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경기의 공정한 판정을 위해 도입한 VAR은 명승부에 찝찝함을 남기고 있다. 그렇다고 VAR을 탓할 수만은 없다. 최종 결정은 여전히 인간에게 달렸다.
축구 경기의 풍경이 많이 변했다. 이제는 경기 도중 골이 터지면 선수들은 골 세리머니를 하기에 앞서 주심을 바라본다. 주심은 헤드셋을 통해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갑자기 하프라인으로 달려가 화면을 지켜본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선수와 팬들은 숨 죽인 채 두 손을 모은다. 숨을 헐떡이며 유심히 화면에 집중하던 주심은 한참 뒤 고개를 끄덕이고는 큰 결심을 한 듯 그라운드를 달려 들어온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큰 네모를 그린 뒤 휘슬을 불고 골 판정을 내린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판정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놓치면 그대로 끝이었다. 공이 골라인을 통과하는 모습이 안방을 통해 느린 화면으로 전달돼도 주심이 못 봤다면 그건 골이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에 변했다. 비디오 판독 시스템인 VAR(Video Assistant Referees)이 도입됐기 때문이다. 득점 장면뿐 아니라 페널티킥 선언과 퇴장 및 경고 판정 등에도 VAR이 활용된다. 순간적으로 판단해 빠르게 결정을 내려야 했던 심판들은 이제 조금이라도 신중해야 할 때면 경기를 멈추고 경기장 밖으로 달려가 느린 화면을 돌려본다. VAR은 축구사에서 대단히 큰 변화임에 틀림없다.
지난 4월 맨체스터 시티와의 2018~2019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에 출전한 토트넘의 손흥민은 이날 두 골을 뽑아내며 대활약을 펼쳤다. 이날 두 차례 VAR이 가동됐다. 토트넘이 2-4로 끌려가던 후반 페르난도 요렌테의 골이 VAR 끝에 득점으로 인정됐고, 후반 추가시간에 터진 맨시티 라힘 스털링의 다섯 번째 골은 VAR로 취소됐다. 두 번 모두 토트넘이 이득을 봤다. 손흥민은 “가끔 VAR이 짜증났지만 오늘은 정말 고맙다. 좋은 결정이었다”며 활짝 웃었다. 이날 경기는 손(Son)과 발(VAR)이 지배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최근 벌어진 수원 삼성과 FC 서울의 K리그 최대 라이벌전인 슈퍼매치에서도 VAR 판독을 이유로 무려 네 차례나 경기가 중단됐다. 골이 터지는 단 몇 초를 위해 두 시간 동안 눈을 떼지 못하고 경기를 봐야 했던 게 지금까지 축구의 매력이었다면, 이제는 경기 중간중간 중요한 순간마다 두 손을 모으고 애타게 판정을 기다리는 새로운 풍경이 생겨났다. 물론 이 흐름을 대다수가 반기는 것만은 아니다. VAR에 대한 찬반은 여전히 뜨겁다. 축구를 더 공정하게 만드는 시스템이라는 의견과 전통적인 축구의 재미를 반감시킨다고 여기는 의견이 팽팽하다.
VAR 도입은 더 공정한 판정을 하기 위함이다. 경기 흐름을 끊더라도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오심을 잡아내겠다는 의지다. 하지만 VAR이 100퍼센트 정확한 판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달 14일 열린 KEB 하나은행 K리그1 강원 FC와 FC 서울의 경기에서는 심판이 VAR 판독을 하고도 오프사이드 상황을 골로 선언해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VAR 심판은 부심이 오프사이드를 선언한 조영욱의 위치만 확인하느라 페시치의 오프사이드 상황을 놓치고 말았다. 오프사이드를 범한 페시치의 골이 인정되면서 결국 강원은 1-2로 이 경기에서 패했다.
이후 프로축구연맹 심판위원회는 심판평가위원회를 통해 페시치의 득점 상황을 오심이라고 인정했다. 하지만 이전까지의 오심과는 무게감이 다르다. 주심과 부심은 물론 VAR 심판진까지 운영하고 있는 상황에서 영상을 여러 차례 돌려본 뒤에도 오프사이드를 골로 선언했다는 건 꽤나 충격적인 이야기다. 주심은 직접 영상을 확인하지 않고 VAR 심판의 잘못된 이야기만 듣고 골을 인정했다. 결국 경기 후 강원 팬들의 거센 항의에 경찰이 출동하기도 했다. VAR이 100퍼센트 공정한 판정을 내려줄 것이라는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축구는 쉴 새 없는 스포츠다. 야구처럼 9번이나 공격과 수비를 바꿔 진행하지 않고 세트제로 운영되지도 않는다. 그런데 VAR은 축구의 전통적인 재미를 반감시키고 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한 국내 지도자는 “VAR 판독을 한다면서 경기당 3~4분을 까먹는다”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오심의 위험을 감수하고도 빠르게 판정을 내려야 하는 게 숙명이었던 심판은 이제 조금만 헷갈리면 경기를 멈추고 영상을 보기 위해 달려간다. 안방에서 경기를 지켜보는 시청자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VAR 도입 이후 심판들은 자신감이 사라졌다.
심판의 페널티킥 선언 장면을 떠올려본다면 더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이제 심판은 수비수와 공격수가 페널티 박스에서 충돌하면 일단 경기부터 중단하고 VAR을 확인한다. 이렇게 90분 경기 내내 자신의 판정에 대한 확신보다는 영상에 의지하는 심판이 늘어나고 있다. 자신의 판정에 확신을 가져 곧바로 페널티킥을 선언하는 심판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10번의 페널티킥 상황이 있다면 8~9번은 VAR에 의존한다. VAR 판정 없이 페널티킥을 선언하면 ‘깡 좋은 심판’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또한 VAR은 얼마든지 악용될 수도 있다. 넣은 골도 그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트집 잡을 부분이 생기면 심판이 마음대로 골을 취소할 수 있다. 지난 2월 레알 마드리드와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 1차전 경기를 치른 아약스는 VAR을 통해 골이 취소되는 일을 경험했다. 당시 주심은 니콜라스 탈리아피코의 골 상황에 대해 앞서 두샨 타디치가 오프사이드 위치에서 플레이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골을 취소했다. 주심의 해석을 지지하는 이들도 많지만 아약스 미드필더 프렌키 데 용은 이에 대해 경기가 끝난 후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데 용은 “어쩌면 이런 상황은 지나치게 쉽게 빅클럽에 이로운 것 같다”고 불만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 판정은 정심이라는 게 대다수의 의견이지만 그의 말은 충분히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VAR이 축구의 본질을 흐리는 것만은 아니다. K리그를 비롯해 유럽 빅리그와 FIFA·UEFA 주관 대회에서도 VAR 도입이 확대되는 추세다. 오는 5월, 2019 FIFA 폴란드 U-20 월드컵과 6월에 열리는 2019 FIFA 프랑스 여자 월드컵에도 도입될 예정이다. VAR이 100퍼센트 오심을 잡아낼 순 없지만 오심의 확률을 떨어뜨리는 데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손흥민이 두 골을 뽑아낸 맨시티전에서의 두 차례 결정적인 장면 역시 VAR이 없었더라면 오심으로 이어졌을 확률이 적지 않다. 누군가 억울함을 느끼는 판정을 피해갈 수 있다면 잠시 경기의 흐름을 깎아먹는 시간은 꽤 유의미하다.
VAR 도입 이후 가장 긍정적인 부분은 선수들과 감독들의 판정 항의가 줄었다는 점이다. 석연찮은 판정이 내려져도 VAR을 통해 돌려본 판정에 대해서는 불만을 나타낼 수가 없다. 특히나 페널티 박스 내에서의 핸드볼 파울은 더더욱 그렇다. 핸드볼 파울은 판정에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공이 손에 맞는다고 다 페널티킥은 아니다. 심판이 VAR을 통해 공의 흐름 및 선수의 행동을 다시 한번 살핀 뒤 판정을 내리기 때문에 과거와 같은 거센 판정 항의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어쩌면 심판 판정 못지않게 경기 흐름을 끊던 거센 항의가 사라진다는 건 축구가 훨씬 더 좋은 방향으로 흐른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앞서 언급한 아약스와의 경기에서 VAR로 골이 취소돼 불만을 나타낸 데 용과 달리 상대팀이었던 레알마드리드 세르히오 라모스는 VAR 판독을 지지했다. 그는 “나는 VAR 옹호자다. VAR이 조금씩 축구를 공정하게 만들고 있다”면서 “과거에 VAR 탓에 손해를 본 적도 있다. 그러나 오늘은 VAR 덕분에 상대팀의 중요한 골이 취소됐다”고 말했다. VAR에 대한 해석이 이리도 분분한 걸 보면 시스템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기보다는 심판과 선수, 팬들 사이에서 VAR에 대한 신뢰가 더 쌓여야 한다.
인간이 활용하지 않는 능력은 퇴화된다. 찰나를 포착해 판정해야 하는 심판이 자꾸 기기에 의존한다면 심판의 판정 능력 자체는 점점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VAR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스포츠 경기에서 숨겨져 있던 부분까지도 다 잡아낸다. 당연히 첨단 기술은 스포츠에 더 긍정적인 효과를 끼칠 수 있다. 하지만 기술 발전의 속도를 인간의 능력이 따라가지 못하면 이 첨단 기기도 결국 무용지물이다. 현대 축구는 ‘발(VAR)’이 한다지만 너무 의존해서도 안 된다. 한 가지 확실한 건 VAR도 결국 ‘인간’이 최종 결정을 내린다는 점이다. 글 / 김현회(스포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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