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는 여전히 봉준호이고 박찬욱이며, 이창동이고 김지운이다. 자기만의 인장을 장착한 새로운 감독을 만나는 일은 점점 드물어진다.
충무로 감독 직군을 주인공으로 한 ‘응답하라’ 시리즈가 만들어진다면, 가장 유력한 출발 배경은 1996년이 아닐까. 강제규 감독이 <은행나무 침대>로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가능성을 흘리고,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들고 나온 신예 홍상수의 영화 문법에 시네필들과 평단이 빠져들고, 청년 봉준호와 장준환이 만든 단편영화 <지리멸렬>과 <2001 imagine>이 해외영화제 순방에 나서며 이들의 미래를 도모케 했던 ‘응답하라 1996’ 말이다.
이듬해엔 소설가였던 이창동이 <초록물고기>로 단박에 감독으로 성공적으로 전향했고, 송능한 감독의 <넘버 3>가 충무로 연기파 넘버 3로 성장할 한석규, 최민식, 송강호와 함께 주목받았으며, 전국 거리에선 <접속> OST가 흘러나왔다. 1998년엔 <8월의 크리스마스>로 등장한 신예 허진호 감독이 멜로 장르에 깃발을 내리꽂았는데, 10년 백수 생활 내공을 담은 골 때리는 작품 <조용한 가족>을 들고 나온 김지운의 등장도 이에 못지않았다. <쉬리>로 뜨거웠던 1999년을 지나고 맞은 새천년은 박찬욱 감독의 회심의 심폐 소생기였다. 데뷔작 <달은… 해가 꾸는 꿈>과 <삼인조>로 ‘폭망’의 흑역사를 이어나가던 그는 <공동경비구역 JSA>로 반전을 일궜다. 2000년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갑툭튀’한 류승완 감독이 충무로에 신선한 어퍼컷을 날린 해이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영화계의 분기점이라 할 2003년이 당도했다. 조폭 코미디의 잔해들 속에서 박찬욱의 <올드보이>,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 김지운의 <장화홍련>, 장준환의 <지구를 지켜라> 등의 수작이 쏟아져 나온, 한국영화 에너지가 기이하게 뜨거웠던 해. 그러니까, 호시절이었다. ‘망한 감독’에게 재도전의 기회가 주어지고,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돌파하려는 감독들의 야심이 들끓고, 강우석, 차승재, 심재명, 오정완 등 ‘미친 거 아니야?’ 싶은 기획을 밀어붙이는 프로듀서들의 기세가 남달랐던. 유감스럽지만 ‘응답하라 1996’은 여기서 끝이다. <용서받지 못한 자>의 윤종빈과 <추격자>의 나홍진이 명맥을 이어주긴 했으나, 자기만의 인장을 장착한 감독을 만나는 일은 점점 드문 일이 돼갔으므로. 그래서 한국영화는 여전히 봉준호이고 박찬욱이며 이창동이고 김지운이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나. 왜 유독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에 새로운 물결의 출현이 몰려 있는지. 천재들이 같은 시기에 우연처럼 태어난 것일까? 박찬욱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지금의 시스템이었다면 <올드보이>는 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데뷔작을 실패한 (나 같은) 감독에게 그 누구도 투자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결국 재능이라고 하는 것들은 시대를 잘 만나야 하는 게 있죠.” 봉준호 감독의 견해 역시 다르지 않다. “지금 젊은 감독이 <플란다스의 개>나 <기생충> 시나리오를 들이민다면 과연 투자를 받을 수 있을까를 냉정하게 따져보면 힘들 것 같습니다. 2000년대 초에는 독립영화와 메인 스트림 간의 상호 침투, 좋은 의미에서 다이내믹한 충돌이 있었는데 지금은 젊은 감독들이 모험적인 시도를 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요.”
타석에 들어서서 안타를 치는 건 필경 감독의 실력이지만,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시스템이다. 2000년에 들어서면서 한국영화 권력은 창작자에서 대기업 자본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기업의 목적은 이윤 추구다. 관리 기준은 창의성이나 독창성이 아니다. 성공한 영화 데이터, 즉 숫자와 흥행 공식들이다. 그 과정에서 모니터링 제도라는 것도 생겼다. 시나리오 초고는 공장 컨베이어 벨트를 타듯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깎이고 잘려 나가고 가공 처리된다. 이로 인해 확보되는 건 대중성, 사라지는 건 개성이다. 지금의 시스템에서 <살인의 추억>이 만들어졌다면, 범인이 잡히지 않고 끝나는 파격적 엔딩은 가능했을까? 제작비 상승은 안전제일주의를 낳기도 했다. ‘본전이라도 건져야 한다’는 투자자의 욕망이 작품 운신의 폭을 좁혔다. 한국영화가 빤하다는 이야기, 저 장면 어딘가에서 본 것 같다는 이야기, 위기라는 이야기가 그사이 어딘가에서 흘러나왔다가 대안 없이 사라졌다가 또 흘러나오기를 동어 반복하면서 ‘위기’라는 말 자체가 양치기 소년이 돼버렸다. “한국영화는 뭐 맨날 위기래?”
그런데 이거, 심각하긴 심각하다. 걸출한 신인이 등장하지 않는 것을 넘어 감독의 이름조차 기억에 남지 않는 영화들이 최근 부쩍 연착륙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7년 영화 <리얼>은 이에 대한 리얼한 증명이었다. 촬영 도중 감독이 교체되는 것도 모자라, 연출 경험이 전무한 제작사 대표가 사령탑에 대신 앉았다. 결과는 잘 알려진 대로다. <리얼>은 ‘불후의 망작’ <클레멘타인>과 함께 묶이는 비운의 작품이 됐다. 감독이 하차하자 주연 배우이자 제작자인 이범수가 메가폰을 잡고 한동안 현장을 지휘했던 <자전차왕 엄복동>은 충무로에서 감독의 존재 이유를 묻게 하는 일종의 사건이었다. 감독이 사라져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이 영화의 자신만만함은 부메랑이 되어 ‘UBD(17만 관객수)’라는 신조어를 탄생시켰다. 조금 고약한 말이지만 이 영화의 흥행 참패가 나는 안쓰럽지 않다. 흥행했다면 ‘감독이 잠시 사라져도 영화는 흥행할 수 있다’는 전례가 만들어지는 것일 텐데, 향후 일어날 일들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봉준호 감독이 언급한 독립영화와 메인 스트림 간의 상호 교류는 어떠한가. 이전보다 줄어든 것도 문제지만, 더 안타까운 건 과정이다. 자기만의 색깔로 독립영화에서 인정받은 감독이 상업영화에 발탁된 후 그저 그렇고 그런 기획영화로 배신을 때리는 상황을 우리는 적지 않게 목격했다. 대기업 시스템에 어쩔 수 없이 휘둘렸든, ‘상업’ 영화라는 것을 지나치게 신경 쓴 나머지 감독 스스로가 자기 검열을 했든 간에 어쨌든 잘못된 만남이고 위험한 유혹이다.
물론 자신의 개성을 지켜내려는 젊은 감독들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런 점에서 <파수꾼>으로 뜨거운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윤성현 감독이 차기작 <사냥의 시간>을 내놓기까지 걸린 시간이 무려 10년이라는 점은 짚고 넘어갈 만하다. 그는 조금 더 일찍 차기작을 내놓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거나 그러지 ‘않’았다. 투자배급사와의 의견 차이로 프로젝트 몇 개가 깨졌다는 소식이 들렸는데, 아마 하지 않은 것은 투자사 입맛 맞추기였을 것이고, 하지 못한 것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과 투자사가 좋아하는 것 사이의 조율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윤성현의 뚝심이든 아집이든 또 다른 무엇이든, 확실한 건 영화를 극장에 빨리 내걸고 싶어 적당히 타협한 냄새가 이 감독에겐 없다. <사냥의 시간>이 아직 국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상황에서 이것은 섣부른 판단일 수 있다. 바라건대, 시류에 편승한 반들반들한 쪽보다 불균질해서 오호가 나뉘더라도 그만의 색깔이 팽팽한 작품이길 기원해본다.
예술성과 상업성 사이의 유연함이라면 조성희 감독의 행보도 지켜볼 필요가 있다. 단편 <남매의 집>과 독립 장편 <짐승의 끝>에서 독창적인 결을 보여줬던 그는 첫 상업 장편 <늑대소년>으로 관객에게 환대받았다. 전작들에 비해 주위 시선을 많이 의식한 듯한 흔적이 감지됐으나, 두 번째 상업 장편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에서 자신의 창의력이 대자본 안에서 주눅 들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며 신뢰감을 회복한 상황. 조성희 감독의 차기작은 송중기가 올라탄 <승리호>다. <우리들>과 <우리집>으로 독립영화 필드에서 ‘윤가은 유니버스’를 형성한 윤가은 감독을 언급하지 않는 건 직무유기 같다. 세상에 감독은 많지만, ‘유니버스’라는 수식어까지 부여받은 이는 흔치 않으니까.
영화는 돈이 많이 드는 분야이고, 이를 향유하는 건 불특정한 대중이다. 돈의 흐름과 대중의 취향을 생각하지 않고 영화를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영화는 자본과 싸워 자신의 인장을 지켜내려 한 이들이 있었기에 진화해왔고 존경심을 완전히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시네마라는 단어 하나로 갑론을박할 수 있는 시장이 이곳 아니었던가. 그래서 우리에겐 더 필요하다. 제2의 누군가가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비전을 일궈낼 새로운 피의 수혈이. ‘응답하라 1996’을 이을 연작이. 글 / 정시우(칼럼니스트)
- 피쳐 에디터
- 김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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