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두 가지 너드가 있다. 섹스가 가능한 너드(Nerd), 불가능한 너드. 영화나 드라마에는 주로 너무나 가능한 너드들이 이렇게 등장한다.
제시 아이젠버그가 흰 양말을 벗을 때 : <어드벤처 랜드>
‘너드’라는 단어가 인간이 된다면 두 말 할 것도 없이 제시 아이젠버그다. 모든 영화에서 너드미를 보여주지만 그가 놀이동산 알바로 등장했던 <어드벤쳐 랜드>가 단연 최고다. 여기서 제시는 내가 제일 처음으로 밟고 싶은 첫 눈 같은 남자랄까. ‘Game’이 적힌 티셔츠에 청바지, 곱슬머리에 구부정한 자세. 극 중에서 한 번도 섹스를 해본 적이 없다는 설정도 정복욕을 배가 시킨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쏟아지는 비를 맞고 흠뻑 젖은 제시가 타월을 두르고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키스는 나누는 신에서 섹시한 너드의 끝을 보여 준다. 입맞춤 한 번 하고 “괜찮아?”를 두 번 묻는 모습, 서둘러 나머지 옷을 벗는데 마지막으로 새하얀 면 양말을 얌전히 벗을 때, 참을 수 없는 섹시함을 느꼈다. JEH, 31세, 회사원
오티스가 똑같은 아우터 입고 나올 때 :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
요즘 잘생긴 너드 역할은 에이사 버터필드가 전담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에서 성 상담사인 엄마 덕분에 모태 솔로이면서 이론에만 빠삭한 십대 소년 오티스를 연기한 덕분에 에이사는 떠오르는 너드의 아이콘이 됐다. 구글에서 에이사 이미지를 검색하면 오티스를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못생김을 연기하는 편. 평소엔 참 잘생겼다가도 오티스의 시그니처 룩인 삼색 점퍼를 입는 순간 너드가 된다. 어린 시절 보던 순정만화에서 주인공이 머리 풀고 안경 벗으면 초미녀가 되는 것처럼. 그래서 일까. 시즌 내내 죽어라 입고 다니는 그 아우터만 보면 벗기고 싶어진다. 초미남이 될 걸 아니까. CES, 27세, 프리랜서 디자이너
찬열이 말을 더듬을 때 :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을 끈기있게 볼 수 있었던 건 ‘으른’의 섹시함을 갖춘 현빈 때문이 아니었다. 만 17세 천재 프로그래머, 증강 현실 게임을 만드는 ‘너드’ 찬열 때문이었다. 첫 장면부터 거의 마지막 등장까지 시종일관 누군가에게 쫓기고,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연기했다. 동그랗게 뜬 눈과 동그란 안경, 헝클어진 머리, 너드들의 유니폼 같은 어두운 색 후드 점퍼까지. 성격 좋은 재벌 같은 엑소 찬열에게는 이렇게까지 강렬하게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극 중에서 떨리는 손으로 공중전화기를 붙잡고 다급하게 말을 더듬으며 “그라나다에서 만나요!”를 외치던 순간, 엄청 괴롭히고 싶어졌다. KNH, 29세, 사진가
조현철이 야근 할 때 : <아르곤>
영화 <차이나타운>의 어리숙하면서도 섬뜩한 ‘홍주’일 때도 사실 맘에 들었는데, 드라마로 넘어오더니 완전히 내 취향을 저격했다. 출연작 마다 어리숙한 너드로 등장했지만 <아르곤>에서 낙하산 기자로 나오던 조현철이 가장 섹시하다. 셔츠는 되도록 맨 윗단추까지 다 채우고, 사원증은 꼭 목에 걸고 다니는 금수저 허당 기자. 맨날 넘어지고 제대로 하는 일은 하나 없지만 게으르진 않아서 꼬박꼬박 야근도 한다. 늘상 그렇듯 일이 안 풀려서 혼자 머리를 쥐어 뜯으며 야근할 때, 야식으로 유혹하고 싶다. 집에 못 가게. LKH, 35세, 자영업
에디 레드메인이 두리번 거릴 때 : <신비한 동물 사전>
에디 레디메인이 수줍게 웃을 때 마다 괜히 나도 따라 웃는다. 섬세하게 연기하는 모습도 좋지만 뭔가 길치인 것 같은 모습을 보여줄 때가 더 좋다. <신비한 동물 사전>에서 특히나 약간 어리숙함을 보여준다. 커다란 가방을 들고 어기적 어기적 걷다가 또 괜히 두리번 거릴 때, 아주 헤드락을 걸고 붉은 빛깔 머리 카락을 흐트러뜨리고 싶어진다. 그럼 또 영국 악센트로 “무슨 일이세요? 괜찮으신가요?” 묻겠지. 이런 상상을 하면서 보다보니 나에게 <신비한 동물 사전>은 19금 영화 그 자체다. JML, 32세, 브랜드마케터
닥터 리드가 이상하게 뛸 때 : <크리미널 마인드>
장수 미드 <크리미널 마인드>의 ‘닥터 리드’는 다양한 학위를 갖고 있는 IQ 187의 천재 요원이다. 시즌 초반이 특히나 더 매력적인데, 일단 비주얼부터 혁명적이다. 깡 마른 몸에 체크 무늬 셔츠, 니트 조끼를 꼭 갖춰 입고 발목이 댕강 드러나는 짧은 팬츠에 의외로 화려한 양말을 매치해 너드 룩을 완성했다. 이 차림을 하고 어디 급하게 뛰어갈 때가 진짜 심쿵인데, 아무도 총을 쏜 적이 없는데 총 맞은 사람처럼 달려간다. 너무 이상해서 참 매력적인 닥터 리드는 시즌을 거듭할 수록 너드미 대신 신경질적인 박사님으로 성장한다. 그래서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초반 시즌 이상하게 달리는 닥터 리드를 보곤 한다. LYJ, 36세, 카피라이터
- 에디터
- 글 / 도날드 도(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