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형님>은 ‘하나의 부류’에게 환심을 얻기 위해 오늘도 치고받는다.
외화를 수입해왔을 때, 주연 배우의 이름이 제목 앞에 붙는 것이 좋다. 그의 이름을 앞세워야 ‘돈이 된다’는 감각. 사나이 영화일수록 그런 전략이 잘 먹힌다는 편견이 있다. 브루스 윌리스의 <다이하드>, 장 르노의 < 레옹>, 주윤발의 <영웅본색>. <아는 형님>은 이미 각 분야에서 인지도를 확보한 남성 연예인 일곱이 공동 주연인 쇼지만 제목은 단수형이다. 모두가 물음표를 품었던 ‘강호동의 어설픈 종편 채널 데뷔작’으로 시작해이른바 ‘대세 예능’이 된 지금까지 나는 이 쇼를 언제나 ‘강호동의 <아는 형님>’으로 불러왔다.
나는 강호동의 천하장사 시절을 모른다. 텔레비전을 보기 시작했을 때 이미 그는 텔레비전 세계의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이자 큰형님이었다. 또한 1923년생인 우리 할머니가 유일하게 이름과 얼굴을 아는 방송인이었다. 텔레비전 쇼를 특정 세대만큼 적극적으로 향유하지 않는 시청자층에게도 인지도를 갖고 있다는 것은 ‘1박 2일’ 같은 여행 프로그램에서 여러 차례 증명된 바 있다. 그리고 강호동은 스스로 그 점을 잘 이용하는 사람이었다. 요즘은 좀 덜하지만, 강호동은 한때 모든 말의 끝을 ‘국민 여러분’으로 맺었으니까.
그 인기에 대해서 ‘왜?’라는 생각이 종종 들곤 했다. 그의 활약들을 되짚으면 이유를 알 수 있나. ‘공포의 쿵쿵따’ 세트에서 끝말잇기를 할 때, <천생연분>에서 중매를 설 때, <무릎팍 도사>에서 명사들과 명언을 나눌 때, <스타킹>에서 눈물과 박수를 유도할 때. 프로그램 포맷이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것이 쉽게 보인다. 그는 늘 자신의 이름을 3인칭으로 부른다. 꽤 긴 시간 동안 국민 MC로 군림하던 ‘호동이’의 가장 큰 무기는 그런 ‘귀여움’이었다. 아마 당연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귀여움은 코미디에서 제일 소중한 감각이고, 귀여운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
<아는 형님>에서도 강호동은 여전히 귀엽다. 그는 자신의 영광이었던 전작들처럼 친한 동생들을 향해 ‘밉지 않은 응석’에 협박을 녹여내고, ‘싸펑피펑’(싸우고 시펑? 피나고 시펑?) 같은 말을 유행시킨다. 그가 능숙하게 만들어내는 이 존재 방식은 힘을 가진 사람이 의외의 약하고 허술한 모습을 보일 때 느껴지는 웃음, 이른바 ‘조폭 코미디’ 감성의 연장처럼 보인다. 그의 귀여움은 시청자들에게 ‘우리 호동이’가 친한 동생들을 진짜 때리진 않을 거라는 전제가 있기에 가능하다. 그러나 <아는 형님>이 현재의 모습으로 자리를 잡을수록 그 귀여움은 전과 같은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과거 그의 애교 섞인 협박이 큰 문제처럼 보이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장내를 정리하고, 쇼의 톤을 적정한 수준으로 맞추려는 정중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는 형님>은 김구라의 등장과 성공 이후, 새롭게 조정된 예능업계의 전반적 정서인 ‘막말의 묘미’를 필살기로 삼는다. 이곳에서 강호동의 ‘귀여움’은 모든 것의 면죄부로 작용한다. <아는 형님>은 사실 귀여울 수가 없는 쇼다. 한국 예능 기본 포맷인 ‘출연진이 전원 30대 40대 남성’이라는 토대가 말해준다. 그 위로 모든 면면이 ‘아재감성’으로 설계된 쇼가 귀엽기는 당연히 어려울 것이다. ‘아재’라는 단어는 원래 한국의 여러 집단과 계층들 사이에서 비교적 우위에 있는 중년 남성들의 위선을 비꼬는 데 쓰였다. <아는 형님>의 출연진들은 그 단어를 완전히 긍정적인 의미로 바꿔놓은 주역이다. ‘아재’라는 단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해 재미없는 농담들을 쏟아내는 그들을 보며 마치 ‘아재’가 해방이 필요한 핍박의 단어였나 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아마 <아는 형님>의 세계관에선 모두가 친구고, 동갑이라 반말을 하기 때문에 그들의 나이와 위치가 조성하는 것들이 모두 가려질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런 장치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본인들의 권력과 위치를 너무나 잘 아는 듯한 행동을 한다. 그들보다 계급이나 위치, 경력 등이 낮은 게스트가 나왔을 때, 그들의 태도가 만들어내는 분위기의 격차를 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이 점을 지적할 경우,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막 대하니까’ 괜찮다는 태도로 응수하기 일쑤다. 이 모든 지적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무적의 방패가 바로 무대로서의 ‘교실’이고, 그것을 또 한 번 감싸주는 것이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강호동의 귀여운 애교다.
강호동을 비롯한 <아는 형님>의 출연진들은 이러한 비판을 전혀 모르는 것 같지 않다. 그러니까 그 부분이 가장 큰 문제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열광하는 특정한 시청자층을 위해 지금 방식을 고수하겠다는 고집스런 입장을 방송에서 여러 번 비쳤다. 비교적 최근 방송에서 강호동은 이런 원성을 염두에 둔 것처럼 꽤나 의미심장한 어조로 “너무 많은 걸 다 신경 쓰지 마라. 어차피 방송은 제작진이 책임지는 거고 우리는 우리 할 일만 하면 된다”는 말까지 했다. 그의 형님 리더십이 역대급으로 서글프게 발휘된 순간이었다. 맞는 말이긴 하다. 출연자는 본인의 역량을 다함으로써 방송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오랜 시간 연예계에서 1인자의 품위를 유지하며 제작진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발휘해온 출연자가 한 말이었기에 유독 실망스러웠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잠정 은퇴를 선언한 뒤, <신서유기>로 복귀한 강호동은 이승기, 이수근, 은지원을 향해서 “방송에서 이런 말을 해도 되나?”라고 반복해서 물었다. 20년간 국민 MC로 사랑받던 강호동이 자신이 직접 예능을 가르쳐준 동생들에게 그게 요즘 예능 트렌드라는 얘기를 들었다. 이는 곧장 ‘동생들의 말도 귀담아 들을 줄 알며, 변화에 자신을 맞추는 대인배 강호동’ 같은 것으로 해석됐다.
<아재> 라는 단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해 재미없는 농담들을 쏟아내는 그들을 보며 마치 <아재> 가 해방이 필요한 핍박의 단어였나 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나는 유감스러웠다. 강호동이 실제 어떤 사람이건 그가 방송인으로서 가진 태도와 지향점은 김구라와 그의 동류들이 만든 ‘아니 방송에서 어떻게 저런 말을 하지?’ 코드는 아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금기를 깨는 것은 그 순간엔 신선하고 자극적인 재미로 느껴진다. 그런 ‘인스턴트 방식’을 꿰어 10년을 버틴 쇼가 <라디오스타>니까. <아는 형님>은 그렇게 이미 다른 쇼들이 다 써먹고, 이제는 그리 대단치도 않은, ‘방송에서 내가 이런 말도 한다!’는 낡은 정서를 신선한 척 포장하려 든다. 아니, 어쩌면 신선함 따위에도 관심 없고,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현재 제작되는 대부분의 쇼가 모두 그런 정서를 울궈먹으며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보다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집중하고 있지만 <강호동의 아는 형님>만큼 주목받지는 못하니까. 그들은 오히려 보란 듯이 옛날 교복을 입고, 옛날 노래를 부르니 누군가의 향수를 자극하고 있단 착각을 할 수도 있겠다. 그 사이에서 기껏해야 인터넷 은어를 좀 더 구사할 뿐인 김희철이 나름 신세대 감성이라며 강호동, 이수근 등에게 따봉을 받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거다.
나는 <아는 형님>을 적극적으로 즐겨 보는 사람들이 ‘앞서 말한 ‘사나이 영화’를 볼 때와 비슷한 방식으로 이 쇼를 소비할 거라 생각한다. 장르적인 기능을 위해서 간과한 많은 문제점에 잘못됐다는 의식을 가지기보단 오락성과 쾌감을 더 중요한 가치라 말하고, (나도 꽤나 막말과 수위 높은 농담, 무례함을 좋아하는 편인데, 이 쇼에서 그런 걸 추구한답시고 하는 얘기들이 정말 재미있는지 역시 한 번 더 생각해볼 문제다) 문제들을 지적하는 사람들을 유난스럽다고 생각하며, 재미있게 보는 자신을 무시하는 거냐며 도리어 화를 내는 뻔한 유형들. 아마 <아는 형님>이 염두에 둔 시청자들이 바로 그들일 것이고, 어쨌든 그들 마음에 든 것 같으니 어떤 의미에선 성공이라 볼 수도 있겠다. 비록 ‘짬’ 좀 먹었다는 출연진들의 어마어마한 이름값과 적극적인 본인 과거사, 사생활의 노출을 통해 얻어낸 쾌거라기엔 한없이 초라하다고 생각되지만.
세상 모든 것이 새로울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텔레비전 쇼가 뭐라고 사람들에게 매 순간 신선함을 선보이며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겠나. 세상에는 텔레비전보다 더 좋은 것에서 유희를 찾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나처럼 텔레비전에 중독된 사람들 또한 이미 대안을 많이 찾았다.(이 글을 쓸 일이 없었다면 <아는 형님>을 다시 보는 일 같은 건 아마 하지 않았을 거다.) 공중파의 대안이 케이블과 종편이던 시기도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가 됐다. 한 시간 이상의 방송을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보는 사람도 드물다. 아마 <아는 형님>이 비슷비슷한 남자 방송인 일색의 예능 프로그램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이런 양상에 반응하는 점 때문일 것이다.
1시간 30분 정도 되는 <아는 형님>은 시종일관 어수선하고 정신이 없다. SNS에 올라갈 짧은 클립의 분량을 출연진과 제작진이 계산하며 움직이고 있는 듯하는다. 매회 다른 게스트를 초청하는 토크쇼의 포맷이지만 이야기의 템포가 유례없이 짧다. 그러다 보니 게스트의 ‘자극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방식과 수위 또한 적절할 수 없다. 방송에서 재밌었던 부분을 ‘클립’으로 잘라 소비하는 환경에 맞추다 보니, 제작진도 그 영상들이 주로 노출되는 환경의 사용자와 수요, 정서 등을 집중적으로 파악할 것이다.(실제로 <아는 형님>은 방송 초반 남초 커뮤니티의 가장 큰 축인 ‘디시인사이드 야구 갤러리’에서 아이디어를 응모하는 이벤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공공의 영역에 있는 방송이 지켜야 할 기준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이 쇼는 인터넷방송 이라기엔 ‘노잼’에 가깝고, 공공성을 추구해야 하는 방송이라고 하기엔 상당히 부적절하며, 해당 방송사의 보도국이 보여주는 진일보함에 비해 정치적인 업데이트 또한 전혀 되지 않은 모습이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이도 저도 아니니 그냥 모든 귀를 닫고, 비싼 제작비로 만드는 인터넷 방송이 되는 방향을 택한 것처럼 보인다. 모를 일이다. 언젠가는 벽에 간장을 칠하고 여자는 3일에 한 번씩 패야 한다는 노래를 만들어 불러도 놀랍지 않을 수 있다.
방송국 외의 플랫폼과 개인 방송의 영역은 이미 확장을 끝냈다. 유튜브의 위협적인 콘텐츠 생산 속도는 공중파 방송국으로 하여금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라는 방송까지 제작하게 했다. 무시할 수 없는 시청자 집단으로 자리 잡은 팬덤은 브이앱을 선택하고, 자본이 많이 투입되어 질이 좋을 수밖에 없는 콘텐츠를 원하거나 규모가 작아도 새로운 이야기를 보고 싶다면 넷플릭스나 각종 제작사가 만들어내는 웹 콘텐츠를 골라가며 볼 수도 있다. 이런 외부적 변화가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조급함을 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떤 기준을 새롭게 만드는 것과 그 기준과 선을 끌어내리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다.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은 늘 자신들의 영향력을 인지하고, 본인들이 지향하는 과정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엄격하게 검열해야 한다. B급 정서를 표방하고 나섰지만, <아는 형님>은 존재감과 격을 확보한 방송인들이 진행하고 있고, 그들의 영향력이 발휘되는 있는 실전의 장이다. 그들은 시청자들의 오락과 유희를 위해 개인사의 공개나 격이 낮은 말들까지 ‘감수’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그런 각오는 결코 존경스러운 것도 아니며, 그렇게 해서 발생되는 웃음은 결국 씁쓸할 뿐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나는 심의를 거치지 않은 문제적 인터넷 방송들이 초등학생부터 성인까지 악영향을 끼치는 것만큼, 이 방송이 지금 이 상태로 인기가 많아져 방송계의 보편적인 정서로 자리 잡는 게 두렵다. 그들은 분명히 지금보다 좀 더 고민할 수 있다. 시청자들은 더 이상 ‘하나의 부류’가 아니며 결코 기다리거나 참는 존재가 아니다.
“본방 사수”라는 말도 사어가 됐다. TV는 동시대에 뒤처졌다. 한국 사회에서 TV는 여전히 가장 영향력이 큰 매체지만 동시대 감각에 무딜 뿐만 아니라 이제는 책임감마저 없어 보인다. “욕하면서도 본다”라는 전혀 달콤하지 않은 말에 취해 있어도 좋은 걸까? 끌 때 끄더라도 욕 한마디는 시원하게 해야겠다.
- 에디터
- 글 / 복길(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