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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시간을 보내는 방법

2019.11.23GQ

결단과 용기, 특출난 기술은 필요하지 않다. 혼자인 시간을 맞닥뜨리는 네 가지 방법.

궁에 대한 기억을 되감아보면 항상 동행인이 있었다. 학교 친구거나, 가족 중 한 명이거나. 연인이 옆에 있기도 했다. 누가 됐든 분주히 오가는 대화 속에서 나는 듣고 말하는 행위에 집중했다. 따라서 내게 궁은 추억을 위한 배경이나 대화를 위한 장소였지, 과거 누군가의 삶이 켜켜이 쌓인 ‘집’의 의미로 다가온 적은 없었다. 해가 지고 홀로 궁을 찾았다. 소멸한 왕조의 집은 주인이 없을 테니, 어둑한 밤이라면 철저히 혼자 남겨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얼마 만에 왔을까. 오랜만에 찾은 궁은 들어서는 길부터 생소했다. 검표원은 매표소를 안내하는 대신 “찍으세요”라고 말했다. ‘삑’하는 소리와 함께 교통카드로 천원이 결제됐다. 어둑어둑한 길을 밝히라며 건네 받은 청사초롱 안에는 LED 램프가 빛을 내뿜었다. 예상도 틀렸다. 야간 입장을 허용하면서 창경궁의 밤도 관광객들의 차지였다. 사람들은 정전 正殿 내부를 들여다보며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가이드의 설명에 집중했다. 그래도 낮보다는 한산해 궁 안에서 나는 소리가 유독 선명하게 들렸다. 5백 년 전에도 이곳에서 누군가 들었을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와 모스 부호처럼 울리는 귀뚜라미 소리가 21세기의 기계음과 혼재되어 있지만 묘하게 어울렸다. 커다란 정전의 뒤편, 작은 건물이 모인 곳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내가 기대한 고요의 시간에 접속할 수 있었다. 흙바닥을 딛는 소리만 야단스럽지 않게 울렸다. 통명전, 양화당, 경춘전 등 부속 건물의 문은 닫혀 있었지만, 내부는 노란빛으로 은은히 밝혀두었다. 몇백 년 전엔 세자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문 너머로 새어 나왔으리라고 상상했다. 왕이 헛기침하는 소리, 또 이를 빼놓지 않고 기록하는 사관이 종이에 글을 적는 소리 또한 이곳을 나직하게 채웠을 것이다. 밤의 고궁은 소음으로 점철된 서울에서 ‘고립의 기쁨’을 일깨운다. 빛이 공해로 여겨질 만큼 비정상적으로 빛이 쏟아지는 도시에서 어둠의 행복에 대해 일갈하는 듯했다. 용도 모를 건물 앞 층계에 앉아 마지막으로 궁에 왔던 기억을 떠올릴 무렵, 추녀마루 너머로 별빛이 옅게 빛나고 있었다. 이재현

마감이 끝나면 혼자 목욕을 하러 간다. 어느 먼 구석의 온천일 때도 있고 가깝지만 욕조가 좋은 호텔방일 때도 있다. 어디든 몸을 푹 담그기에 좋은 곳으로 가서,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구석구석 충분한 거품을 흘려보내고, 더운 물이 가득 담긴 욕조 안에 미끄러지듯 몸을 누인다. 녹는다. 뜨거운 물에 빠뜨린 각설탕처럼 퍼지는 즉각적인 달콤함. 그리고 약간의 현기증과 함께 깨닫는다. 내 몸의 부피만큼 한바탕 출렁이던 수면의 소요가 잦아들고, 이제야 비로소 혼자가 되었다는 걸. 믿을 수 없을 만큼 매끄러운 온천물이나 사치스러울 만큼 향기로운 입욕제 이상으로 목욕이 좋은 점은, 욕조에서는 완전히 홀로가 된다는 점이다. 물에 젖은 손으로는 전자기기를 만지는 일도, 종이를 펼치는 것도 성가신 일이다. 지구 반대편에 혼자 있어도 와이파이만 터진다면 불특정 다수와 동시다발적으로 신경회로를 연결시킬 수 있는 세상에서 잠시 연결감을 상실한다. 소음이 불쑥 사라진다. 눈꺼풀 안의 스크린에 아무 정보도 입력되지 않는다. 하지만 적막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나만큼은 벗어둘 수 없고, 가난한 마음속 골목골목을 동분서주 달리며 곱씹어 사랑하거나 후회할 거리를 기어이 찾아내고야 말지만, 물속에선 그 모든 게 무력하다. 더운 물은 본래 머릿속을 멍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단지 피부에 감기는 물의 온도, 타일에 난반사되는 물의 에코, 그리고 마침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음에 도달한다. 신호가 꺼진다. 물에 녹은 설탕처럼 평화롭다. 언젠가 이런 기분을 느꼈던가? 어떤 존재도 아닌, 단지 어떤 상태가 되는 기분을? 혼자가 되기 위해서는 사라지는 것이 좋다. 내가 나로부터 사라지는 궁극의 혼자됨, 투명하고 고요해지기. 그리고 그것을 위해선 더운 물에 몸을 담그는 것보다 나은 일은 없다. 이예지

Day 1 루이 비통 트래블 포토그래피 컬렉션 ‘Fashion Eye’ 시리즈 가운데 왼쪽은 오스마 하빌라티의 <생트로페>, 오른쪽은 슬림 아론스의 <프렌치 리비에라>. 여기에 남프랑스의 남자 제라르 베르트랑이 만든 꼬뜨 로즈 로제 와인과 화이트 와인을 곁들인다. 은은한 살굿빛 책장을 넘기며 로제 와인의 싱그러운 향과 산미를 음미한다. 375밀리리터 미니 사이즈.

Day 2 로얄 살루트 21년 몰트를 입에 머금으면 신세계가 열린다. 은은하게 입 안 가득 피어오르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풍미. 크렘 브륄레와 같은 디저트부터 배나 오렌지와 같은 과일 향이 느껴진다. 별이 그려진 오브제, 수첩, 엽서, 잉크 펜은 모두 에르메스. 위스키를 조금 따라서 마신 벨루가 텀블러는 바카라.

Day 3 트러스한 향과 적당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가을을 위한 궁극의 화이트 와인은 펜폴즈 쿠눈가힐 어텀 리슬링. 적당히 취기가 오를 때 함께 들으면 좋을 쳇베이커의 음반 <The Last Great Concert>.

Day 4 라즈베리의 달콤한 맛과 사과의 상큼한 향을 느껴볼 수 있는 핸드앤애플 로제 사이더. 든든한 지지대 역할을 해주는 요가 블록은 룰루레몬.

Day 5 벨기에 서부 플랜더스 지역에서 생산하는 플레미시 레드 에일인 듀체스는 입 안을 지배하는 시큼한 맛과 풍부한 체리 향이 돋보이는 맥주다. 와인인지 맥주인지 궁금해서 레이블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매혹적인 술. 알밤처럼 귀여운 몽블랑 케이크는 카페 노티드. 화이트 플레이트는 프랑스 200년 전통의 도자기 명가 브랜드 필리빗.

Day 6 손바닥만 한 100밀리리터 위스키 4개가 들어 있는 테이스터 팩은 혼술하기에 완벽한 구성. 글렌모렌지 오리지널, 라산타, 퀸타루반, 넥타도르가 한 병씩 들어 있어 늦은 밤 절제의 미학을 실천할 수 있다. 위스키를 담은 가죽 트레이는 에르메스, 옆에 둔 벨루가 텀블러는 바카라.

배가 찢어지도록 웃게 만들 수 있는 ‘주사’와 안주가 맛있는 ‘술집’에 관해서라면 1권도 거뜬히 쓸 수 있겠지만, ‘혼술’에 관해서라면 아직 망설여진다. 좋은 술이 생기면 함께 마시고 싶은 얼굴이 먼저 피어 오르니까. 혼자 살면 집을 ‘바’로 만들겠다는 포부와는 다르게, 찬장과 냉장고에 가득히 외로운 술만 쌓여 간다. 오늘은 그 술을 잔뜩 꺼내 색다른 페어링을 시도해볼까? 와인과 어울리는 안주 대신 청량한 지중해 바다 사진 혹은 짙은 음악을, 모양 때문에 사본 똘똘한 몽블랑 케이크에 시큼한 사워 에일 맥주를, 늦은 밤 위스키와 잘 어울리는 잔과 필기구를 곁에 두고서 허송세월을. 심신이 지친 날은 홀로 요가 매트에 앉아 몇 가지 동작을 꿈틀거려보다 가부좌를 틀고서 사이더를 들이켠다. 처량하지 않게, 쓸쓸하지 않게, 품위 있게 혼자만의 사색에 취할 수 있는 여섯 날의 기록. 김아름

기지개를 켜듯 암막 커튼이 주름을 펴며 정오의 햇살을 끊었다. 적막에 묻힌 몸은 소파에 비끄러맸다. 잠시 후 고요의 저편에서 희고 검은 피아노 건반 소리가 썰물처럼 살살 밀려왔다. 입술을 떼는 소리가 스치듯 들렸고, 다이애나 크롤의 노래가 나에게로 왔다. 라이브 공연 앨범 에 수록된 ‘A Case of You’. 원래 시를 읊듯이 나지막이 부르는 곡인데 귀 언저리에 내려앉은 소리는 가볍지 않았다. 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풍부하고 섬세한 소리가 지붕이 되어 공간을 감싸 안았다. 이런 소리가 있다면 어느 곳이든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자발적 고립을 위한 비상구가 되어준 곳은 하이파이 오디오를 전문으로 다루는 ‘소리샵’ 청담점의 청음실이다. 최고급 모델들이 도열된 메인 청음 공간에는 영국 오디오 명가 윌슨 베네시 Wilson Benesch의 기함급 스피커들이 신전의 기둥처럼 우뚝 서 있다. 다른 한 곳은 엔트리급 모델과 홈시어터로 꾸며져 있다. 누구나 가끔씩 혼자 보내는 시간이 필요하다. 한데, 고요와 고독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만 하는 건 아니다. 실수로 쏟은 와인이 대책 없이 번지듯 텅 빈 시간을 맞닥뜨렸을 때 사소한 생각이 상념으로 무한 확장되는 나 같은 사람도 있으니까. 그 까닭에 물속에 빠지듯 음악에 빠진다. 예약 후 프리미엄 오디오로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청음실은 방황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붙들기에 좋다. 그 속사정은 성능이 뛰어난 고가의 장비로 음악을 들어야 하는 고집과도 연결된다. “공간을 녹음한다”는 표현처럼 공들여 제작한 앨범에는 뮤지션의 움직임, 악기 위치, 프로듀서의 의도처럼 녹음 순간의 모든 요소가 소리로 세밀하게 기록된다. 좋은 오디오 장비일수록 이를 놓치지 않고 온전히 펼쳐놓는다. 교감하듯 그 소리를 몰입해 듣다 보면 돌연 듣는 행위는 보는 경험으로 바뀐다. 앨범은 무대에 선 다이애나 크롤이 고개를 돌리거나 발을 구르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에드 시런의 ‘Shape of You’는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는 소리의 생동이 공감각적 경험을 설계한다. 또 한스 짐머가 작곡한 <다크 나이트> OST의 ‘Why So Serious’는 바이올린 줄을 톱으로 긁어 만든 소리가 소음이 아닌 음악임을 날카롭게 증명한다. 세상의 소란과 단절된 이곳에서 소리는 풍경이 된다. 나는 그 소리를 홀로 응시하며, 소리 없는 희열을 느낀다. 김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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