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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 세탁의 시간

2020.05.20GQ

주말에 셔츠를 왕창 세탁했다. 어쩌다 골치 아픈 일이 생겼거나, 어젯밤에 분명히 했어야 하는 말을 못 하고 돌아온 분풀이는 아니었다. 스트레스를 다림질이나 욕실 청소, 세탁과 세척으로 푸는 알뜰하고 가정적인 타입도 아니고. 모처럼 쾌청한 일요일이었고 오랜만에 숙취 없이 눈을 떴으며, 그 맛에 홀딱 반해 밤마다 오븐에 구워 먹은 콜리플라워 냄새가 집 안에 납작하게 배어 있는 게 거슬렸을 뿐이다. 가정생활에서 생기는 각종 냄새를 빼는 데 대용량 세탁만큼 효과적인 방법도 없다. 향이 좋은 세제와 섬유 유연제를 대범하게 사용해서 얇은 면 제품을 세탁한 후 천천히 말리면 집 안에 청결하고 예쁜 향이 부드럽게 퍼진다. 이때 열 수 있는 문은 다 열어두어야 하고, 빨래 사이의 간격은 넓을수록 좋다. 그러니 세탁을 결심하기 전에 날씨와 공기 체크는 필수, 건조대를 여러 개 펼 수 있는 충분한 공간 확보 역시 중요하다. 세제류를 좋아해서 이것저것 많이 써본 결과, 향은 ‘올 마이티 팩’ 캡슐이 최고다. 섬유 유연제 성분이 들어 있는 올인원 타입이지만 여기에 매번 바운스 티슈도 몇 장 더 넣는다. 세제를 이처럼 과다하게 쓰는 것에 대해선 학계의 의견이 분분하고, 옷감이 상한다든지 오히려 세탁 기능이 떨어진다든지 부정적 얘기도 많지만, 그러든지 말든지. 섬유는 어차피 세월을 따라 변하고, 빨래할 때마저 최적과 효율을 따지고 싶진 않다. 사는 게 피곤해서. 아무튼 계절에 맞는 셔츠를 꺼내놓고 보니 거의 화이트, 블루, 연한 회색에 포플린과 옥스퍼드 소재였다. 창백하고 무뚝뚝해 보이는 더미 안에는 실크도 없고 원색도 없고 무늬도 없다. 더러 스트라이프가 몇 장 난처한 듯 껴 있을 뿐. 나이 들어서도 버튼다운 셔츠와 데님 재킷, 흰 운동화가 어울리는 여자로 늙고 싶었다. 로렌 허튼처럼. 그렇게 입고 흰 머리를 깃발처럼 날리면서 검정 포르쉐 박스터에서 내려, 보행자 신호에도 냉큼 우회전을 하라고 경적을 울려댄 버릇 없는 운전자의 따귀를 찰지게 올려 붙이고 싶었다. 비록 그러자고 사들인 무수한 셔츠는 옷장 안에서 좀벌레와 함께 오손도손 낡고 있지만. 휴일 오전, 낮게 그르렁거리는 세탁기 소음과 함께 셔츠가 한데 뒤섞여 맹렬하게 돌아가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아주 가볍고 무용한 시간을 보낸다. 머지않아 세탁물을 꺼내고 재빨리 널어야 하니 시간이 많이 들거나 집중해서 해야 하는 일은 애초에 시작할 수 없다. 그 강제적이고도 온당한 변명이 끔찍하게 좋다. 에스프레소를 진하게 내리고 샤블리를 찰랑하게 따르고 꼬냑도 크게 한잔. 음료 사이에 캐러멜이나 호두 같은 것도 조금 먹는다. 주로 먹고 마시면서 그저 멍청하게 있는다. 창밖으로 보이는 교회 첨탑 위의 새를 관찰하거나 새로 산 휘카스 움베라타 화분 잎이 왜 찢어져 있는지 배송 과정을 유추해보는 정도는 괜찮다. 책이든 텔레비전이든, 활자나 영상을 보는 건 지긋지긋해서 보컬이 좋은 음악만 틀어둔다. 멀리서 다른 사람이 듣고 있는 라디오 소리처럼 작게. 조원선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몹시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이렇게 풍부한 듯 모자라며 윤택하고도 건조한 소리가 있다니. 롤러코스터 시절보다는 혼자서 만든 노래들을 더 자주 듣는다. ‘마음, 얼음처럼 단단하게’와 ‘아무도, 아무것도’. 이 노래를 부를 때 조원선의 시옷과 지읒 발음이 좋다. 따뜻하게 데워진 공기 사이로 바람이 조금씩 불고 조원선은 “제풀에 식어버릴 철없는 사랑에 나는 왜 생각 없이 전부를 걸었나”라고 노래한다. 마침 세탁 종료를 알리는 발랄한 부저가 울리고, 동시에 ‘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편집장
    강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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