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맞아도 너무 안 맞는 사람과의 여행은 괴롭기 짝이 없다. 둘이 갔다 혼자가 되어 돌아와도 할 말이 없는 최악의 여행 파트너는?
계획형 vs 무계획형
나는 여행을 떠나기 전 관련 여행 책자 2권을 구입한다. 하나는 예습을 위해, 또 하나는 여행지에서 휴대하기 위해. 반드시 가봐야할 곳을 추려서 구글맵에 찍어보고, 출발 지점과 끝나는 지점을 동선별로 정리한다. 1일 차에는 숙소 인근을 돌며 현지 분위기를 익히고, 2일 차 때부터 조금씩 멀리 돌아다니다 마지막 날 스파로 편안하게 마무리하는 일정. 엑셀과 PDF로 여행 일정을 공유하며 느끼는 이 뿌듯함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건 생각해본 적도 없다. ‘무작정 떠나 우연의 기쁨을 누리자’던 그가 정말로 아무 준비도 안할 줄은 몰랐다. 항공권과 숙소만 겨우 예약하고, 도착하자마자 드러누워 낮잠부터 청하는 그를 보며 간만에 뜨거운 분노를 느꼈다. 저녁까지 할일없이 빈둥대는 모습 앞에서 천년의 사랑도 식어버릴 것만 같았다.
최서희(UI 디자이너)
관광객 형 vs 동네 주민형
하루에 유명 관광지 10군데 찍고 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과 숙소 근처 카페에서 사진만 찍어도 만족스러운 사람. 내가 전자였고 그녀는 후자였다. 어쩐지 여행 캐리어에 하늘하늘한 원피스, 예쁘지만 불편해보이는 샌들 밖에 없더라니. 나는 아침 일찍부터 사원을 갔다가 계곡도 들러 수영하고, 일몰이 멋지다는 산 정상까지 하이킹도 할 생각이었는데, 그녀는 움직일 생각이 없어보였다. 밀짚 모자에 책 한 권을 들고 근처 카페에서 ‘카톡 프사용 사진’을 몇 컷 찍더니 와이파이가 빵빵한 숙소에 들어가고 싶어했다. 이럴거면 이 먼 곳까지 대체 왜 온 거지? 그냥 동네에서 놀면 되잖아. 나의 투덜거림에 그녀는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 라고 답했다. 아, 정말 안맞아.
박홍일(웹디자이너)
대중형 vs 힙스터형
상하이를 갔는데 동방명주를 안 보고 온다고? 도쿄를 갔는데 도쿄 타워를 오르지 않는다고? 나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것, 남들 다 가보는 것은 꼭 둘러봐야 한다는 믿음이 있다. 반면 당시 여자친구는 ‘남들이 가보지 않은 곳’ ‘남들이 잘 모르는 곳’ ‘힙스터 로컬들만 아는 곳’을 원했다. 인스타그램을 열심히 디깅하고, 그 지역에 유학가 있는 친구들을 수소문해 지하에 책장 같이 생긴 비밀 문을 열고 들어가야하는 술집, 흰 티셔츠만 파는 옷 가게 같은 특이한 것들만 잔뜩 찾아왔다. 나의 이 여행 철학을 마치 ‘음원 차트 TOP 100’만 듣는 취향 없는 무지렁이로 취급해 기분이 확 상했다. 나도 ‘힙찔이’ 싫거든?
김기범(회사원)
아침형 vs 저녁형
평소 ‘잠은 죽어서도 영원히 잘 수 있다’라는 주의다. 즉, 여행지에서는 부지런히 움직여 하나라도 더 봐야한단 것이 나의 지론이다. 그래서 어딜 가든 새벽부터 움직여야 만족스럽다. 밤 10시쯤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에 몸을 뉘일 때의 그 행복한 피곤함. 난 그걸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줄 알았다. 반면 그는 여행은 일상으로부터의 휴가이며, 진정한 휴가는 늦잠에서 시작한다고 부르짖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여행 일정은 항상 해질 무렵부터 시작한다. 처음 하루 정도는 맞춰보려고 노력했지만, 아들이랑 여행하는 것도 아니고 잠투정을 받아줘가며 함께 돌아다닌 것이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결국 둘째 날부터 따로 다니기 시작해 결국 각자의 혼행을 즐기고 귀국했다.
장혜영(브랜드 마케터)
패션왕 vs 기념품왕
요즘이야 해외 직구니 편집숍이니, 너무 많아서 굳이 외국을 나가지 않아도 손 쉽게 아이템을 구할 수 있는거 나도 안다. 그렇지만 또 그 나라, 그 도시의 숍을 직접 가서 만져보고 입어보고 사는 경험은 그 자체로 소중한거다. 그래서 해외 여행을 갈 때면 새로 생긴 편집숍이나 브랜드 매장을 꼭 검색해 놓는 편이다. 이게 서로 취향이 맞으면 참 즐거운데, 상대가 옷에 관심이 없으면 너무 괴로워진다. 당시 만나던 여자친구는 패션엔 일체 관심이 없고 시장 구경을 하거나 마그넷 같은 현지 기념품 사는 것에만 몰두했다. 그러다보니 함께 다니기엔 동선도 복잡해지고, 같이 다녀봤자 한 사람은 스마트폰만 하거나 하품을 하게 되는 거다. 서로 가까워지려고 떠난 여행에서 천 킬로미터쯤 떨어진 마음의 거리만 확인한채 돌아왔다.
황호진(영화 프로듀서)
현지 음식 vs 먹던 음식
그 나라에 가면 그 나라 음식을 먹어야 한다. 백종원도 현지 로컬 푸드 트립 떠나고 막 그러지 않던가. 진정한 미식가라면 편견과 두려움 없이 새로운 음식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하는 거다. 하지만 여행을 함께 떠난 여자친구는 전형적인 ‘초딩 입맛’의 소유자란 것이 큰 함정이었다. 매운 거 못 먹고, 고기 냄새를 못 견디고, 날 생선의 식감을 무서워하는 그녀 덕분에 갈 수 있는 식당의 종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아니 미식의 도시 방콕에서 왜 파스타를 먹어야 할까? 그거 엊그제도 먹었던 것 같은데. 피시소스 냄새만 맡아도 기겁을 하는 그녀 앞에서 ‘입맛 궁합’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됐다.
조승기(콘텐츠 디렉터)
- 에디터
- 글/ 서동현(프리랜스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