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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 실렌시오

2020.02.24GQ

그럴 만해서, 어느 해 4월을 베니스 비치에서 보냈다. 해변은 역시 7월이 아닐까도 생각했지만 오래 고민하진 않았다. 각종 렌털 사이트를 처절하게 뒤진 끝에 베니스 비치에 바짝 닿아 있는 집을 구했다. 그야말로 문만 열면 해변이고 손만 뻗으면 바다였다. 단순하고 청결한 가구와 관리가 잘된 관엽 식물들, 장식품이 적은 거실이 마음에 들어서 흥정도 안 하고 계약을 했다. 집주인은 서른 중반의 발렌틴(프로필에 의하면)이란 치과 의사였는데 스윗하고도 엄격했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의 맛있는 빵집, 유명한 마멀레이드 가게, 목요일마다 할인 행사를 하는 와인숍 목록을 메일로 보내는 동시에 티스푼과 욕실의 타월 개수, LP 리스트까지 적은 엑셀 파일을 ‘내가 기억하는 한’이란 볼드체 파일명으로 찰싹 첨부하는 식. 렉스 공항에 내려서 차부터 빌렸다. 구형 스즈키 픽업을 생각했지만 정작 고른 건 메탈릭 실버 메르세데스였다. 엑셀이 살짝 녹은 고급 버터처럼 다소 느끼하면서도 스무스하게 밟히는 차를 몰면서 엘에이에서 운전을 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봤다. 도대체 좌회전은 어느 타이밍에 해야 할지 오리무중에(엘에이 시내 도로 대부분이 비보호 좌회전), 내비게이션의 무책임함과 당당함은 아연실색이란 말조차 부족했다. “도착했어. 목적지는 너의 왼쪽에 있어. 끝.” 중앙선 너머로 아련하게 보이는 저 곳에 가려면 유턴을 해야 하는데 유턴 신호는 샌프란시스코까지 가야 비로소 나올 것 같았다. 그렇더라도,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집은 예상보다 훨씬 좋았다. 발렌틴이 주방 아일랜드에 도어스 앨범과 함께 “짐 모리슨의 도어스가 탄생한 베니스 비치에 온 걸 환영해”라는 촌스러운 웰컴 메시지를 적어둔 걸 빼고는 모든 게 훌륭했다. 첫날 저녁은 해변의 핫윙 가게에서 산 넋이 나갈 정도로 시고 매운 윙 몇 조각과 맥주를 모래밭에 앉아서 먹었다. 해변은 밤에도 소란스러웠다. 훨씬 좋아하는 산타모니카 비치가 아닌 베니스 비치를 택한 건 조용한 곳에 있고 싶지 않아서였다. 당시엔 극도로 단조로운 생활을 원했지만, 한편으로는 나와 상관없는 소음이 필요했다. 때묻은 소매만 봐도 서글퍼지고 매번 신호를 놓쳐서 끝도 없이 직진만 했던 시절. 머무는 동안 더러 늦잠을 잤고, 아침으로는 뜨겁고 진한 커피 두 잔과 커다란 플레인 베이글에 버터와 크림치즈를 이 센티 두께로 발라 먹었다. 낮에는 무조건 해변에 있었는데 두 개쯤 먹은 감자튀김을 봉지째 낛아챈 것도 모자라 어깨에 똥까지 싸고 내빼는 새들을 퇴치하기 위해 가볍고 둘둘 잘 말리는 인터뷰 매거진 몇 권을 적극 활용했다.(최고 활약상은 엘르 패닝 커버에게!) 밤에는 커티삭을 병째 들고 해변의 끝에 앉아서 파도를 구경했다. 밤바다에서 만난 갈매기는 너무 하얗고 분명해서 마치 조형물 같았고, 어쩐지 무서운 기분이 들어서 30미터쯤 뒤에 있는 집을 자꾸 돌아보곤 했다. 가끔 서퍼들 사이에 섞여 피시 타코를 먹거나 통창이 시원한 필라테스 스쿨에서 여자들이 공을 붙들고 하소연하는 걸 구경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계획도 일정도 없는 빈 날들이었다. 게으르게 지내는 데도 살은 매일 더 빠져서 무릎은 나날이 뾰족해지기만 했다. 도로와 신호 체계에 익숙해진 후에는 차를 몰고 제법 멀리까지 나갔다. 캘리포니아 1번 국도를 달리다가 이름 없는 해변에 차를 세우고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 에 나오는 구절을 공들여 읽었다. “소중한 사람한테서 온 편지라 바람에 날려가면서 읽는 거예요.” 외출하지 않는 날엔 JBL 스피커로 요요마의 ‘아베 마리아’와 제프 버클리의 ‘할렐루야’를 들었다. 그런다고 ‘홀리한’ 기분은 도대체 들지 않았지만. 숱한 모래알과 미지근하고 짭짤한 바람에 피부가 완전히 그을려서 팔목에 찬 실버 주얼리가 아주 예뻐 보일 때쯤 베니스 비치를 떠났다. 트루먼 카포티의 말처럼 ‘섬세하고 변하기 쉽고 다치기 쉬운 아름다운 4월’을 캘리포니아에서 지낸 기억. 언제나 같은 사람을 맹렬히 사랑하는 동시에 지독하게 미워했다. 그래서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지금, 고요한 마음이 좋다. 실렌시오!

    에디터
    강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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