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동인천 여행의 시작 ‘서프코드’

2018.02.26정우영

동인천을 여행하기에 서프코드는 썩 괜찮은 시작이다.

동인천은 멀다. 빌딩의 1층과 2층처럼 멀다. 1층이 서울이기 때문이다. 1층에 부족한 게 있기는커녕 차고 넘친다면 2층에 가는 건 괜한 일일 것이다. 아마도 지금껏 입국 신고서의 출발지 난에 ‘Incheon’이라고 적을 때가 인천을 가장 가깝게 느낀 순간 아니었을까. 인천은 19세기 말부터 지금까지 서울로 가는 관문으로 기능했고, 서울 사람은 이제 인천공항을 거쳐 다른 곳으로 떠나지만 인천에 대해 아는 것은 여전히 많지 않다. 옛날 월미도 유원지는 비행 청소년이나 가는 곳 같았고, 인천에서 열린 한국 최초의 대형 록페스티벌은 태풍 올가가 한반도를 강타하면서 망했으며, 송도국제도시는 해운대 마린 시티에 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로 가지 않았다. 그리고 동인천은 그냥 너무 멀었다. 동인천에서 나고 자라 동인천의 유일하고 뜬금없는 서핑 가게 ‘서프코드’를 운영하는 김선홍 디렉터는 말했다. “어렸을 때 화평동에서 세숫대야 냉면 먹으면 월미도 바이킹 이용권을 줬어요. 그거 받아서 공짜로 바이킹 타러 갔죠. 저희는 그런 거라도 있었지만, 서울 사람들은 왜 거기 갔는지 모르겠네요.” 서울의 냉면집에선 냉면만 팔았다.

나란히 놓일 수 없는 것들이 나란하고, 뒤엉켜서는 안 되는 것들이 뒤엉킨 게 서울이라고 뭇사람들은 말하지만 송월동 동화 마을의 아기자기한 입구 바로 옆 거대하고새빨간 중국집 ‘연경’을 본다면 좀 더 넓은 시각을 가지게 될 것이다. 예컨대 ‘제물포 구락부’는 동인천의 역사적, 문화적 지형을 잘 보여주는 문화재 중 하나다. 20세기 초 인천에 머물던 미국, 독일, 영국인들이 교류하던 일종의 사교 클럽으로, 대개의 항구 도시가 당대의 어떤 도시보다 범국제적이고 활발한 문화를 보여준 사례들과 같다. 6.25 전쟁을 통해 동인천의 맥락이 뒤틀렸을지언정, 80년대 초반 주안, 간석 일대에 대규모 아파트가 들어서고 시청이 이전하면서 도시의 중심이 이동했을지언정 동인천 역시 오랫동안 그런 곳이었다. 저렴하고 알차다고 소문난 차이나타운, 민어 골목, 순대 골목, 삼치 골목, 양키 시장에 사람이 넘쳐났고, 무엇보다 인천에서 영화를 보려면 애관, 미림, 피카디리, 오성, 인형 극장이 모여 있는 동인천으로 가야 했다. 지금까지도 이 모든 게 남아 있으나 그 많던 사람만이 자리를 비웠다. 썰물이 빠져나간 사이 뻘 위의 물이 얼어버린 북성포구 같은 풍경이랄까.

 

“제가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전부 동인천에서 놀았어요. 제 기억으로는 인현동 화재 사건(인현동 라이브2호프집에서 발생한 화재로 56명이 사망하고 78명이 부상당한, 한국 정부 수립 이래 3번째 규모의 대참사였다)이 기점이었던 것 같아요.” 김선홍이 말했다. 실제로 IMF의 여파로 인천백화점이 문을 닫고, 구월동 CGV가 개관하면서 극장의 중심이 옮겨가던 1999년 발생한 이 사건으로부터 동인천은 사람들에게 외면당한다. 지금 양키 시장에는 드문드문 수선집만이 자리를 지키고, 애관극장과 인천백화점은 빈 건물로 방치돼 있으며, 민어골목, 순대 골목은 아는 사람만 아는 곳이다. 단지 동인천에는 서프코드가 있다.

인천자유공원은 작정하고 걸어야 올라갈 수 있는 응봉산 정상에 있다. 한미수교1백주년 기념탑, 맥아더 동상 같은 볼거리가 있는,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내리교회, 제물포구락부, 차이나타운, 동화 마을, 삼국지 벽화 거리 모두에 근접한 동인천의 요지이기는 하나 굳이 여기서부터 인천 여행을 시작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서프코드는 여행도 시작되지 않는 곳에서 가게를 시작했다.

‘동인천의 서핑 가게’는 어색한 정도지만 ‘인천자유공원 앞 서핑 가게’는 황당하다. 이 지리적 위치처럼 서프코드는 무모했다. 도전 같은 단어가 아니라 현실을 초과하는 기대와 기쁨을 따르는 정직이었다. 서프코드는 “바다 감성의 다양한 제품”을 판매하는 편집숍이자 자체 개발 서프보드를 만드는 곳이다. 서프코드를 구성하는 김은섭 대표, 김선홍 디렉터 이외에 또 하나의 축인 황은민 셰이퍼는 자신의 서프보드를 수리하고자 처음 장비를 손에 들었다. 비디오, 책을 통해 연구하는 것으로 모자라 미국과 호주의 서프보드 공장에서 직접 일했으며, 이후에 서프보드 개발에 매달린 시간만 4년이다. 그렇게 2013년에야 ‘블로윈드’라는 자체 개발 브랜드 아래 첫 번째 서프보드를 공개할 수 있었다. 김선홍 디렉터는 말했다. “공개하기 전이나 지금이나 비즈니스 관점에서는 완전히 마이너스인 일이죠. 하지만 서프보드 개발을 멈추면, 저희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될 것 같았어요.”

 

지금의 동인천은 몇 년 전의 을지로에 비견할 수 있다. 구도심으로서 일부 오래된 맛집과 가게는 있지만, 상권이 완전히 죽어 더이상 젊은이들이 찾지 않는 공동화된 공간. 강제로 생긴 그 여유와 저렴한 임대료에 매료된 젊은이들이 모여 있는 지금의 을지로와 같은 번영을 동인천에서도 기대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한 도시의 생기와 활기는 물리적으로 나이가 젊은 사람이 아닌 ‘어떤 젊은이들’로 인해 생긴다. 어떤 젊은이들은 자신에게 없는 단어만을 표현하고자 간절히 노력한다. 그것은 대체로 실패할 것이다. 하지만 그 실패들로 인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한 사람이나 한 기관이 좌우할 수 없는 그곳의 복잡성이 드러날 것이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몹시 복잡하다. 서프코드는 지난 2016년, 트리오 Trio를 벗어나 쿼텟 Quartet이 됐다. 서울에 살면서, 응봉산 정상 서프코드를 제집처럼 드나들던 이종호가 WKND라는 “서퍼들을 위한 코즈메틱 브랜드”를 구상하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서프코드 프로덕트 매니저로 합류했다. 그는 지금 마포구 망원동에 살며 매일 아침 동인천으로 출근하는 중이다. 어떤 젊은이에게, 동인천은 무척 가깝다.

    에디터
    정우영
    포토그래퍼
    강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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