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 제도는 폭력의 역사마저도 너그럽게 포용했다. 태평양에 은밀하게 자리한 지상 낙원으로 서서히 침잠했다.
소년 시절 신문 배달을 했다. 매일 아침 베란다마다 신문을 던졌고, 금요일 오후엔 구독료를 받으러 다녔다. 그중에 곧 무너져 내릴 듯한 주택이 한 채 있었다. 군인처럼 머리를 바짝 깎은 중년 사내의 집이었다. 대화 도중에도 이따금씩 먼 산을 멍하니 바라보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우리의 거래는 늘 같았다. 지난주에 한 차례 방문했는데도 그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나는 단호하게 “2달러 50센트”라고 말하며 영수증을 꺼냈다. 그러면 동물의 작은 이빨을 건네주며 “이거면 되겠네”라고 하곤 잠시 내 눈치를 살피다가 이렇게 덧붙였다. “알락돌고래 이빨이야. 솔로몬 제도에서는 이게 돈이란다. 솔로몬 제도가 어딘지 아니? 태평양에 숨겨진 낙원인데.” 내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이빨을 돌려주려고 하면 그제야 주머니에서 동전을 뒤졌다. 나중에 아버지를 통해 들은 바로는 그가 2차 대전 당시 태평양 전선에 투입된 파일럿이었고, 솔로몬 제도 어딘가에 추락했다고 한다. 고향으로 귀환했지만 트라우마 때문에 변변한 직장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로부터 몇십 년이 지난 지금, 솔로몬 제도를 향해 떠나는 나는 그때 그 남자를 떠올린다.
솔로몬 제도는 1천여 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파푸아뉴기니 동쪽에 있으며 호주 브리즈번에서 북쪽으로 3시간 비행하면 도착하는 거리다. 이 섬들은 16세기까지 ‘킹 솔로몬’으로 불렸다. 금을 찾아 세계를 떠돈 한 스페인 탐험가가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금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힌 그는 정작 섬의 본질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솔로몬 제도엔 금보다 가치 있는 존재들이 빼곡한 데도. 이 지역을 잘 아는 사람들은 태평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솔로몬 제도 중에서도 서쪽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초라한 수도 ‘호니아라’를 지나쳐 ‘문다’로 가는 항공기에 올랐다. 서부 지방에 접어들자 미국인들이 남긴 활주로에 착륙했다.
문다는 도시보단 촌락에 가까웠다. 곧 내려앉을 듯한 가판대와 상점으로 이뤄진 시장이 그나마 번화가였다. 첫째 날 밤, 롤라섬에서 허술한 호텔 하나를 찾아냈다. 객실 앞쪽에 마련된 해먹에 누워 일몰로 인해 살굿빛이 된 구름 사이를 가르는 새들을 지켜봤다. 열대의 밤은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불빛 하나 없는 섬에 어둠이 밀물처럼 차 올랐다. 만개한 꽃의 향기, 미지근한 바람에 서로 부딪치며 소리를 내는 야자수 잎, 노래하는 청개구리들 사이에서 나는 존 다이슨의 ‘The South Seas Dream’에 빠져들었다. 밤은 길고 깊었다.
이튿날부턴 보트를 타고 야생으로의 여정을 시작했다. 굵은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다가도 이내 뜨거운 해가 소생했다. 돛새치가 물 위로 뛰어올랐고, 먼 하늘에선 마른번개가 쳤다. 이 제도에 속한 작은 섬들은 산호초와 터키색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조금 더 큰 규모의 섬은 대부분 가파른 경사가 있는 화산섬이다. 2천 미터 가까이 솟아오른 정상은 수줍은 듯 구름으로 그 형체를 가렸다. 해안가엔 야자수와 맹그로브, 나뭇잎으로 얼기설기 지은 빈집이 있었다. 인터넷, 뉴스, 전기, 차가운 맥주 등 문명의 피조물은 없었다. 대신 앞으로 방문할 섬과 탐험할 숲만이 존재했다.
면적이 마을 하나 정도 될 법한 작은 섬에선 기괴한 경험을 했다. 뱃사공이 해골이 은밀한 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가 나무로 만든 상자의 뚜껑을 들어올리자 해골 세 개가 나타났다. 뱃사공이 그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제 증조부예요. 유명한 요리사였죠.” 무서운 마음에 얼른 자리를 피해 해안가로 돌아가자 상어 두 마리가 바다에서 원을 그리며 유영하고 있었다. 어느새 따라 나온 뱃사공이 뒤에서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옛날 사람들은 상어를 숭배했어요. 상어가 자기 조상의 영혼이라고 믿었거든요.”
19세기 말 무렵 영국 보호령이 내릴 때까지 솔로몬 제도에선 인간 사냥과 식인이 종종 벌어졌다. 그러는 사이 노예 무역이 시작되고, 감염성 질병이 창궐하면서 외지인에게 적대적으로 변해갔다. 한 동안 솔로몬 제도는 지구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었다. 당시 그려진 그림을 보면 서구 사회에서 솔로몬 제도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알 수 있다. 코에 뼈 장식을 한 야만인들이 백인들을 말뚝에 묶어 두고 커다란 냄비에 불을 지피는 그림이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서면서 솔로몬 사람들은 누구도 잡아먹지 않았다. 바다는 물고기로 가득했고, 육지는 비옥했다. 조개와 돌고래 이빨은 화폐로 활용됐다. 부족할 게 없는 삶이었다. 세계사의 흐름과는 관계없이 수세기 동안이나 그들만의 신석기가 이어졌다. 그러나 1942년, 평화롭던 솔로몬 제도는 혼돈의 수렁에 빠진다.
진주만에서 시작된 태평양 전쟁으로 솔로몬 제도 역시 전장이 되어버렸다. 7천여 명의 연합군과 3만여 명의 일본군이 이곳에서 전사했다. 과달카날섬 앞의 해협에선 1942년과 1943년 사이 벌어진 6개월간의 전투로 70여 척의 선박이 침몰했다. 존 F. 케네디가 함장으로 있던 초계 어뢰정이 일본 함대에 의해 반파된 때가 바로 1943년 8월이었다. 이 전쟁 스토리는 20년도 채 지나지 않아 그의 대통령 선거 운동에 상당한 이점으로 작용했다. 긴 전쟁이 끝난 후 솔로몬 제도는 다시 국제 정치에서 잊혀 갔다. 하지만 너무 먼 곳에 고립되어 있던 탓일까. 전쟁이 끝난 줄도 모른 채 숨어 있던 일본군 패잔병들이 이따금씩 정글에서 비틀거리며 빠져나오곤 했다. 마지막으로 생존자가 발견된 게 1989년이었다.
렌도바섬에서 나는 곧 무너질 것 같은 캔틸레버 방식으로 바다 위와 나무 곁에 지은 숙소에 묵었다. 흰 앵무새가 나뭇가지 사이를 유유히 거닐었고, 물총새는 해변을 스치듯 비행했다. 어느 아침엔 맹그로브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유겔레 Ugele 마을을 방문했다. 모든 사람이 기초적인 영어로 인사를 건네며 주변에 모여들었다. 한 여자는 생강과 코코넛, 채소로 구성된 점심 식사를 내게 권했다. 강에서는 소년들이 작은 통나무 카누로 물살을 가르며 경주를 벌이고 있었다.
남태평양에서 가장 큰 무인도인 테테파레 섬에는 소수의 경비원만 남아 있다. 인간 사냥이 문제가 됐던 곳이다. 약 1백60년 전 이곳의 주민들은 지리적으로 더 안전한 섬으로 거처를 옮겼다. 현재 그들의 후손은 본래 그들의 고향이었던 땅을 되찾길 바란다. 벌목꾼들의 약탈로부터 섬을 보호하기 위한 보존 계획이 수립됐고, EU는 방문객을 위한 게스트하우스 건설에 자금을 대는 방식으로 주민을 지원한다. 인간이 떠나자 테테파레 섬은 야생 동물의 천국이 됐다. 듀공이 바닷가에서 무리를 지어 서식한다. 바다거북은 해변에 둥지를 튼다. 거대한 코코넛게가 덤불을 헤집고 다니는가 하면 바다악어는 맹그로브 숲에서 매복 중이다.
나는 인디아나 존스라도 된 듯 덩굴 식물을 헤치며 탐색에 나섰다. 한 시간 정도 흘렀을까. 산호석으로 만든 인공 구조물이 보였다. 깊은 균열이 나 있었고, 갈라진 틈 안에 종을 알 수 없는 동물의 뼈와 박쥐가 가득했다. 섬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 탈출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서 있었던 지점이었을 것이다. 고향을 떠나야 한다는 안타까움과 낯선 곳으로 이주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습한 정글에 아직도 남아 있는 듯했다.
솔로몬 제도에서 반드시 탐험해야 할 곳은 바다 위로 솟은 섬만이 아니다. 다이버들이 꿈에 그리는 성지가 바다 아래에 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다이빙을 했는데, 거대한 산호가 느릿하게 넘실거리는 동시에 물고기 떼가 군무를 추고 있었다. 가오리 무리는 날개를 펄럭이며 푸른빛 속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바다를 더욱 의미 있게 만드는 존재는 전쟁의 유물이다. 점심 도시락을 가득 실은 일본 수송선과 미군 비행기 역시 수장되어 있었다. 미군 조종사의 유골은 꼬리날개 부근에서 발견됐고, 몇 년 전 그의 유일한 혈족인 여동생에게 송달됐다고 한다. 20대에 멈춘 오빠의 유해를 받은 여동생의 나이는 93세였다.
78년 전 당시 솔로몬 제도 사람들이 이 기체들을 보고 받았을 충격에 대해 생각했다. 불길한 엔진 소리를 울리다 저공으로 비행하며 마을을 휘젓기라도 했다면, 주민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바빴을 것이다. 극도의 공포가 몰려오는 순간 고글과 마스크를 쓴 전투기 조종사와 눈이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전 지구적으로 벌어진 폭력 앞에서 그들은 무력했다.
우리가 다이빙을 통해 본 마지막 잔해는 수심 15미터에 있는 또 다른 미국 비행기였다. 다이빙 초반에는 텅빈 해저를 향해 잠수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곧 기체가 유령처럼 조금씩 윤곽을 드러냈다. 떨리는 물결 뒤로 실체를 발견한 순간, 비행기는 날개를 펼친 채 가라앉은 천사처럼 보였다. 바다는 전쟁의 도구를 아름답게 가꿔왔다. 알록달록한 산호가 전투기를 감쌌다. 푸른 불가사리가 날개를 장신구처럼 치장했고, 나비고기는 조종석을 가로질러 헤엄쳤다. 상어 한 마리가 공허한 바닷속을 맴도는 동안 바다 밖에서 흘러 들어온 햇빛이 춤을 추듯 일렁이고 있었다.
나에게 신문을 받아보던 그의 비행기도 근처 어딘가에 수장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하늘이 아닌 바닷속에 자리를 잡고 아름답게 치장을 한 채로. 그 남자에게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집에서 혼자 조용히 삶을 마감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가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태평양에 숨은 이 천국을 생생히 기억했길 바란다. 2달러 50센트를 대신하려고 했던 돌고래의 이빨까지도.
- 글
- Stanley Stewart
- 포토그래퍼
- Alistair Taylor-Yo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