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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에서 시작된 이야기

2020.01.12GQ

진한 과일 향과 달콤함이 발렌타인 싱글 몰트 글렌버기 12년의 전부는 아니다. 맛과 향으로는 짐작할 수 없는 깊고 너른 이야기가 있다.

발렌타인 싱글 몰트 글렌버기 12년.

글렌버기 증류소의 중류기.

발렌타인 글로벌 브랜드 앰배서더 켄 린지.

스페이사이드에 위치한 글렌버기 증류소.

위스키를 마신다. 스코틀랜드를 생각한다. 달력의 마지막 장과 첫 장이 맞닿는 계절을 이 두 가지 행위로 보내고 있다. 희미했던 입김이 짙어지는 것을 신호로 위스키에 자꾸 손이 가는 건 하루이틀 얘기가 아니다. 이와 달리 위스키에 입을 맞출 때마다 스코틀랜드가 떠오르는 것은 최근의 일이다. 막연히 스치는 단어가 아니라 어떤 장면이 자꾸자꾸 눈에 밟힌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발렌타인 싱글 몰트 글렌버기 12년’을 마시고 스코틀랜드를 생각한다. 글렌버기 12년은 발렌타인에서 선보인 새로운 싱글 몰트위스키다.

이 소식에 신선함과 의아함이 들지도 모르겠다. “블렌디드 위스키의 대명사 격인 발렌타인에서 싱글 몰트 원액으로 만든 위스키를 출시했다니.” 만약 그랬다면 뒤처진 것이다. 발렌타인은 이미 2017년 브랜드 최초의 싱글 몰트위스키를 세상에 내놓은 바 있다. 글렌토커스 15년, 글렌버기 15년, 밀튼더프 15년. 브랜드의 200년 역사에 첫 번째로 기록된 싱글 몰트위스키다. 기념비적인 제품인 만큼 그냥 만들 리 없다.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증류소를 골라 선발진을 꾸렸다. 스코틀랜드의 스페이사이드 지역에 위치한 글렌토커스, 글렌버기, 밀튼더프 증류소다. 세 곳 모두 발렌타인을 블렌딩할 때 고유의 스타일을 만든 주요 원액들의 생산지다.

위스키 애호가들은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기존 발렌타인 위스키에 숨겨진 맛과 향을 따로 떼어 음미하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사유하는 즐거움을 누렸다. 환대 속에 싱글 몰트 위스키에 첫걸음을 내딛었던 발렌타인이 싱글 몰트 글렌버기 12년을 새롭게 출시했다. 글렌버기 증류소는 세 증류소에서도 으뜸으로 평가받는 곳이다. 출시 전 스코틀랜드로 가서 증류소를 방문해 글렌버기 12년을 맛봤다. 잔을 코 가까이 끌어당기자 위스키가 출렁이며 깜짝 놀랄 정도의 진한 과일 향을 쏟아냈다. 달콤함에 취하는 사이 부드러운 질감이 금빛으로 소용돌이치며 입 안을 채웠다. 위스키를 접하기 시작한 이들에게도 부담스럽지 않은 향과 맛. 첫 모금에서 경험한 달콤한 향과 거칠지 않은 질감은 우연이나 착각이 아니었다. 모임이 잦은 연말, 글렌버기 12년을 고민 없이 추천했고, 챙겨 갔다. 그때마다 의식을 치르듯 첫 경험의 순간이 재차 환기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스코틀랜드에서 마주하고 각인된 몇 가지 장면이 누군가 불러들인 것처럼 내내 생각났다. 계절이 바뀌고 위스키를 마시는 핑계거리 하나가 줄어들기 전에 (새로운 핑계가 생기겠지만) 그것들을 여기에 덧붙인다.

― 스코틀랜드에서 발렌타인이란 단어를 맨 처음 듣게 된 건 날씨 때문이었다. 에버딘 공항에 도착했을 때부터 내리던 비는 하루 종일 이어졌다. 콧수염을 멋지게 빗질한 브랜드 매니저가 이 지역에선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영 발렌타인 Young Ballantines’라 부른다고 했다. 비가 지하수로 스며들거나 강물을 채워 결국 위스키를 만드는 물로 쓰인다는 논리다. 비와 위스키를 이렇게 연결 짓다니. 위스키의 고장답다.

― 스코틀랜드는 1494년부터 위스키를 생산했다. “유서 깊은 패션 브랜드가 장인들의 기술을 축척해 최고의 품질을 보장하듯이 스카치 위스키는 오랜 시간 완성된 기술과 최상의 맛을 갖췄다.” 발렌타인 글로벌 브랜드 앰배서더 켄 린지 Ken Lindsay의 설명이다. 그는 위스키 말고 스코틀랜드의 역사와 문화, 서울, 이태원에 대해서도 박식하다.

― 스코틀랜드가 위스키의 고향이라면 스페이사이드는 위스키의 심장부다. 스코틀랜드에는 120여 개의 증류소가 있는데 그중 60개 이상이 이곳에 터를 잡고 있다. 발렌타인의 자양분과 같은 글렌토커스, 글렌버기, 밀튼더프 증류소도 30킬로미터 내에 밀집해 있다.

― 스카치위스키에 단골처럼 쓰인 글렌 Glen은 게일어로 계곡이라는 뜻이다. 깨끗하고 좋은 물은 보리, 효모와 함께 위스키 원액의 주요 원료. 과거 증류소들은 계곡물을 끌어다 썼다. 아무튼 증류소의 경치가 끝내준다는 얘기다.

― 글렌버기 증류소는 발렌타인 17년, 21년, 30년의 주축이 되는 싱글 몰트를 생산한다. 1810년에 세워졌고 21세기에 이르러 낙후된 시설을 대대적으로 재정비했다. 증류기는 너비가 넓고 목이 짧은 게 특징이다. 폭이 넓을수록 보디감이 꽉 차고 목이 짧을수록 라이트한 원액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 글렌버기 증류소에선 아메리칸 오크통으로 위스키를 숙성한다. 이미 2~3년 정도 사용한 것만 골라 쓴다. 이때 오크통 내부를 숯으로 그을리는 과정을 거친다. 바닐라 향과 과일 향을 돋우고 위스키의 색을 진하게 만들기 위한 밑작업이다.

― 숙성 과정에서 위스키는 조금씩 자연 증발한다. 막을 수 없는 자연의 섭리. 이를 ‘엔젤스 셰어 Angel’s Share’라는 우아하고 멋진 말로 부른다. 하지만 17년, 21년, 30년씩 숙성을 하는 동안 야금야금 날아가는 양은 그리 아름답지 못하다. 이를테면 30년 동안 숙성된 위스키는 50퍼센트 이상이 사라진다. 그러니 귀할 수밖에.

― 2017년 발렌타인이 브랜드 최초로 선보인 3종의 싱글 몰트위스키도 차례로 맛봤다. 글렌버기 15년은 벌꿀의 달콤함과 진한 과일 향이 입 안을 감싼다. 밀튼더프 15년은 계피의 은은하고 스파이시한 풍미와 꽃향기가 인상적. 글렌토커스 15년은 시트러스 향과 레드 베리류의 향이 어우러진다.

― 발렌타인은 싱글 몰트위스키에 스모키한 향을 입히지 않는다. 아는 척을 하더라도 스모키하다는 표현은 가급적 쓰지 않는 게 좋다.

― 글렌버기 12년을 시음하는 시간, 켄 린지는

“전 세계 최초로 글렌버기 12년의 맛을 공개하는 자리”라고 선포했다. 향을 음미하고 첫 모금을 마신 뒤 나를 포함해 그곳의 사람들은 짜기라도 한 듯 똑같이 말했다. “향이 끝내주는데!” 글렌버기 12년은 입술을 적시기 전부터 진한 과일 향이 밀려왔고 감미로운 토피 애플의 달콤함이 입 안 가득 어우러졌다. 15년산과 동일한 아메리칸 오크통에서 숙성되어 바닐라 향도 풍부하게 느껴진다.

― 다시 발렌타인 글로버 브랜드 앰배서더 켄 린지에 대한 이야기. 그는 지금껏 내가 만난 유럽인들 중에서 가장 유머러스하고 엄청난 에너지를 지닌 사람이다. 호탕하게 웃고, 주위 사람들을 자지러지게 만든다. 위스키가 곁에 있으면 말은 더 많아졌다. 바꿔 말하면 그는 발렌타인에 대한 방대한 지식에 유머를 덧씌어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열정적으로 전파했다. 말은 쉽지만 경험이 바탕되지 않으면 어려운 일. 발렌타인이 유럽권 1위이자 세계 2위로 성장한 데는 전 세계 75개국을 돌며 브랜드를 알린 이 남자의 지난 시간이 뒷받침했다. 무려 발렌타인 30년을 만들 수 있는 시간이다.

    에디터
    김영재
    포토그래퍼
    이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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