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라는 수족관에 현대 미술의 삼대 상어가 모였다. 과연 이 수족관의 승자는 누구일까? 파리는 현대 미술 시장의 3대 도시 자리를 탈환할 수 있을 것인가.
세계 3대 축구 리그로 프리미어 리그, 프리메라리가, 세리에 A가 있고, 3대 야구 리그로 MLB, KBO, NPB가 있는 것처럼 거래량을 기준으로 한 현대 미술 시장의 3대 도시는 뉴욕, 런던, 홍콩이다. 그렇다면 파리는? 예술의 도시로 알려진 파리는 2018년 아트프라이스의 분석에 따르면 5위 안에 간신히 들었다. 1년 총거래량이 500만 유로가 채 되지 않는 참담한 성적이다. 인상파가 미술시장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던 60년대 이후 파리는 단 한 번도 3위권 안에 들지 못했다. 이러니 제아무리 루브르나 오르세, 퐁피두 센터가 있다 한들 현대 미술 시장에서 파리는 과거의 영화에 매달리는 한물간 도시라는 비아냥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현대 미술 시장에서의 파리의 빈약한 처지도 과거사가 될 기미를 보이고 있다. 지난 10월 17일부터 20일까지 열린 파리 현대 미술 페어인 피악 FIAC의 실적이 이를 증명한다. 바젤 아트페어나 베니스 비엔날레, 아모리 쇼, 카셀 토큐멘타 등 막강한 경쟁 페어들에 치여 늘 이인자의 설움을 씹어야 했던 올해의 피악 성적표는 엄청나게 고무적이다. 데이비드 즈위너 David Zwirner 갤러리는 공식 개관 이전에 열린 VIP 초대전에서 이미 셰리 레빈 Sherrie Levine의 작품 세 점을 팔아치웠다. 각기 32만 달러에서 75만 달러에 이르는 대형 작품이다. 피악 행사가 열린 파리 그랑 팔레 주변의 미쉐린 스타급 레스토랑들이 불티나게 팔리는 고급 샴페인 때문에 환호성을 질렀다더니 과연 그럴 만했다. 게다가 피악 기간 내내 갤러리스트들의 입에서 입으로 돌던 루머가 사실임이 확인되었다. 하우저 앤 워스 Hauser & Wirth가 파리 진출을 위해 생 제르망 데프레에 자리를 물색 중이라는 소식이 바로 그것이다. 하우저 앤 워스가 파리로 입성하는 상황을 하나의 수족관에 든 세 마리의 상어에 비유한 일러스트가 갤러리스트들 사이에서 화제로 떠올랐다.
세 마리의 상어는 현재 현대 미술계를 주름잡고 있는 3대 갤러리를 뜻한다. 가고시안, 데이비드 즈위너, 하우저 앤 워스, 그리고 이들이 모인 수족관은 파리다. 이들 갤러리는 일단 규모에서부터 여타의 갤러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메이저급 덩치를 자랑한다. 1년 거래량만 10억 달러에, 아테네부터 홍콩까지 전 세계 주요 도시에 17개의 갤러리를 가지고 있는 가고시안은 현대 미술계의 대표적인 갤러리다. 제프 쿤스, 로이 리히텐슈타인, 프랜시스 베이컨, 신디 셔먼, 데이미언 허스트 등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메이저 아티스트의 작품을 공격적으로 거래해 미술계 최초로 상어라는 별명을 거머쥐었다. ―― 가고시안은 2010년 일치감치 파리에 진출했다. 샹젤리제에서 프랑스 대통령 궁인 엘리제궁으로 가는 8구, 크리스티와 소더비라는 양대 경매장이 자리하고, 집중적으로 고급 갤러리들이 모여 있는 동네에 둥지를 틀었다. 래리 가고시안이 미국을 대표하는 갤러리스트라면 데이비드 즈위너는 독일계 갤러리스트다. 하지만 본격적인 활동지는 역시 뉴욕으로 첼시에 4천 제곱미터에 달하는 전시장을 가지고 있다. 2차 대전 이후 활동한 시그마 폴크 Sigmar Polke 같은 독일 작가나 벨기에 작가로 최근 상종가를 치고 있는 뤼크 튀이만 Luc Tuymans을 발굴하고 키웠다. 화려하고 공격적인 가고시안의 영업 스타일에 비해 조용하지만 내실 있는 운영 방식이 특징이다. 사실 즈위너 파리 갤러리는 오픈 전부터 언론의 시선을 모았다. 즈위너 갤러리가 자리 잡은 파리 마레 지구의 아름다운 공간은 무려 30년 동안 파리 현대 미술계를 주름잡아 온 전설적인 갤러리 이봉 랑베르 Yvons Lambert 자리였다. 이봉 랑베르가 물러나면서 과연 누가 이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냐를 두고 각종 루머가 난무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시의 상당 부분이 개발 제한에 묶여 있는 파리에서 이만한 전시 공간은 다시 없을 만한 매물이기 때문이다. 소문에 따르면 즈위너는 컬렉터들 중에서도 VIP들에게 파리행 1등석 왕복 티켓을 비롯해 리츠 호텔을 비롯한 럭셔리 호텔 숙박권을 제공하며 비교적 조용히 오프닝을 치렀다.
가고시안과 즈위너에 이어 파리 입성을 타진 중인 하우저 앤 워스는 1992년 문을 연 비교적 신생 갤러리지만 가고시안을 이미 넘어섰다는 평이 돌 만큼 가장 주목받는 갤러리다. 이완 Iwan과 마누엘라 워스 Manuela Wirth 부부가 차린 하우저 앤 워스는 뉴욕, 런던, 서머셋, 로스앤젤레스, 생 모리츠, 취리히, 가스타드, 메노르카에 지점을 가지고 있다. 하우저 앤 워스가 단시간 안에 세계적인 컬렉터들을 사로잡은 비결은 작품만 파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팔면서 고객의 라이프스타일을 디자인한다는 콘셉트 때문이다. 서머셋에 위치한 하우저 앤 워스의 듀르슬레이드 농장 Durslade Farm은 바와 레스토랑, 서점, 호텔, 갤러리를 결합시킨 예술 농장인데 일 년에 4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갈 만큼 인기다. 하우저 앤 워스는 호텔 업계에도 진출했는데 스코틀랜드의 가장 핫한 호텔 중 하나인 파이프 암 Fife Arms을 소유하고 있다. 루이스 부르주아의 거미가 놓여 있는 중정과 루시언 프로이드 Lucien Freud의 작품이 걸려 있는 패밀리 룸, 장 언리 Zhang Enli가 직접 그린 천장, 1만 4천 개의 앤티크 가구로 가득 찬 예술적인 호텔에서 오프로드와 스코틀랜드 위스키를 즐기는 삶이 바로 하우저 앤 워스가 컬렉터들에게 제시하는 모델이다. 과연 하우저 앤 워스의 파리 갤러리는 어떤 모습일까? 호사가들은 벌써부터 하우저 앤 워스가 들어설 자리가 어디일지를 점쳐보느라 바쁘다.
메이저 갤러리의 파리 입성에는 배경이 있다. 바로 현 유럽과 영국의 뜨거운 이슈인 브렉시트다. 브렉시트가 아직 발효되지 않았으나 줄줄이 짐을 싸 런던을 떠나는 정보 통신이나 금융 계열 회사들처럼 가고시안도, 즈위너도 하우저 앤 워스도 브렉시트를 대비해야 한다. 유럽 컬렉터들로서는 굳이 복잡한 세관 절차를 거쳐가며 영국에서 작품을 거래해야 할 이유가 없다. 갤러리들에게 파리는 런던을 대체할 수 있는 유일 무이한 선택지다. 파리로서는 어부지리도 이런 어부지리가 없는 셈이다. 그동안 파리에서 현대 미술이 기를 펴지 못했던 것은 보수적인 성향 탓도 있었지만 프랑스 특유의 박물관 시스템 때문이기도 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루브르나 퐁피두, 오르세 박물관은 모두 프랑스 정부에서 일정 자금을 보조 받는 국립 박물관이다. 자연히 작품과 전시를 선택하는 데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후원금을 모집하는 데도 소극적이다. 해마다 갈라 디너를 열어 후원자들을 융숭히 대접하는 구겐하임이나 테이트 모던은 후원 덕분에 두둑해진 주머니로 엄청난 예산을 필요로 하는 전시를 과감하게 개최하고 더 많은 관람객을 끌어모은다. 반면 퐁피두 센터는 리처드 세라같은 스타 아티스트의 대형 작품을 전시할 공간도 예산도 없다.
이런 분위기에 전환을 가져온 첫 신호탄은 2014년 블로뉴 숲에 자리 잡은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이었다. LVMH라는 거대한 럭셔리 그룹을 배경으로 둔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은 늘 주머니가 비어 있는 국립 박물관들이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과감한 전시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오래도록 오르세 박물관이 노리고 있었으나 예산이 부족해 실행하지 못했던 프로젝트인 러시아의 <시츄킨 컬렉션>전시는 무려 1백20만 명의 관람객을 모아 2016년 최대의 히트 전시로 등극했다. 여기에 내년 6월 중순이면 LVMH 아르노 회장의 라이벌인 케어링 그룹 피노 회장의 현대 미술관이 문을 연다.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의 선택이 프랭크 게리였다면 피노 회장의 선택은 안도 다다오다. 새로 들어설 피노 미술관은 3천 제곱미터의 전시실과 옛 건물 특유의 높은 천장을 이용한 압도적인 규모의 사진과 비디오 설치 작업 전문 전시관을 선보인다.
피노 현대 미술관이 문을 열고, 세 마리 상어가 모두 한 수족관에 들어오면 파리에서는 어떤 현대 미술 신이 펼쳐질까?현대 미술이라는 험난한 생태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작은 물고기에 해당하는 갤러리들은 서서히 파리 외곽으로 이전을 노리는 분위기다. 마침 파리 외곽으로 교통을 확장하는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또한 파리 중심지의 엄청난 월세를 피해 스탈린그라드나 벨빌 같은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동네들이 핫한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 수족관에서 누가 승자가 될까? 그동안의 역사가 증명했듯 뚜껑을 열어봐야 알 일이다. 글 / 이지은(오브제 경매사)
- 에디터
- 김아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