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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인의 n가지 얼굴

2019.09.06GQ

말갛고 순해보이는 얼굴이 다가 아니다. <유열의 음악앨범> 속 다부지지만 위협적이지 않은 남자, 보험 광고 속 귀여운 청년, 당돌한 연하남, 되는 일 하나 없는 불쌍한 소년원 출신 20대까지, 정해인은 훨씬 더 다채롭다.


<슬기로운 감빵생활> 유 대위
“비난할 마음은 없는데, 이해는 못합니다.” 자신의 옆에 들러붙는 해롱이(이규형)를 냉정하게 밀어내는 tvN <슬기로운 감빵생활> 속 유 대위의 모습을 기억하는지? 위험에 빠진 해롱이를 구해주고 난 뒤에 “좋아서 그런 건 아닙니다. 그건 범죄니까 어쩔 수 없이 그런 겁니다”라고 무표정으로 말하는 유 대위는 정해인의 안에 무엇이 숨어있는지 알 수 없을 때 만난 신비로운 얼굴이다. 감방 안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사건사고에도 눈 하나 깜짝 않던 그가 비로소 활짝 웃었을 때, 유 대위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가. 덕분에 정해인의 차기작을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훌쩍 늘었다. 둘도 없이 냉정해 보였고, 꽁꽁 마음을 닫은 듯 보였던 유 대위의 얼굴이 정에 굴복하면서 흐트러진 모습은 배우 정해인에게도 새로운 세상이었을 것이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서준희와 <봄밤> 유지호
그의 말에 따르면 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는 여전히 정해인에게 “노래만 들으면 다시 그때로 돌아가는 것 같은”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배우 본인뿐이 아니다. 레이첼 야마가타의 ‘Something in the Rain’이 흘러나오면, 여전히 갑작스러운 비에 우산을 사러 달려간 서준희의 설렘이 떠오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까.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속 서준희는 <봄밤>의 유지호로 이어진다. 서준희가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저돌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다면, 유지호는 연인 앞에 무릎을 꿇고 미안하다며 애교를 부린다. 게다가 상대에게 감동할 때마다 눈물이 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혼자 울고 오기도 한다. 안판석 감독의 두 작품 안에서 정해인은 비슷한 듯 다른, 하지만 연인에게 절대적으로 진솔한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


보험사 광고 모델
“어쨌든 인생은 모험.” 한 보험사의 광고 모델로 활동하면서 정해인은 자신과 가장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카피를 읊는다. ‘#댄싱머신도전’이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춤을 배우고, 서핑을 연습하는 남성들 사이에서 환하게 웃는 모습은 그가 대부분의 작품 속에서 보여줬던 정적인 모습들과 정반대의 활기를 띤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정해인의 밝은 에너지는 어색하다기보다 갓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의 동아리 활동처럼 풋풋하게 느껴진다. 전혀 모험 따위 할 것 같지 않은 청순한 새내기가 “인생은 모험”이니 “필요한 건 보험”이라고 설득할 때 생기는 믿음과 신뢰란. 인생에 무엇이든 준비해두지 않으면 자신이 더 걱정할 것 같은 얼굴이다.


<유열의 음악앨범> 현우
KBS <해피투게더>에 나온 정해인은 무반주에 폴킴의 ‘너를 만나’를 불렀다. 내내 쑥스러워하는 정해인의 모습은 김광석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를 부르며 두 손으로 마이크를 꼭 쥐었을 때 더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보다, 김고은이 노래를 부를 때 그를 바라보며 상냥하게 웃는 모습이야말로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속 정해인을 더 사랑스러운 애인처럼 보이게 만든다. 영화에서 정해인이 연기하는 현우는 내내 외롭지만, 미수(김고은)와 은자(김국희)의 삶에 들어가면서 사랑, 애착, 배려와 같은 감정을 배운다. 정해인이 표현하는 현우는 쓸쓸함과 후회로 축 처진 어깨를 가졌고, 정지우 감독은 그 서글픈 어깨와 땀이 흐르는 목덜미를 자꾸만 클로즈업한다. 뒷모습인데도 불구하고 상대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듯한 그 시선을 통해 정해인이 얼굴 뒤의 얼굴을 관찰하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에디터
    글 / 박희아('아이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