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오늘의 공유 경제

2019.08.11GQ

경제 구조의 재편, 새로운 마케팅 수단 혹은 일시적인 유행일까? 작정하고 들여다본 오늘의 공유 경제.

‘공유 경제(Sharing Economy)’는 2008년 미국 하버드대의 로렌스 레식 교수가 처음 사용한 용어라고 한다. 굳이 정의하자면 ‘시간, 공간, 물건, 정보, 재능 등을 소유하지 않고 나눠 쓰는 경제활동’인데, 난 이 시작을 오히려 세계적인 경제학자이자 문명비평가인 제레미 리프킨에서 찾고 싶다. 지난 2000년 제레미 리프킨의 베스트셀러 <소유의 종말(The Age of Access)>이 출간됐을 때,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감을 잘 잡지 못했다.

리프킨은 자본주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역설적으로 소유가 끝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시장 참여자들은 더 이상 상품과 서비스를 소유(매매)하지 않고, 상대방의 시간, 지식, 생산물에 접속(이용)하는 권리를 교환할 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책이 출간된 지 약 20년이 흐른 지금, 세계 경제는 정말 ‘소유’에서 ‘공유’로 변화하고 있다. 여기서 끝나지도 않는다. 공유 경제는 플랫폼 경제, 구독 경제 등으로 변신하며 신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꿰차는 상황까지 왔다. 이 대목에서 질문을 던지고 싶다. 공유 경제 덕에 우리는 행복해졌는가?

불과 3~4년 전만 해도 공유 경제를 말해야만 혁신적인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공유 경제를 말해야만 정의롭고 나눔을 실천하는 듯한 모습으로 비춰졌다. 차량 공유, 승차 공유, 숙박 공유 등은 구세대의 ‘꼰대성’을 무너뜨리는 전사였으며, ‘공유’를 통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만들고 인류는 드디어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흐름 속에서 하나둘씩 이 공유 경제 속에 통제자가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바로 ‘플랫폼’이다. 승차 서비스를 이용하려는 사람과 차량을 제공하려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어디선가 만나야 한다. 판을 깔아주는 서비스, 그게 바로 플랫폼이고 그게 바로 우버와 타다인데 안쪽을 들여다보니 이 플랫폼 사업자가 중간에서 떼먹는 수수료가 상당하다.

그렇다. 지금 거대화된 공유 경제를 냉철하게 보면 대부분 플랫폼 비즈니스의 한 종류일 뿐이다. 판(플랫폼)을 벌여놓고 “여기서 놀아, 대신 나한테는 기존보다 훨씬 적은 수수료만 내면 돼, 어때 편리하지?”라고 말하는 격이다. 특히 이 플랫폼은 새로운 노사 관계와 종속 관계를 만들고 있다. 공유 경제가 우릴 진짜 행복하게 하려면, 함께 행복하게 만들려면 ‘종속’만큼은 피해야 한다. 앞서 리프킨이 ‘소유의 종말’을 말하며 공유와 구독(사용)을 제시했을 때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와 맥이 닿아 있었다. 법정 스님께서 그러셨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게 무소유가 아니라, 필요 없는 것을 소유하지 않는 것이 무소유이니라”라고. 리프킨과 법정 스님의 말은 필요 없는 건 소유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빌려 쓰고 나눠 쓰면 되니까. 그럼 행복해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 핵심을 지금 플랫폼 사업자들이 망치고 있다. 자동차를 소유하지 않고 필요할 때만 공유해 사용하면 꽤 자유로워진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순간 공유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이 절체절명의 순간 플랫폼 사업자가 사용의 대가로 비싼 수수료를 제시한다면? 또는 내가 이용하는 공유 서비스 정보가 통째로 플랫폼 사업자에게 넘어가 나의 소비 패턴이 분석되고 거부할 수 없는 다양한 서비스 리스트를 제공받는다면?(혹자는 이걸 4차 산업혁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자유가 무너지고 종속되면, 이때부터 공유 경제에 ‘행복’이란 단어를 사용할 수 없다.

우린 차량 공유, 승차 공유를 놓고 사회적 타협을 이루지 못하고 있지만, 세계로 눈을 넓혀보면 공유 경제는 요즘 구독 경제로 흘러가고 있다. ‘구독 경제(Subscription Economy)’는 솔루션 기업 주오라의 창립자 티엔 추오가 만든 용어라고 한다. “제품 판매가 아니라, 제품을 통한 서비스 제공으로 반복적 매출을 창출하고, 고객을 구매자에서 구독자로 전환하는 경제 환경”이다. 다품종 소량 생산의 사업자가 물건을 팔지 않고 그 사용 서비스를 제공하며 거래가 이뤄지는 모델이다.

요즘 구독 경제는 그 대상이 전방위적으로 퍼지고 있다. 가령 지난 2018년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구독 사이트를 보자. 생필품 정기 배송 시 최대 15퍼센트를 할인해주는 ‘아마존 S&S(Subscribe&Save)’, 면도날 정기 배송 ‘달러 셰이브 클럽(Dollar Shave Club)’, 피부 톤과 머리색 등을 입력하면 화장품 샘플을 보내주는 ‘입시(Ipsy)’, 새벽 낮 밤 가리지 않고 식재료를 배송하는 서비스 블루 에이프런(Blue Apron) 등이다. 여기에 굴지의 자동차 회사들도 구독 경제에 합류했다. 현대차뿐 아니라 BMW와 볼보, 벤츠, 포드, 캐딜락, 포르쉐 등이 모두 구독 서비스를 시행 중이다.

지난 2017년 미국 애틀랜타에서는 모 자동차 회사의 구독 서비스가 대박을 쳤다. 월 2천 달러를 내면 8가지 차종을, 월 3천 달러를 내면 22가지 차종을 마음대로 타는 프로그램이다. 당시 미국 언론을 보면 명품차를 타고 싶지만 ‘소유’할 재정적 능력이 없는 잠재적 구매자들의 수요를 공략했다는 칭찬 일색이다. 그런데 솔직히 지금도 잘 모르겠다. 나는 가성비를 먼저 따지기 때문이다. 와이셔츠 일곱 장을 구입해 일주일간 돌려 입는 비용과 일주일 셔츠 구독 서비스 수수료를 비교한다. 당연히 구독 경제의 가성비는 꽝이다. 구독 경제 자체가 가성비가 아니라 ‘가심비’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다른 측면도 있다. 1년에 4천만원 넘게 내고 22가지 차를 매일 골라 타는 것이 만족스러울 수 있다. 매일 극도의 행복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때 행복을 만드는 주체는 ‘구독’을 제공하는 사업자다. 난 지금 ‘BMW X5’를 ‘소유’하고 있다. 2001년 기회가 생겨 지방에 갈 때 탔는데,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정말이지 너무도 갖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내겐 사치였다. 그로부터 15년 후, 결국 X5를 샀다. 내가 만든 행복이라 더 행복했다. 지금도 행복과 만족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지 무엇 때문에 얻어지는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엄청난 부채가 아니라면, 또 원리금 부담을 감내할 수 있다면 집을 사라고 말하는 편이다. 그럼 다들 “돈이 어디 있어요?” 혹은 “죽어라 돈 모아도 서울에 집 못 사요”, “반 토막 나면 책임질 겁니까?”라는 답이 돌아온다. 부동산 투기를 부추기는 게 아니다. 집값이 오를 거라는 부동산 전망을 하는 것도 아니다. 부채 없이 완전한 소유를 했다면, 그 집이 반 토막이 나도 버틸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냥 그 집에서 살면 되기 때문이다.

상당수 부동산 전문가들이 ‘월세’에 대해 찬양하는 것을 알고 있다. 매달 월세 내면 집값이 오르든 내리든 맘 편하고, 깨끗한 집 순회하고, 해외여행 다니며 즐겁게 인생 살 수 있다고도 한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갈 사안이 있다. 바로 집을 빌리는 대가로 지불하는 월세는 그 자체로 심각한 빚이라는 사실이다. 왜 빚이냐고? 빚이다. 빚과 다르지 않다. 월세를 감내하지 못할 때는 거침없이 쫓겨나야만 한다.

생각해보면 ‘공유 경제’ 혹은 ‘소유의 종말’이라는 말엔 아주 큰 모순이 존재한다. 남의 것을 나눠 쓰고, 빌려 쓰고, 남의 것에 접속해 필요한 것을 공유한다는 것은, 실은 ‘최종 소유자’가 있어야 한다는 대전제가 선행되기 때문이다. 월세의 대전제는 집을 여러 채 소유하고 있는 임대사업자의 존재이다. 그래서 만약 우리 모두가 소유를 포기한다면, 그 최종 소유자만이 모든 걸 소유할 테고, 종국엔 그 최종 소유자의 뜻대로 움직여야만 하는 노예가 될 리스크도 존재한다. 지금은 ‘접속’과 ‘렌트’와 ‘구독’과 ‘공유’를 통해 낮은 위험에, 싼값에, 높은 만족감에, 남의 것을 여우같이 영악하게 빼먹는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훗날 엄청난 빚으로 내게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물론 소유가 없으면 마음은 정말 편안하다. 소유가 없으면 갈등도 없다. 소유 그 자체로 엄청난 책임과 의무를 요구하기에 그렇다.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서 중요한 한 가지 제언을 하려고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공유는 영원하게, 소유는 완전하게 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소유에 대해 오해하는 점이 ‘소유=영원’이라는 등식이다. 소유하면 영원히 갖고 있어야만 한다는 강박이다. 그렇지 않다. 소유는 영원하지 않다. 하지만 ‘완전하게’ 소유할 수는 있다. 복근을 예로 들어보자. 배에 근육을 새긴다고 해도 술 몇 잔이면 사라진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한 번이라도 완전한 내 것으로 만들었는가가 중요하다. 반면 공유는 영원히 공유할 수 있다. 평생 나눠 쓸 수 있고, 평생 구독할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건 삶에서 공유할 것과 소유할 것을 정리해보는 작업이다. 무엇을 완전하게 소유할지, 또 무엇을 영원히 공유할지 차근차근 생각해보자.

공유 경제가 우리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면, 그건 소유의 약점을 보완해주기 때문이다. 웨이트 기구는 얼마든지 공유해도 좋다. 평생 구독하고 빌려 써도 된다. 그러나 푸쉬업 80개나 턱걸이 10개, 데드 리프트 1백 킬로그램쯤은 한 번쯤 완전하게 소유해야 한다. 그래야 요즘처럼 미쳐가는 세상에서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도 따라올 것이다. 글 / 정철진 (경제 칼럼니스트)

    에디터
    이재현
    일러스트레이터
    김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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