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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서 연인으로 넘어가는 선

2019.06.21GQ

선을 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겐 유감스럽지만, 친구와 연인 사이의 묘한 선을 넘는 것은 생각보다 쉽다. 갑작스런 ‘심쿵’ 한번이면 충분하니까.

식성의 선을 넘을 때
난 오이 냄새를 유난히 싫어해서, 수박과 멜론조차 먹지 않는다. 그런 나를 보며 “먹는 거 앞에서 유난 떤다”고 핀잔을 주던 남사친이 있었다. 여러 친구들과 다같이 밥을 먹는 자리가 있었는데, 반찬에 자꾸 채를 썬 오이들이 보이는 거다. 난감해 하면서 일단 쌀밥과 김치를 퍼먹고 있는데, 매번 핀잔만 주던 그 친구가 갑자기 모든 접시에서 오이를 골라 맹렬히 먹기 시작했다. 영문을 모르는 다른 친구들은 “야, 너 오이 되게 좋아하나보네”라고 했지만, 영문을 아는 나의 가슴은 주책 맞게 뛰기 시작했다.
문나영(마케터)

미의 선을 넘을 때
이 친구랑 수다 떠는 게 재밌어서 심심하면 맨날 불러내곤 했다. 둘이 하릴없이 노천 카페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도 하고, 인스타그램에서 본 웃긴 피드도 같이 공유하고, 세상 쓸데없는 얘기하다보면 시간이 훅훅 갔으니까. 그날도 날이 좋길래 또 그 친구를 불러냈다. 저 멀리서부터 눈에 띄게 아름다운 여성이 걸어오길래 아무 생각없이 “야, 저 여자 진짜 이쁘지 않냐?”라고 툭 던졌다. 그랬더니 이 친구가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쟤보다 네가 더 이뻐” 라고 하는거다. 보통 드립으로 지지 않는 편인데, 이 때만큼은 얼굴만 빨개져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깜빡이 안 켜고 차선을 훅 변경한 순간이었다.
박수미(영상 콘텐츠 PD)

위로의 선을 넘을 때
왜 그런 친구 있지 않나? 둘이서만 따로 막 ‘개인톡’을 하진 않지만 여럿이 함께 하는 단톡방에서 편하게 대화 주고 받는 친구. 그날도 어김없이 단톡방에서 회사 욕, 회사 상사 욕을 버무리며 짜증나고 우울하다는 하소연을 늘어놨다. 근래 너무 많이 하소연을 해서였을까. 어쩐지 ‘쎄’한 단톡방의 침묵. 하긴, 다들 이제 위로의 말도 할만큼 해줬으니까. 그런데 곧 한번도 나와 따로 대화를 하지 않았던 그 친구가 ‘개인톡’으로 온갖 웃긴 짤을 다 보내주는거다. 이거 보고 웃고, 잊어버리라면서. 그 친구의 따뜻하고 재치있는 위로가 어느새 친구라는 선을 훅 넘어왔다.
황은혜(UX디자이너)

취향의 선을 넘을 때
혼자 공연 보러 다니는 걸 좋아하는데, 요즘 레게 음악에 빠져있다. 한국에도 완성도 높은 레게 음악을 하는 뮤지션들이 있어서 열심히 ‘디깅’을 해서 듣고 있다. 요즘 듣는 음악에 대한 이야기는 친구들과 잘 하지 않는 편인데, 굳이 뭐 ‘힙해 보이는 척’ ‘남들보다 선구적인 척’ 하는 것처럼 느껴질까봐서다. 그런데 뜬금없이 ‘남사친’ 한 명이 ‘왠지 네가 좋아할것 같은 음악’이라면서 한창 듣고 있는 노선택과 소울소스 음반을 추천해주는 거다. 그 취향이 어찌나 나와 찰떡이던지 심장이 괜히 나대기 시작했다.
조은지(포토그래퍼)

접촉의 선을 넘을 때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도 괜히 신체 접촉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그 친구가 남자든, 여자든 간에 말이다. 걸을 때나 앉아있을 때 늘 ‘개인 간의 거리’를 중시하곤 한다. 이 친구도 처음 알게 됐을 때부터 참 사근사근하고 조신한 남자라고는 생각했는데, 그래서인지 대화를 하다 보면 자꾸 물리적인 거리가 가까워지는 거다. 한참 같이 대화하는 중에 ‘으이구’ 하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을 때, 혹은 길을 걷다가 뒤에서 오는 오토바이를 보고 팔을 끌어 당기거나 할 때, 마음의 거리가 확 좁혀지는 걸 느꼈다.
남시은(바리스타)

시선의 선을 넘을 때
오랜만에 친구들 끼리 모여 왁자지껄 웃고 떠들며 놀았다. 내가 화장실을 잠시 다녀와도, 다른 친구의 전화를 잠깐 받고 와도, 그 친구가 나를 보고 있는시선이 느껴졌다. 눈을 마주치면 괜히 어색하니까 애써 못 본척 했지만 은근히 신경 쓰이더라고. 그러다 목이 말라서 물통을 찾았는데, 이미 비어있는 걸 보고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쯤이었다. 갑자기 내 시야에 들어오는 넘칠듯 넘치지 않는 물컵. 아까부터 나를 보고 있던 그 친구가 물을 가져다줬다. 말해놓고 보니까 사람에 따라 약간 소름 돋을 수 있을 거 같은데, 어쨌든 모두와 함께 한 자리에서 계속 나를 바라보고 챙겨주던 그 시선에 가슴이 쿵 내려앉은 것도 사실이니까.
김해인(브랜드 홍보)

    에디터
    글/ 서동현(프리랜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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