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 연애’를 판매하는 직업이기에 아이돌 B군의 연애는 ‘팬 기만’일까? 아이돌 산업의 태생적 어둠, 잔혹한 미디어, 팬덤과 호사가들이 둘러싼 그들의 연애는 공사다망하다.
인기 아이돌 A양과 B군이 사귄다는 소문이 난다. 이때 일어나는 일들은 다음과 같다. 소속사는 “좋은 선후배 사이”라고 발표한다. 그나마 요즘은 “서로 알아가는 단계”라고 한다. 기사 밑에는 A양에 대한 성희롱 댓글이 쏟아진다. 양쪽 팬들은 자신의 아이돌과 상대방을 향해 불을 뿜는다. 알라딘 중고서점을 비롯한 중고시장에는 A와 B의 음반들이 대량으로 풀린다. 특히 광풍을 맞는 것은 B군의 팬덤이다.
사람들은 두 사람의 과거 SNS 사진이나 발언, 무대에서의 사소한 에피소드나 음반 속지의 감사 인사까지 뒤져가며 연애의 증거를 찾으려 한다. 같은 티셔츠를 입은 모습, 별명을 암호처럼 쓴 말 등이 모두 인터넷 법정에 제출된다.(모든 것은 인터넷 언론을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된다.) 퍼즐이 맞아 들어가면, 팬덤은 고소인석에서 분연히 일어나 말한다. “피고소인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연애를 하고 그 증거를 팬들 모르게 은밀한 방식으로 노출해온 바, 팬 기만죄에 해당합니다.”
묘한 것은, 이런 팬들 중 상당수는 평소 아이돌에게 연애감정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해왔다는 점이다. 팬들의 논리는 대체로 정해져 있다. ‘덕질’은 취미 활동이고 유사 연애는 없다.(주위에서 “네 오빠는 너랑 결혼 안 해”라고 지겹게 놀리던 사람들 입에서 나오는 “거 봐라”가 가장 싫은 이도 있을 법하다.) 다만 ‘나’는 아니지만 연애 감정을 느끼는 팬도 있다. 그래서 아이돌의 연애는 팬덤을 붕괴시킨다. 그러므로 연애는 아이돌의 상품성을 떨어뜨리는 일이기에 상도덕 위반이라는 것이다. 또한 연애하는 기간에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팬들을 속이게 되므로 배신 행위가 된다. 연애가 문제가 아니라 팬 기만이 문제라고도 한다. 여기에 혼성 유닛 활동을 한 멤버들인 경우 팬들의 돈을 걷어 연애에 썼다는 비난이 일기도 한다.
사실 팬도 아이돌이 연애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건 늘 알고 있다.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스캔들이 터질 때마다 누군가는 사생팬이나 ‘홈마’들은 다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은 뉴스가 되기 전에는 조용히 묻어둔다는 것이다. 왜냐면 팬덤이 붕괴되고 아이돌의 영업 이익을 저해하니까. 또한 연애 사실을 알면서도 변함없이 좋아하고 위해줄 수 있는 팬의 마음은 필시 연애 감정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리라.
팬들의 삶과 인터넷 논쟁 속에서 가장 효과적인 것으로 검증되어 전수되는 논리들을 굳이 하나씩 논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 논리가 말해주는 건 어쨌든 아이돌은 연애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팬들 각각의 마음을 통제할 순 없으니, 연애가 밝혀지면 팬덤이 풍비박산 나는 건 피할 수 없다. 들키지 않는다는 것도 아이돌 본인의 손에 달린 일이 아니다. 아무리 조심했다 한들, 일단 들키고 나면 ‘네티즌 수사대’가 이 잡듯이 뒤져 오는 그럴싸한 증거들 앞에 평소의 성실성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그러니 아이돌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균실에 들어가 수도하는 것밖에 남지 않는다.
진짜는 허용되지 않지만, 가상이라는 전제로 혼성 ‘케미’가 시도되는 경우도 있다. 연예인 남녀를 짝지어 가상 결혼생활을 하던 MBC의 <우리 결혼했어요>는 팬들의 가장 큰 저주의 대상이 된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6년여 를 방송한 건 이 프로그램을 좋아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의미다. 대중은 선남선녀가 ‘꽁냥’대는 모습을 좋아했고, 아이돌 팬이라도 출연자가 ‘내 아이돌’만 아니면 즐길 만했다. 또한 해외 팬들의 팬픽은 이성애 로맨스도 제법 다룬다. 한 그룹 안의 멤버 둘이 로맨틱한 긴장을 갖는 국내 팬픽 커플링과는 사뭇 다르다. 남녀 아이돌을 엮는 이야기가 드물지 않다. 해외 팬들이 국내에서 종종 미움을 사는 이유이기도 하다. 해외에서는 케이팝을 두루 좋아하는 팬이 많기 때문에 생기는 차이다. 우열을 가릴 일은 아니다. 다만 팬덤의 충성도가 높을수록 연애를 금기시한다는 경향을 확인할 지표가 된다.
잠시 잊고 있던 A양에게 돌아가 보자. A양에게도 영업 이익 저해라는 죄목이 붙기는 하지만, 오히려 팬덤 내 파장은 그렇게까지 크지 않다. 이를테면 <82년생 김지영>을 읽었거나 밸런타인데이에 사형 선고를 받은 독립투사의 얼굴을 모른다는 죄목보다는 말이다. 그러나 ‘순수한 이미지’를 망친다는 우려인지 선고인지 모를 말들과 비호감을 사는 경우도 제법 있다. 연하의 남성 아이돌과 데이트한 사실이 알려진 이후 독한 이미지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B양을 이성애적 감정으로 추종하던 남성 팬들의 충성도라는 게 애초에 낮아서인지, A양에게는 팬덤의 붕괴가 상대적으로 덜하다.
그러면 A양이 받는 타격이 더 적은가? 그렇다고 볼 수 없다. 주위에서 B군의 팬을 놀리는 말이 “거 봐라, 네 오빠는 너랑 결혼 안 해”라면, A양의 팬에게는 “B랑 A랑 잤냐?”다. 대중은 마치 부모의 원수에게 칼을 꽂을 기회를 얻은 양, 성희롱을 퍼붓는다. A양을 ‘얻은’ B군을 ‘승리자’로 묘사하는 이들도 지겹게 등장한다. 연예 매체들의 보도와 함께 대중은 기묘한 축제를 벌인다. 팬들이 저항해보기도 하지만, 분위기에 함께 올라타는 팬들도 있다. 심지어 애정과 투자를 배신당한 자신은 더욱 그럴 자격이 있다는 듯이. B군의 팬덤이 내부에서 아수라장을 겪는다면, A양은 세계를 상대로 지옥도를 겪는다.
최근 한 여성 아이돌은 전 애인으로부터 연인 관계의 사생활이 담긴 자료를 유출하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그는 무방비 상태의 약자였다. 이 사건을 아이돌의 연애라는 주제에 담기는 매우 꺼려진다. 원인은 연애가 아니라 한 남성의 패악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애정 관계와 관련해 여성 아이돌이 어디까지 약자일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그 배경엔 여성 아이돌에 대한 대중의 강박에 가까운 기대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아이돌의 연애가 알려지는 순간은, 아이돌 산업의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B군의 팬들은 연애에 대한 환상과 대리만족으로 “아이돌이나 쫓아다닌다”는 편견 앞에 “유사연애가 아니다”라고 항변해왔다. 이제는 “나는 아니지만 누군가는” 같은 궁색한 논거를 덧붙여야 한다. 결국 아이돌과 유사 연애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재능과 노력을 갈고닦으며 전문적인 예인으로 성장해온 A양은 순식간에 몸뚱아리가 되어버린다. 지금껏 그가(그나마) 보호된 건 손댈 수 없는 욕망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 역시 연애를 할 수 있는, 즉 누군가는 ‘손댈’ 수 있는 ‘여자’라는 당연한 사실이 선언되면, 대중은 ‘이때다’ 하고 그를 더럽히려 한다. 아이돌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연애 감정과 욕망이 뒤섞인 성적 대상이고, 우리는 평소 이를 부인해왔을 뿐이라는 것이다. 어느 기획사 대표는 자사의 남매 듀오에게 연애에 관해 이렇게 충고했다고 한다. 작곡을 하는 남성 멤버에게는 “곡을 쓰려면 연애를 해라”, 아이돌적 매력이 있는 여성 멤버에게는 “넌 연애하지 마라”라고.
아이돌의 연애는 수라의 길이다. 누구도 원치 않고, 무엇도 도와주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 아이돌이 연애해선 안 될 이유는 없는 게 아닐까? 열애설이 터질 때마다 붕괴하기는 해도, 평소에는 유사 연애마저 부인할 수 있다면 말이다. 스캔들에서 파생되는 온갖 난관은 따지고 보면 결과론적인 것들이다. 그 길을 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수는 있어도 ‘잘못된 일’일 수는 없다.
펄펄 뛰는 팬들을 비웃기는 쉽다. 실은 아이돌 팬들마저 남의 아이돌이 연애한다고 하면 입에 팝콘을 물고 즐겁게 감상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아이돌 산업의 어두운 특성과 대중 미디어의 잔혹성은 무시하고 팬심을 조롱하는 게 먼저라면 그것도 썩 좋은 태도는 아니다. 여성 아이돌의 불법 촬영물 협박 피해 사건이 나자 굳이 그 아이돌의 팬 게시판에 가서 성희롱 글을 쓰며 팬들을 자극하려는 사람들이 만연한 세상이니 말이다.
좀처럼 행복해질 수 없는 아이돌의 연애. 나는 요즘 평행우주의 케이팝을 상상하는 일을 즐긴다. 몇 가지 환경이 달라진다면 우리에겐 훨씬 나은 케이팝이 있을 것이라는 상상이다. 어느 평행우주에선가는 행복한 연애를 하는 아이돌들도 있을 것이다. 초창기 빅스의 곡 중에 ‘아이돌 하기 싫어’라는 노래가 있다. “남들 다 하는 누가 봐도 평범한 일들, 우리에겐 어려운 일인걸.” 물론 팬의 유사 연애 감정을 노린 노래다. 글 / 미묘(<아이돌로지>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