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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스타들의 예능 대결

2019.10.13GQ

각본 없는 드라마를 써 내려온 왕년의 스포츠 스타들이 TV 예능으로 쏟아지고 있다. 예능은 어떻게 스포츠 스타들의 새로운 격전지로 부상했을까?

뭉쳐도 못 찬다. 헛발질의 연속이다. 그래서 오히려 더 인기다. 스포츠 레전드들의 예상치 못한 반전이 있기 때문이다. 예능 <뭉쳐야 찬다> 이야기다. 멤버 구성이 기막히다. 농구 대통령 허재, 양신 양준혁, 테니스 왕자 이형택, 천하장사 이만기, 사격 황제 진종오,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 도마의 신 여홍철, 레슬링 신화 심권호, 한국 최초 UFC 파이터 김동현 등 각 분야에서 한 획을 그은 스포츠 스타들이 조기 축구팀으로 뭉쳤다. 감독은 ‘반지의 제왕’ 안정환이다. 스포츠 선수들의 예능 진출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기에 새삼스러울 게 없다. 하지만 이렇게 모아둔 건 새삼스러울 뿐 아니라 대단하다 못해 신선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어벤저스급 활약을 기대했는데 실상은 오합지졸 동네 아재들과 다름 없다. 공을 차는 게 아니라 공에 치인다. 조금만 뛰어도 ‘헉헉’, 작은 지적에도 ‘툴툴’거린다. 순진한 표정으로 공을 손으로 잡아버리는 ‘축알못’ 허재는 또 어디서 나타난 기이한 캐릭터인가. 감독 안정환의 동공이 흔들릴 때마다 시청자는 즐거워한다. 시청률 4퍼센트를 찍었다. <뭉쳐야 찬다>의 인기를 타고 ‘스포츠+엔터테이너’를 의미하는 스포테이너들에 대한 관심도 부쩍 높아졌다.

걸음이 빠른 건 허재다. <뭉쳐야 찬다>에서 의외의 ‘허당끼’를 발산하더니, 거침없는 입담 드리블로 <냉장고를 부탁해>, <한끼줍쇼>, <미운 우리 새끼>, <라디오스타>, <집사부일체>,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 등을 휩쓸었다. 어느덧 예능 섭외 1순위로 부상했다. 그가 뜨면, 유행어가 뜨고, 프로그램의 화제성도 뜬다. 방송사 클립 영상을 온라인 플랫폼에 유통하는 스마트미디어랩의 8월 집계에 따르면 지난 3개월간 허재가 언급된 영상클립은 431만 뷰를 찍었다. 강호동의 349만 뷰를 제친 스포츠 스타 1위 기록이다. 최근 허재는 배우 박서준과 피자 광고도 찍었다. 해당 제품 OOO는 허재 특유의 허세와 인지도를 이용해 이런 카피를 날린다. “맛도 가격도 OOO가 잘허재.” 아무나 광고를 찍나. 유행에 가장 민감하고 냉정하게 반응하는 게 CF 시장의 본성이다. 그러니까 허재는 예능 치트키, 예능 인싸가 된 것이다.

허재가 떠오르는 예능 신성이라면 서장훈은 예능 대세다. 2014년 <라디오스타> 출연 당시만 해도 ‘서셀럽’이라 자칭하며 ‘연예인’ 호칭에 선을 그었지만, 프로그램을 하나둘 낚아채더니 예능인으로 만개했다. <동상이몽>, <아는 형님> 등 고정출연 프로그램만 현재 6개에 달한다. 얼마 전 출연한 파일럿 예능 <편애중계>는 정규편성을 확정했다. 대중이 그에게 느끼는 매력은 ‘갭’에서 발생했다. ‘농구선수 서장훈’은 거칠고 반항적이고 과묵했지만, ‘예능인 서장훈’은 입담꾼에 겁도 많고 소심하다.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깔끔 떠는 모습도 반전 아닌 반전이다. 할 말은 다 하는데 그걸 또 밉지 않게 소화해서 어딜 가든 잘 섞인다. 코트 위에서 시작된 골리앗의 전성기는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이다.

긴 머리 찰랑거리며 그라운드를 화보로 만들던 ‘테리우스’ 안정환은 이제 예능인으로 물오른 기량을 펼쳐 보이고 있다. 2014년 출연한 <아빠! 어디가?> 때만 해도 사실 이렇게 넉살이 좋은 줄 몰랐다. 그런 안정환의 입담이라는 것이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폭발했다. 이후엔 가속도가 붙었다. 숨은 본색을 하나둘 드러내며 프로그램을 척척 접수했다. 기회가 오면 낚아채고야 마는 근성도 탁월한 편이다. 건강상의 이유로 휴식을 선언한 정형돈 대신 <냉장고를 부탁해> 스페셜 MC를 맡았다가, 아예 고정으로 눌러앉은 사례가 대표적이다. 정형돈의 지분이 워낙 큰 프로그램이었던 만큼 방송 초반 의심의 눈초리를 많이 받았다. 하지만 그는 특유의 승부욕과 재치로 세간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자신의 전공 분야를 살려 <뭉쳐야 찬다>를 이끌고 있는 안정환은 MBC 축구 해설위원으로도 활약 중이다. 스포츠와 예능이 모두 그의 손안에 있다.

그리고 태초에 강호동이 있었다. 강호동은 1990년대 초반 씨름판을 휘어잡는 천하장사였다. 지금 10대들에겐 낯선 사실일지 모른다. 한 포털 사이트 ‘지식IN’에선 이런 질문도 발견된다. “강호동 원래 씨름 선수인가요?” 이제 강호동은 씨름 선수로 메치기한 시간보다 예능인으로 웃긴 시간이 더 길다. 유재석과 함께 10년 넘게 ‘국민 MC’ 양강 체제를 이끌어온 것도 그다. 탈세 의혹 논란으로 활동을 중단하는 고비는 있었지만, 다시 돌아와 예능 프로그램의 중요 지분들을 차지했다. 예능으로 제2의 삶을 꿈꾸는 스포츠인들에게 강호동은 선구자이자 경쟁자이고 스승이다.

스포츠 선수 출신 예능인들의 성장은 방송가 트렌드 변화와 궤를 같이한다. 90년대는 콩트 코미디의 시대였다. 예능은 순발력과 입담이 출중한 전문 코미디언들의 놀이터였다. 그러나 ‘리얼’과 ‘토크’로 예능의 흐름이 바뀌면서 비예능인들에게 기회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관찰·먹방·여행·가족 예능의 등장은 스포테이너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에 더 좋은 환경을 제공했다. 현주엽은 <원나잇 푸드트립>,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에서 위(胃)대한 식성을 선보이며 먹방 흐름을 탔다. 이동국, 추성훈은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자식 바보 면모를 보이며 친근한 이미지를 입었다. 이만기는 <자기야 백년손님>에선 장모와, <아내의 맛>에선 아내와 호흡을 맞추며 주부들의 대화
자리 단골 메뉴가 됐다.

스포츠 선수로서 쌓아 올린 인지도는 방송 진입 장벽을 허무는 강력한 무기다. 제로에서 시작해야 하는 신인급 개그맨들과 출발선 자체가 다른 셈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스포츠라는 ‘각본 없는 드라마’에서 역전과 반전과 논란의 서사를 써 내려온 인물들이다. 현역 시절 남긴 일화는 고스란히 예능의 소재가 된다. 국민 모두가 기억하고 있는 추억의 사건이라면 반응은 더 좋다. 김병헌은 2003년 메이저리그 보스턴 시절 관중에게 손가락 욕을 날려 물의를 빚었던 과거 논란의 전말을 <라디오스타>에서 풀어내며 주목받았다. 감독 시절 심판 판정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어눌하게 발음된 “이게 불낙(블로킹)이야?”는 과거엔 허재의 ‘흑역사’였지만, 이젠 허재에 대한 진입 장벽을 낯춰주는 ‘콘텐츠’가 됐다.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투머치토커(Too Much Talker)’로 활약 중인 박찬호는 ‘말 많은 형’답게 영웅담 방출에도 적극적이다.

운동선수들, 특히 ‘현역’ 운동선수의 다양한 활동을 바라보는 인식의 변화 역시 눈여겨볼 지점이다. 과거에는 현역 스포츠 스타들의 방송 출연을 무분별한 외도로 바라보는 시각이 많았다. 예능 출연 후 성적이 떨어지면, 연습을 등한시하고 방송국을 기웃거린 탓이라는 비난이 날아들었다. 이젠 다르다. 스포츠와 예능의 경계가 많이 흐려졌을 뿐 아니라, 선수 개인의 취향과 경제 활동을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억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다. 매니지먼트가 스포츠 스타 영입에 적극 뛰어든 것도 이러한 배경과 맞물린다. 이젠 소속팀 외에 매니지먼트를 두고 연예계 활동을 적극적으로 타진하는 현역 스포츠 스타도 많다. 김동현이 대표적이다. 고정 프로그램만 3개인 그는 스포츠와 예능을 오가며 이중생활 중이다. 진종오와 배구선수 김연경 역시 매니지먼트를 통해 보다 체계적인 스케줄 관리를 받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강호동, 서장훈, 안정환처럼 예능에 연착륙하는 건 아니다. 씨름 선수 박광덕, 이종격투기 선수 최홍만처럼 방송계에 확실히 자리 잡지 못한 경우도 여럿이다. 이천수는 <일밤-복면가왕>에 출연, “제2의 강호동이 되고 싶다”며 본격 방송인 선언까지 했지만 현실은 욕망을 오래 따라가지 못하고 주춤하는 모양새다. 그만의 콘텐츠와 캐릭터를 아직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포츠 선수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자신만의 필살기가 필요하듯 예능 역시 남다른 매력이 필수다. 초반엔 선수 시절 쌓은 인지도와 에피소드로 주목을 끌 수 있으나, 그것만 믿고 입성했다간 빠르게 소비되고 빠르게 사라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진짜 승부는 에피소드가 다 떨어지고 난 후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스포테이너 전성시대. 스포츠 레전드들의 장외 대결에서 누가, 누가 살아남을까. 글 / 정시우(칼럼니스트)

    에디터
    김영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