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판 승부처에서 뒷심 부족은 결국 발목을 잡는다. 드라마도 다르지 않다. <눈이 부시게>의 피날레를 보면서, <왕좌의 게임>의 마지막 시즌을 고대하면서 드라마의 뒷심을 떠올렸다.
“‘용두사망’이네.” 홍콩영화 제목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용두사미라는 말도 아까운 드라마에 시청자들이 내리는 사망 선고다. 흥미롭게도 이 표현은 호평받았던 작품에 주로 붙는다. 믿었던 도끼에 찍히는 발등이, 지나가는 도끼에 찍히는 것보다 아픈 법이니까. 이러한 예는 멀리 있지 않다.
올 초를 뜨겁게 달군 <SKY 캐슬>은 매회 엔딩이 기막힌 드라마였다. “헉!”, “대박!” 드라마를 즐겨 보지 않는 우리 집 남자들도 <SKY 캐슬>만큼은 본방을 사수해가며 마지막 장면에서 늘 이런 추임새를 넣곤 했다. 특히 캐슬의 유일한 이방인이던 혜나(김보라)가 발코니에서 뚝 소리를 내며 추락하는 14회 엔딩은 히치콕도 울고 갈 서스펜스였다. OST “We all lie~”는 화룡점정. 그랬던 <SKY 캐슬>의 진짜 최종회는 매회 엔딩에 열광하며 전적으로 작가를 믿었던 팬들을 향한 일종의 배신이었다.
<SKY 캐슬>은 19회까지 자녀를 피라미드 꼭대기에 앉히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대한민국 상류층의 사교육 세계를 집요하게 포착하며 환호 받았다. 고3 수험생을 둔 욕망 엄마 한서진(염정아)의 비뚤어진 교육관에 침을 뱉으면서도, 우린 한서진과 얼마나 다른지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극단적인 동시에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저마다 기이하게 비틀어진 캐릭터들은 캐슬의 파국을 예고하는 듯 가열차게 달렸다.
그러나 마지막 회에 이르자 이 모든 욕망이 분주하게 철수하고, 서로를 향해 모진 말을 하던 캐릭터들은 누가 누가 더 덕담을 잘하나 경쟁이라도 한 듯 개과천선해버렸다. 드라마에서 변화를 겪는 인물 한두 명쯤 나오기 마련이지만, 그런 인물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심리 변화의 개연성도 희미했다. 수염 하나 깎은 후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구는 강준상(정준호)이 점 하나 찍고 다른 사람으로 부활한 <아내의 유혹> 구은재(장서희)와 다를 게 무엇인가. 모든 비극의 근원을 어머니 윤 여사(정애리) 탓으로 떠넘기는 논리는 또 어떻고. 무엇보다 고약한 건, 이들이 흘리는 참회의 눈물이 그들 자신에게 하사하는 셀프 용서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가 방백으로 흐르는 디즈니식 엔딩 앞에서 <SKY 캐슬>은 그때까지 자신들이 딛고 서 있던 세계관 자체를 외면해버렸다.
‘용두사망’ 드라마의 평균점수를 끌어올린 또 다른 작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한국 드라마 역사에 남을 수 있었다. 소재가 신선했다. 상상력이 풍부했다. 매회 궁금증을 흘리는 솜씨도 탁월했다. 결말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믿었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마지막 회는 과도한 PPL이 작품을 먹어버린 사례다. 극의 주소재였던 AR(증강현실) 게임 속에서 유명 브랜드 샌드위치가 생명력을 올려주는 아이템으로 쓰였다. 이온음료는 체력을 채워주는 생명수로 묘사됐다. 제작진은 “게임 아이템을 이렇게 버무려내다니. PPL의 신세계를 개척한 우린 천재!”라는 식의 말을 했다는데, 결과적으로 망언이 됐다. 이건 잘 쓰인 PPL이 아니라 드라마를 광고로 착각한 일종의 버그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놓고 CF를 찍을 수가.
물론 이 드라마의 진짜 문제는 PPL이 아니다. 드라마가 응당 갖춰야 할, 최소한의 논리조차 획득하지 못한 게 결정적 패착이다. 이 드라마엔 던져만 놓고 회수하지 않은 떡밥이 너무 많았다. 무엇보다, 이 엔딩은 무례했다. 작가는 모든 문제를 ‘버그’라는 이름으로 퉁쳐버렸는데 인과율에서 너무 과하게 벗어난 것 아닌가. 보는 이의 호기심을 부추기는 떡밥은 해명해낼 자신이 없다면 애초에 던지지 않는 게 이롭다. “미친 사람에게도 논리가 있고 미친 세상에도 법칙이 있어”라고 말한 유진우(현빈)의 대사는 논리도 법칙도 없는 엔딩 앞에서 힘을 잃었다.
뱀의 꼬리로 끝나는 한국 드라마의 엔딩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방영 당시 큰 사랑을 받았던 <파리의 연인>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소환되는 건 “모든 건 주인공이 쓴 픽션이었다”라고 우겼던 허탈한 엔딩이다. 장점은 빠지고 논란만 남았다. 두 주인공을 교통사고로 죽인 <지붕 뚫고 하이킥>의 엔딩은 각종 대중문화 패러디로 쓰이면서 지금도 고통받는 중이다. 아마 앞으로도 고통받을 것이다. 잘못 쓴 엔딩 하나가 이토록 강렬한 것이다.
혹자는 한국 드라마의 ‘뒷심 부족’을 사전 제작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드라마 제작 풍토에서 찾는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분명 사전 제작 시스템은 촬영과 방영이 거의 실시간으로 이뤄지는 비이상적인 드라마 환경에서 모두가 꿈꾸는 낙원이긴 하다. 방송 사고가 터지거나, 엔딩이 산으로 가거나, 쪽대본의 폐해가 지적될 때마다 사전 제작 시스템 도입이 거론되곤 했다. 그러나 사전 제작 시스템은 정작 도입이 활발해지면서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드러냈다. 톱스타들을 내세운 100퍼센트 사전 제작 드라마 <함부로 애틋하게>, <달의 연인-보보심경 려>, <사임당 빛의 일기>의 몰락 앞에 이 시스템이 높은 완성도를 확보해주리란 믿음과도 같은 신앙이 흔들린 것이다. 시청자 눈치 보다가 엔딩이 이상하게 흘렀다는 기존의 변명들은, 사전 제작 도입 후 시청자 의견을 반영하지 못한 탓에 탄력적이지 못한 엔딩이 나왔다는 변명으로 뒤바뀌었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건 올 상반기 방영 예정인 시즌제 드라마 <아스달 연대기>와 한발 앞서 방영된 <킹덤>이 한국 드라마 내러티브에 끼칠 영향이다. 이미 많은 드라마가 시즌제를 운용 중이지만 기획 단계에서부터 시즌제를 표방한 사례는 드물다. 시즌제 드라마의 특징은 연속성이다. 다음 시즌을 염두에 둔 전략적 엔딩이 나오기 마련이다. <킹덤> 시즌 1의 엔딩을 기억하는가. 긴장이 부풀어 오른 절정의 상황에서 얄짤없이 이야기를 끊어낸 충격이란. 전문 용어로 ‘클리프행어’라 불리는 이 기법은 시청자를 붙잡아두기 위한 일종의 묘약이다. 시즌제가 정착된 미국 드라마에서 흔히 쓰는 전법이다. <엑스파일>, <로스트> 등이 이 분야 거성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미스터리가 증폭될수록 최종 엔딩에 대한 부담은 커진다. 구멍난 설정의 빈틈을 메우고, 흘린 조각을 꿰맞춘 후, 짜릿한 쾌감 혹은 감동까지 주기란 쉽지 않다. 마침 HBO 인기 드라마 <왕좌의 게임>이 마지막 시즌을 앞두고 있다. 9년간, 일곱 번의 시즌이 끝날 때마다 다양한 떡밥과 복선을 남기며 시청자들을 강태공처럼 낚았던 드라마다. 이제 진짜 엔딩이 무엇인지를 보여줘야 한다. 그 명성에 걸맞은 피날레를 보여줄까. 다시 겨울은 오지 않을 텐데.
그렇다면 좋은 엔딩은 어떻게 나오는가. 작품의 성패를 가르는 건, 결국 만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확실한 비전을 가지고 있느냐다. 이를 증명해 보인 최근의 사례가 <눈이 부시게>다. <눈이 부시게>는 25세 혜자(한지민)가 어느 날 갑자가 70대 노인(김혜자)의 모습으로 바뀌는 타입슬립 소재로 10회를 내달렸다. 그리고 10회 엔딩에 등장한 혜자의 고백. “나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습니다.” 이는 그제껏 쌓아온 플롯의 방향과 텐션을 일거에 틀어버린 반전이었다. ‘도박’인 줄 알았던 이 반전은 그러나 ‘빅픽처’였음을 드라마는 남은 2회차를 통해 증명해 보였다. 모든 에피소드가 치매 환자 혜자의 머릿속에서 펼쳐진 환각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노년의 삶을 ‘측면’에서 바라봤던 <눈이 부시게>는 의미를 확장해 노년을 ‘정면’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이야기 설계가 치밀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전개다.
“네 젊음이 훈장이 아니듯, 내 늙음도 형벌이 아니다”라는 삶의 진리. 눈부신 젊음이 가고 반짝임이 사라진다 해도,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없다”고 드라마가 전한 인생의 가치는 그 자체로 귀했다. 특히 김혜자의 창호지처럼 여린 음색으로 흘러나오는 마지막 내레이션은 오디오로 구워서 소장하고 싶을 정도로 먹먹했다. 김혜자가 부여한 감수성에 힘입어 대사는 시가 됐고, 시를 넘어 삶의 소리가 됐다. 어떤 드라마는 나를 돌아보게 하고, 어떤 드라마는 누군가를 그리워하게 하는데, 이 드라마를 보고 나선 우리 모두를 껴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드물지만 우리는 간혹 단순한 재미를 뛰어넘어 삶 본연의 의미에 침투하게 만드는 드라마를 만나게 된다. 무릇 좋은 드라마란, 좋은 엔딩이란, “그래, 이 맛”이 아닐까.
글 / 정시우(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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