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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HH 2019에서 만난 호사스러운 시계

2019.03.24GQ

SIHH 2019 신제품이 도착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호사스러운 제품만 모았다.

SIHH 2019는 화제의 연속이었다. 가장 큰 이슈는 하이엔드 시계의 원투 펀치인 리처드 밀과 오데마 피게의 고별전이었다. 이번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SIHH에 나오지 않는 그들은 작정한 듯 새롭고 독특한 컬렉션으로, 밝은 작별을 고했다. 바쉐론 콘스탄틴과 예거 르쿨트르처럼 한동안 엔트리급 모델에 주력했던 브랜드에서 올해는 자사의 기술력을 과시하는 모델을 출시한 점도 눈에 띄는 변화였다. 부스 안에 스핏파이어 전투기를 전시한 IWC와 단 한 점 제작한 14억원에 달하는 시계가 오픈과 동시에 팔린 로저드뷔는 페어 기간 내내 많은 주목을 받았다.

파일럿 워치 타임존 스핏파이어 ‘더 롱기스트 플라잇’ 에디션.

파일럿 워치 크로노그래프 스핏파이어.

빅 파일럿 워치 퍼페추얼 캘린더 스핏파이어.

파일럿 워치 UTC 스핏파이어 ‘MJ271’ 에디션.

IWC
올해 IWC의 대표작은 파일럿 워치인 ‘스핏파이어 컬렉션’이다. 스핏파이어는 영국의 전설적인 전투기로, <덩케르크>에 톰 하디가 타고 나와 더 유명해졌다. IWC는 검은색, 올리브색, 은색, 갈색으로 구성된 스핏파이어 조정석의 색을 시계에 살뜰하게 옮겨놓았다. 군용 장비의 느낌을 내기 위해 브론즈 케이스를 대거 사용했고, 파일럿 워치의 전통에 따라 대부분의 모델 내부에 연철 케이스를 둘러 항자기성을 높였다. 또한 ‘파일럿 워치 타임존 스핏파이어 더 롱기스트 플라잇 에디션’의 뒷면엔 아예 스핏파이어를 새겨 넣었다. 컬렉션의 모든 모델에 82760, 52615 같은 자체 제작 칼리버를 넣은 것만 봐도 IWC에서 얼마나 애지중지하는 컬렉션인지 알 수 있다. 퍼페추얼 캘린더, 월드 타임, 문페이즈 같은 다채로운 기능을 조합한 것도 인상적이다.

트래디셔널 트윈 비트 퍼페추얼 캘린더의 뒷면.

트래디셔널 트윈 비트 퍼페추얼 캘린더.

Vacheron Constantin
시계의 이름을 짓는 건 의외로 심플하다. 예를 들어 이름에 ‘투르비옹’이나 ‘미닛 리피터’ 같은 단어가 있다면 실제로 그 기능을 갖췄다는 뜻이다. 바쉐론 콘스탄틴이 SIHH 2019에서 자랑스럽게 꺼내든 제품의 이름은 ‘트래디셔널 트윈 비트 퍼페추얼 캘린더’다. 먼저 ‘트래디셔널’은 자사의 컬렉션명이고, ‘퍼페추얼 캘린더’는 윤년까지 계산해 날짜를 표기하는 기능이다. 의미심장한 것은 ‘트윈 비트’다. 대부분의 시계는 이스케이프 휠과 팔렛 포크가 하나씩이다. 당연히 진동수도 일정하다. 이 제품에 트윈 비트라는 이름을 단 것은 이스케이프 휠과 팔렛 포크를 두 개씩 달아 진동수를 조절할 수 있어서다. 즉, 시간당 36,000회(5Hz) 진동하게 할 수도, 시간당 8,640회(1.2Hz)로 진동수를 떨어뜨릴 수도 있다. 전자는 하이 비트고, 후자는 손목시계에서 보기 힘든 로 비트다. 바쉐론 콘스탄틴은 왜 가변 비트를 사용했을까? 하이 비트를 활용하면 초침이 유영하듯 움직인다. 반면 로 비트에서는 동력을 아낄 수 있다. 실제로 이 시계는 ‘스탠바이 모드’라고 칭한 로 비트로 전환 시 최대 65일까지 파워 리저브가 늘어난다. 시중에 6.5일 이상인 파워 리저브 시계도 흔치 않은 걸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수치다. 게다가 이 시계는 복잡한 컴플리케이션인 퍼페추얼 캘린더 기능까지 갖추고도 케이스 직경이 42밀리미터, 두께가 12.3밀리미터에 불과하다. 시계 선택에서 기술보다 브랜드 이미지가 더 중요한 시대지만, 이미지를 만드는 데 기술만큼 좋은 건 없다. 바쉐론 콘스탄틴은 이 명제를 다시 한번 증명했다.

엑스칼리버 우라칸.

Roger Dubuis
람보르기니의 하이퍼 카를 부스 앞에 전시한 로저드뷔는 개연성 있게도 람보르기니와 협업한 모델을 쏟아냈다. 시계 메이커가 어떻게 완성차 업체와 협업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면, ‘엑스칼리버 우라칸’을 보면 이해가 쉽다. 시계에 탑재한 RD630 칼리버의 브리지는 우라칸 V10 엔진 스트럿바에서 착안했으며, 시계 뒷면의 로터 역시 우라칸의 휠 디자인을 차용했다. 또 다이얼의 오픈워크 형태도 우라칸의 공기 흡입구에서 따온 것이다. 둘 다 매우 가볍고, 직선적인 그래픽으로 날렵하고 강인한 이미지를 풍긴다. 금속을 벼린 듯한 람보르기니의 물성을 좋아한다면 이 시계를 외면하기도, 잊기도 쉽지 않다. 케이스는 45밀리미터, 파워 리저브는 60시간.

마스터 그랑 트래디션 자이로투르비옹 웨스트민스터 퍼페추얼.

Jaeger-Lecoultre
작년에 예거 르쿨트르는 폴라리스 컬렉션에 유독 집중했다. 1968년 모델을 복각한 이 컬렉션은 말쑥한 얼굴과 단출한 기능으로 대중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래서인지 올해 예거 르쿨트르는 자사 골수팬의 심금을 울리는 모델을 출시했다. 바로 ‘마스터 그랑 트래디션 자이로투르비옹 웨스트민스터 퍼페추얼’이라는 하이 컴플리케이션 모델이다. 일단 이름에서 자이로투르비옹과 웨스트민스터 기능을 모두 갖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도 제대로 구현하기 어려운 기능 둘을 그리 크지도 않은 43밀리미터 케이스에 넣기 위해, 다축으로 구성된 투르비옹의 크기를 혁신적으로 줄였다. 게다가 퍼페추얼 캘린더 기능까지 갖췄으니, 그야말로 극한의 기술 집약적 모델이다. 이 모델 하나만으로도 예거 르쿨트르의 수준과 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

섭머저블 마리나 밀리타레 카보테크 리미티드 에디션.

섭머저블 마리나 밀리타레 카보테크 리미티드 에디션.

섭머저블 마리나 밀리타레 카보테크 리미티드 에디션.

섭머저블 마리나 밀리타레 카보테크 리미티드 에디션.

Panerai
파네라이는 올해 브랜드의 적통인 다이버 워치 라인을 더욱 강화한다. 다이버 워치의 핵심은 내구성이다. 방수 성능을 넘어 전체적인 경도와 내부식성이 뛰어나야 한다. 그래서 파네라이는 ‘섭머저블 마리나 밀리타레 카보테크’의 케이스에 카보테크를 활용했다. 얇은 탄소섬유를 활용한 이 소재는 티타늄보다 가볍고, 그만큼 내부식성이 뛰어나며, 스테인리스 스틸보다 단단하다. 이 야무진 케이스 안에는 자사 제작 무브먼트인 P.9010 칼리버를 탑재한다. 이 칼리버에는 두 개의 배럴을 장착해 72시간의 파워 리저브가 가능하며, ‘잉카블록’이라는 충격 방지 장치까지 달았다. 파네라이가 다이버 워치의 상징인 건 ‘이탈리아 해군이 사용한 시계’라는 역사적인 뿌리가 있어서다. 만약 섭머저블 마리나 밀리타레 카보테크 한정판 모델(PAM00961)을 산다면, 이 뿌리를 맛볼 수 있다. 파네라이가 이 모델을 소유한 이들에게 이탈리아 해군 특수부대인 ‘콤수빈(Comsubin)’ 훈련 세션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서다. 딱 33점만 한정 생산하니, 이 시계를 구하는 것 자체가 전쟁이겠지만.

RM 07-03 컵케이크.

RM 37-01 키위.

Richard Mille
농담과 장난이 그저 그런 우스개가 될지, 의미를 지닐지는 ‘누가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 올해를 마지막으로 SIHH를 떠나는 리처드 밀은 과일과 군것질에서 힌트를 얻은 ‘봉봉 컬렉션’을 들고 나왔다. 떠나는 아이에게 막대 사탕을 쥐어주듯 어느 때보다 밝은 제품으로 작별 인사를 건넨 것이다. 마치 농담 같은 컬렉션이지만, 우습지 않은 건 리처드 밀의 기술력 때문이다. 일례로 ‘RM 07-03 컵케이크’의 달콤해 보이는 다이얼은 티타늄에 에나멜을 입힌 후(화이트 골드도 사용했다),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와 차보라이트로 장식한 것이다. 일견 플라스틱처럼 보이는 케이스 역시 열전도율이 매우 낮고, 상처가 쉽게 나지 않는 가공 지르코늄으로 만들었다.

코드 11.59 퍼페추얼 캘린더.

Audemars Piguet
오데마 피게도 올해를 마지막으로 SIHH를 떠난다. 그리고 배웅 인사로 새로운 컬렉션인 CODE 11.59를 발표했다. 여기서 ‘11.59’는 내일을 맞기 직전의 시간을 의미한다. 이 컬렉션이 브랜드의 기도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실제로 이 컬렉션엔 두 종류의 자존심이 걸려 있다. 로열 오크와 로열 오크 오프쇼어 이외의 마땅한 히트작이 없는 오데마 피게의 새로운 인기작이 될 것인지, 브랜드의 CEO인 프랑수아 앙리 베나미아스가 처음부터 지휘한 컬렉션으로서의 명분이 충분한지. 이 자존심에 의욕이 더해져 시계의 다양한 곳에 투영됐다. 먼저 디자인이다. 로열 오크에서 따온 8각형 케이스를 토대로 러그를 교각처럼 설계해 조형미를 높였다. 게다가 베젤의 폭을 극도로 얇게 만들어 다이얼이 시원시원해 보인다. 그다음은 기술이다. 모델별로 4302, 4401처럼 새로 개발한 무브먼트를 대거 활용했다. 마지막은 라인업이다. 셀프와인딩, 퍼페추얼 캘린더, 셀프와인딩 플라잉 투르비옹 등 다양한 모델을 다채로운 색감으로 출시한다.

알티플라노 운석 다이얼.

Piaget
피아제는 이번 SIHH에서 기존 라인업을 더 아름답게 채색하는 방법을 택했다. 대표적인 것이 운석 다이얼을 사용한 알티플라노 컬렉션이다. 얼핏 돌은 단단할 거 같지만, 얇게 갈고 깎다 보면 쉬이 깨져 다루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게다가 완제품의 내구성도 담보되어야 하기에, 어지간한 브랜드는 엄두도 내지 않는 소재다. 피아제는 돌 중에서도 낭만적인 ‘운석’을 찾아 다이얼에 활용했다. 주얼리 명가다운 재기다. 그 덕에 다이얼에서 독특하고 비전형적인 문양을 감상할 수 있다. 패턴 자체가 호사스러운 만큼 다른 요소는 최소화했고, 돌 자체가 귀한 만큼 격을 맞춰 케이스에도 18K 핑크 골드를 활용했다. 금색 다이얼은 50점, 회색 다이얼은 300점 한정 생산한다.

아쏘 레흐 드 라 룬 블루 다이얼.

Hermès
에르메스는 ‘여행’, ‘꿈’, ‘동심’ 같은 비물질을 이미지로 구현해내는 브랜드다. 이것이 패션뿐 아니라, 진입 장벽이 높은 고급 시계 시장에도 안정적으로 진입한 비결이다. 그래서 올해 선보인 ‘아쏘 레흐 드 라 룬’은 지극히 에르메스스럽다. 일반적인 문페이즈 워치는 다이얼 한쪽에 달을 그린 디스크를 배치하고, 이 디스크를 회전하는 방식을 쓴다. 반면 이 시계는 북반구와 남반구에 고정된 달을 두 개의 서브 다이얼이 공전하며 달의 위상을 만든다. 여기까지가 낭만적 상상력이라면, 그다음은 장인이 나서 만들고 채색할 차례. 이를 위해 화이트 골드 케이스 안으로 사금석 우주를 펼치고, 자개로 빚은 달을 띄웠다. 운석으로 만든 회색 다이얼 버전도 있다. 다이얼 디스크가 회전하며 기울어지지 않고 언제나 수평을 유지하는 설계도 놀랍다.

헤리티지 퍼페추얼 캘린더 리미티드 에디션 100.

헤리티지 GMT.

헤리티지 펄소그래프 리미티드 에디션 100.

Montblanc
몽블랑은 만년필, 가죽 서류 가방, 커프링크스처럼 고상한 남자 물건을 만드는데, 확장성이 가장 큰 분야는 역시 시계다. 이를 모르지 않는 몽블랑은 점점 복잡다단한 시계를 내놓고 있다. ‘스타 레거시 메타모포시스 리미티드 에디션 8’ 같은 모델은 몽블랑이 하이 컴플리케이션 워치도 얼마나 능숙하게 만들 수 있는지 보여주는 걸작이다. 반면 ‘헤리티지 퍼페추얼 캘린더 리미티드 에디션 100’은 고기능인 동시에 현실적이다. 윤년까지 따박따박 계산해가며 날짜를 표기하는 데다, 듀얼 타임 기능과 24시간 인디케이터도 갖췄다. 게다가 별도의 레버 없이 크라운만으로 시계를 세팅할 수 있어 한결 편리하다. 요소가 많음에도 다이얼 정리가 잘돼 있고, 과거에 사용하던 로고를 포함해 빈티지한 디테일도 많다. 만약 장식이 많아 부담스럽다면 ‘헤리티지 펄소그래프 리미티드 에디션 100’처럼 요소가 적고, 예스러운 모델도 있다. 연어색 돔 다이얼 위에 의사가 맥박을 잴 때 사용하던 펄소미터 눈금을, 그것도 창백한 푸른색을 사용해 둘렀다. 시계 뒷면에서는 자사 제작 모노푸셔 크로노그래프인 칼리버 MB M13.21의 우아한 레이아웃과 세공을 감상할 수 있다.

    에디터
    임건
    사진
    Courtesy of IWC, Vacheron Constantin, Roger Dubuis, Jaeger-Lecoultre, Panerai, Richard Mille, Audemars Piguet, Piaget, Hermés, Montbla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