 깨졌다. 도시 곳곳에 자리 잡은 그라피티를 보고 예감했다. 활발한 예술, 문화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도시였다. 브리즈번 출신의 한 친구는 멜버른을 ‘학생과 예술가, 곧 직업이 없는 사람들의 도시’라고 칭했다. 멜버른에서 만난 친구들은 대체로 스케줄이 뻔한 사무직보다는 레스토랑 서빙이나 프리랜서로 일하는 사람이 많았고, 그것만으로도 의식주 해결뿐만 아니라 자아 실현을 위한 시간적, 경제적 여유를 보장 받았다. 이를테면, 한 하우스 메이트는 배우이자 감독이었는데 아침 여섯 시부터 반나절 정도 반려동물 호텔에서 일하고, 나머지는 책을 읽거나 연극을 준비했다. 또 다른 하우스 메이트는 평일 내내 서커스 학교에 다니고 주말만 동물병원에서 일하면 한 달 방값과 식비를 부담할 수 있었다. 물론 후자의 친구는 학교에 다니는 기간만큼은 평소보다 빠듯한 삶을 살았지만 주 5일 근무를, 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꿈이 현실을 피폐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참 행복해 보였다.
이 세상에 돈 버는 일을 꿈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다. 하지만 먹고살기 위해서는 일단 돈부터 벌어야 하는 것과, 생존과 자아 실현이라는 양 갈래를 모두 잡지는 못 해도 적어도 좇을 수는 있는 것은 달랐다. 그래선지 그곳에서 만난 수많은 친구들은 스스로를 굳이 ‘예술가’나 ‘작가,’ ‘배우’로 소개하지 않으면서도 누구보다 성실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다. 열정만 있다면 외롭지 않은 ‘덕질’이 가능한 곳이기도 했다. 하루는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향하다 집 근처 공원에서 중세 시대 복장을 한 수십 명을 봤다. 매주 금요일 저녁에 모여 현실에서의 판타지 게임을 하는 동호회였다. 혼자서 모니터만 보면서 게임하는 게 아니라 직접 복장을 만들고 빌려서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직접 교류할 수 있는 곳, 이렇게나 양질의 괴짜다움을 드러낼 수 있는 곳이라니. 함께 칼을 들고 싸우는 그 모습을 울타리에 걸터앉아 넋놓고 구경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이 모든 게 바로 멜버른이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제일 살기 좋은 도시를 몇 년째 꿰차고 있는 이유 아닐까? 완벽한 곳이 있을까만, 혼밥, 혼술이 화두가 되는 소외 사회, 현실에 짓눌려 남들 눈치 보면서 획일화된 삶을 강요당하는 통제 사회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멜버른에서 만난 친구 중 유일하게 그곳을 떠나려고 발버둥 치던 한 친구는 멜버른에서는 삶이 너무 쉽고 편해서 현실에 안주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유든 치열함이든 뭔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꿈 아닐까. 한국을 떠나야 한다면, 꿈이 현실인 곳으로 가고 싶지 않을까.
몸이 그렇듯 고향도 주어진다. 하지만 살아가고 싶은 도시는 선택할 수 있다. 이름을 바꾸듯 결단이 필요한 일만은 아니다. 부쩍 가까워진 세계 속에서 불가능은 없어 보인다. 다만 살 수 없더라도 그곳이 얼마나 이상적인지 스스로 가늠해 나가다 보면, 지금 이곳에서는 불가능할까, 라는 질문을 만난다. 이달, < GQ >는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 이상적인 도시에 관해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