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이별 장소 | 지큐 코리아 (GQ Korea)

최악의 이별 장소

2019-04-12T09:19:14+09:00 |relationship|

‘설마 내가 여기서 차일 줄이야’ 싶었던 최악의 이별 장소.

이 꼴인데?
땀이 유독 많아 늦 봄부터 서서히 ‘겨터파크’를 개장하는 슬픈 체질의 소유자다. 요즈음 한국의 여름은 나를 더욱 더 슬프게 한다. 집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샤워는 무용지물, 땀 닦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다. 지난 여름은 연일 폭염주의보가 울리던 무지막지한 더위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정수리에서 땀샘이 터져 카페로 급히 대피, 에어컨으로 달려가 냅킨으로 온 몸의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그런 내꼴을 알 수 없는 눈길로 바라보던 그가 “우리 그만 만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에어컨에 매미처럼 붙어있던 나는 바람을 쐬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윤은정(공연기획자)

왜 꼭 여기서?
원래 맛집 같은 것에 무감한 편이다. 요리 잘 하니까 식당 차렸겠지, 라는 순진한 생각으로 대체로 맛있게 먹는다. 하지만 그 집은 달랐다. 내 미각이 그 음식점으로부터 발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기 도는 흰 쌀밥에 정갈한 밑반찬, 자극적이지 않은 한식의 향연. 그래서 우리는 그 집을 꽤나 자주 갔다. 사장님이 서비스로 생선을 구워주실 때쯤 신나게 밥을 퍼먹던 내게 그녀가 작별을 고했다. 아마 내 눈물을 사장님이 봤을 거고, 난 그녀도 잃고 맛집도 잃었다.
김선호(회사원)

얘네들 앞에서?
제일 친한 친구는 내가 애인이 생기길 간절히 바랐다. 넷이 함께 여행을 가는 아름다운 그림도 그렸다. 그래서 내가 남자친구를 사귀자마자 계속 커플 모임을 졸라댔다. 결국 넷이서 떠나게 된 강원도 여행에서 우리는 사사건건 언쟁을 했다. 친구 커플은 냉랭해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두 사람이 보는 앞에서 헤어졌다. 친구 남자친구 차를 얻어타고 집으로 가는 길은 서글픈 동시에 불덩이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안수지(온라인 마케터)

화장실은 어떻게?
부푼 마음으로 함께 떠난 휴가. 몸도 마음도 푹 쉬고 싶어서 조금 멀리 휴양지를 가기로 했다. 비용 좀 아껴보겠다고 일찌감치 예약해서 디데이만 기다리던 그 시절. 다들 예상했겠지만 아침에 눈 뜰때부터 싸움을 시작됐고 너무 지친 우리는 합의 하에 헤어지기로 했다. 문제는 돌아가는 비행기 좌석이 나란히 지정되어 있었던 것. 말없이 앉아있다 자는척 하는 것만으로도 고역인데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자는 그녀를 깨울 때는 정말이지 비행기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조진우(브랜드 매니저)

사람들 이렇게 많은데?
밀린 쇼핑을 하기 위해 만난 주말. 평소에도 “5분만” “10분만”이라는 메시지만 남긴채 하염없이 기다리게 하는 그 태도가 거슬렸다. 그날도 어김없이 늦게 도착하고 본인 옷부터 보러 가려는 당당한 태도가 참 싫었다. 결국 우리는 사람들로 미어 터지는 쇼핑몰 한 가운데 스파 브랜드 매장 앞에서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모두에게 재미난 구경거리를 선사한 채 이별을 맞이했다.
최유석(그래픽디자이너)

하산한다고?
맨날 만나서 먹기만 하니까, 함께 체력 단련을 할 겸 쉬는 날 종종 산을 탔다. 산을 올라가면서 시작된 말다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우리는 다른 등산객들을 피해 정자에서도 싸우고 다시 돌계단 쪽으로 가서도 싸웠다. 그만하자는 그에게 “아니, 난 아직 얘기 안 끝났어!”라고 쏘아붙였다. 그는 나를 내버려두고 말 없이 산을 올라갔고 나는 내려갔다. 먼저 급하게 내려간다고 갔는데 자꾸만 그를 마주칠 때의 민망함이란. 그를 본 것도 아니고 안 본 것도 아닌 시선으로 하산할 수 밖에 없었다.
임선영(회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