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DITORS LETTER – 4

2018.06.20GQ

이 글을 읽을 때 함께하면 좋을 것.
Irish Whiskey – Jameson Standard
Pure Double Old-Fashioned Glass – Schott Zwiesel

 

이달 <지큐>에 실릴 류이치 사카모토 인터뷰를 미리 읽다가 “평범한 것을 하는 건 너무나 멋진 일이다”라는 대목에서, 멈칫했다. 얼마 전 친구가 사무실로 작은 선물을 보냈다. “편집장 된 지 백일 된 거 축하해. 그건 그렇고 죽을 맛이지” 문자의 끝에는 물음표와 느낌표가 함께 있었다. 죽을 맛이 뭔진 모르겠으나 그것이 쓰고 독한 맛의 극한이라면, 그렇게까진 아니어도 지금 상황이 무척 달콤하진 않다. 에디터 시절과 비교해서 뭐가 달라졌냐고들 묻는다. “마음이 다르죠.” 짧게 답했지만, 그 마음 때문에 모든 게 달라졌다. 단적인 예로, 에디터로 일할 땐 창이 두 개뿐인 집에서 살았다면 요즘은 유리로 만든 집에 사는 기분이다. 봐야 할 것도, 보이는 것도 너무 많다. 힘들 때 어디 마땅히 숨을 데도 없다. 그러느라 좋아하는 평범한 일들을 못한 지 꽤 됐다. 시간은 정해져 있고 처리해야 하는 건 많으니 오늘의 우선순위에서 ‘하고 싶은’ 일은 ‘해야 하는’ 일에 매번 밀린다. 내일의 목록 1번에 넣어보지만, 아침이면 상황은 또 바뀐다. 업무와 상관없는 개인적인 일은 결국 구석에 내팽겨쳐져 먼 곳에서 서로를 위로하며 때를 기다린다. 그래봤자 별것도 아닌 일들. 남산 공원에 앉아서 샤도네이에 아몬드나 좀 먹고, 흐린 오후에 손을 잡고 동물원에 가고, 니나 시몬과 카니예 웨스트를 뒤죽박죽 들으면서 드라이브를 하다 모르는 술집에 들러 위스키를 왕창 마시는 일. 심심해하면서 소파에 누워 스파게티에 안초비를 넣을까 토마토를 넣을까 시시한 토론을 해본 지도 좀 됐다. 크든 작든 계획을 성공할 때 느끼는 카타르시스가 있고, 어떤 경우에도 일이 나를 압도하거나 함몰시키지 못할 거란 자존감도 있지만, 가끔은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흐릿하고 어두운 불안감이 든다. 가령, 점심 저녁으로 약속이 있지만, 정작 보고 싶은 사람에겐 안부만 묻는 날이 쌓일 때(진짜 성공한 삶은 만나야 하는 사람보다 만나고 싶은 사람을 먼저 만나는 삶이다. 틀림없다). 일하기 좋은 날도 그렇지 않은 날도 있지만 어차피 매일 일해야 한다는 걸 깨달을 때. 사회적으로 중요하다고 통용되는 일 중에는 명료하고 정확하고 가치 있는 일보다 애매하고 불투명하며 모순적인 일이 더 많다는 걸 확인할 때. 이런 생각들이 겹치면 문득 불행해진다. 어떻든 불행한 마음은 싫으니까, 나름의 방법을 찾았다. 우선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것을 다 해치우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야 다음 날을 시작할 수 있다. 좋은 소설이 쓰인 과정을 보면, 플룻은 글을 써나가는 동안 천천히 완벽해진다. 그 밖에도 ‘지혜로운 이중생활’이라든가 하는 웃기는 암호명의 비법이 있지만, 굉장한 비밀이라 여기서 밝히진 않겠다. 좋아하는 일은 사정상 자주 못 하더라도 좋아하는 평범한 것들에 둘러싸여 지내는 방법도 괜찮다. 녹색 식물과 아름다운 사진, 음질이 탁월한 스피커, 마음에 드는 향수 시리즈, 심플한 맛의 위스키 몇 병, 크고 작은 검은색 사물들. 사무실을 꾸미는 데 적지 않은 돈을 썼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다. 오늘 소형 냉장고도 하나 들여놨다. 맥주와 샴페인, 오이와 살구로 꽉꽉 채울 생각을 하니 웃음이 배시시 난다. 마음은 늘 어제보다 오늘 ‘조금이라도’ 더 잘하고 싶다. 하지만 방법을 모르겠어서 기분이 어두워질 때, 좋아하는 것들을 보고 듣고 만진다. 최근엔 책을 더 예쁘게 만드는 것에 대해 고민 중이니 밤낮으로 예쁜 걸 많이 보고 싶다. 쉽고 즉각적이고 빠른 채널로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요즘 같은 시절엔 누구에게든 잡지를 꼭 사야 하는 이유가 없다. 사고 싶게 만들려면 잡지는 이제 오브제로서의 매력도 지녀야 한다. 펼치고 싶고 넘기고 싶고 갖고 싶은 물건. 정작 돈은 별로 없으니 아이디어라도 많아야지. 생각을 다듬기 전에 술 한잔 하는 건 아주 효율적인 습관이다. 다만 요즘은 아무리 퍼마셔도 정신이 또렷하다. 한잔만 마셔도 대책 없이 취하는 술 제조법, 당장 필요하다.

    에디터
    강지영
    포토그래퍼
    이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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