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아일리시는 미국에서 가장 많은 앨범을 팔아 치웠고, 스포티파이에서 60억 스트리밍 횟수를 찍었다. 이토록 엄청난 어린 천재의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빌리 아일리시에 관한 모든 것.
그녀를 보기 전에 소리가 먼저 들렸다. 왁자지껄한 소리가 나더니 그녀의 열일곱 생일에 음반사 대표가 선물한 무광 검은색 닷지 챌린저가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자동차 앞 유리와 운전대 뒤 어두운 곳에서 웬 유령이 우리 쪽으로 밖을 내다보며 찻잔 받침 크기의 푸른 눈을 깜빡였다. 차가 멈췄다. 그리고 지난 일요일 밤 열린 그래미 시상식에서 영예의 ‘올해의 앨범상’을 포함해 5개 부문에서 수상한 빌리 아일리시 파이어리트 베어드 오코넬 Billie Eilish Pirate Baird O’Connell이 별일 아니라는 듯이 큰 쓰레기통 두 개를 치우고 그 자리에 후진으로 주차했다.
분리 수술에 성공한 아일랜드의 샴 쌍둥이였던 아일리시 홀튼 Eilish Holton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 이름을 따온 아일리시는 이곳을 “안전한 장소”라고 불렀다. 집은 아니지만 크게 벗어난 곳도 아니었다. 아일리시는 빠른 운전 속도만큼 껑충 뛰어와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하고 문고리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안으로 들어가더니 안방 맨 끝에 있던 업라이트 가와이 피아노로 전력질주해서 이전에 들어본 적 없는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2집 앨범 작업이 잠정적으로 시작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빌리 아일리시는 항상 올블랙으로 입는다. 오버사이즈 검정 후디와 헐렁한 검정 트레이닝 팬츠를 입고 끝부분이 검정 불꽃에 그을린 것처럼 보이게 직접 장식한 검정 운동화를 신는다. 그러나 아일리시의 피부는 갓 세탁한 침대 시트처럼 희고 빛이 나며, 머리카락은 돌연변이 같은 뿌리 부분 녹색의 충격을 완화시키듯 어깨까지 내려오는 길이에 칠흑같은 검은색이다. 그녀의 모습은 쿠엔틴 타란티노가 각색한 <GTA> 느낌의 아키라 Akira다.
텅 빈 것처럼 보이는 집의 내부를 자세히 보면, 온통 ‘이스터 에그’가 있었다. 실제 살고 있는 사람들의 흔적이자 남매의 다양한 창조적 결과물인 셈인데, 방 중앙의 책상에는 팝킬러 마이크와 (휘어진 모니터가 더해진) 컴퓨터, 미디 키보드가 놓여 있었다. 아일리시가 2019년 발매한 <When I Was Older>를 쓰는 데 영감을 준 영화,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의 기록을 담은, 애슐린에서 출간한 하드커버 에디션이 커피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화장실 바닥에 놓인 덤벨 옆에는 액자에 낀 포스터 두 개가 있었다. 각각 특정 음악 업계의 이정표를 기념했다. 그중 하나는 스트리밍의 거대 기업 스포티파이에서 받은 것으로, 2019년 초 아일리시가 2017년 첫 발매한 EP, <Don’t Smile At Me>로 10억 스트리밍 기록을 세운 최연소 아티스트가 된 것을 기념하는 포스터였다. (아일리시의 음악은 그해 스포티파이에서 60억 번 이상 스트리밍되었다.)
다른 포스터는 덜 직접적이지만 더 많은 이야기를 해준다. 액자는 그녀의 ‘글로벌 1위 앨범’을 축하하는 내용이다. 이는 영국의 음악 회사인 코발트 Kobalt에서 발표한 것으로, 이 회사는 작곡가들에게 자신들의 싱글이 스트리밍, 방송, CD 판매, 영화 OST 수록, 심지어는 오하이오의 허름한 바에서 연주된 횟수 등 모든 데이터를 제공하고 있다.
코발트의 대시보드를 보면 아티스트가 ‘Bad Guy’ 같은 단 한 곡으로도 50만 회 정도의 별도 스트리밍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2019년 아일리시와 그의 친오빠 오코넬이 발매한 괴물 같은 이 곡은 나이, 성별과 무관하게 전 세계 관객들에게 그들의 음악은 물론 팝 사상 없었던 기묘한 이미지를 전달했다. 그녀의 나머지 스태프들이 언론을 상대하면서 백팩에서 노트북을 꺼내고 이어폰을 꽂고 커피를 만드는 동안, 아일리시는 여전히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 바로 위쪽 벽에는 “1만 시간”이라고 쓴 빨간 네온 사인이 있었다. 이 말은 위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10년 동안 평균 매주 20시간씩 일해야 한다고 제안한 <뉴요커>의 필자이자 위대한 사상가 말콤 글래드웰 Malcolm Gladwell이 그의 저서 <아웃라이어>에서 한 말이다.
빌리 아일리시의 작사 파트너이자 독학한 프로듀서로서의 삶을 살기 전까지 오코넬은 배우이자 밴드 ‘The Slightlys’의 멤버로 가끔 책 리뷰를 끄적이던 사람이었다. 2015년, 그는 당시 열세 살이던 여동생에게 자신의 밴드를 위해 직접 작곡한 ‘Ocean Eyes’의 보컬을 부탁했고, 이를 사운드클라우드에 올렸다. 이것이 업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현재의 모든 문화적 반향이 일게 한 여행의 시작이 되었다. 비록 이제 오코넬은 이사했지만 검은색 마커로 휘갈겨 쓴 그 글귀는 여전히 부모님 집의 침실 문 위에 적혀 있다. 바로 이 방에서 그와 아일리시는 2019년 3월 발매된 지 10개월 만에 업계의 가장 영광스러운 시상식에서 7 부문을 수상한 곡이 실린 데뷔 앨범을 쓰고 녹음했다. 오코넬의 그날 밤 소감은 처음에는 팝 아이돌을 꿈꾸는 이들을 향한 약간 정신없는 격려사처럼 들렸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 남매의 실현과 자기 성찰에 대한 것을 말하는 순간이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들 스스로 미래에서 과거로 보내는 앞으로 있을 상상도 못 할 승리에 대한 메시지였다. “있잖아, 우리는 같이 침실에서 음악을 만들었을 뿐이야. 우리는 항상 그렇게 하지. 이 상은 오늘 침실에서 자신들의 음악을 만들고 있는 모든 아이에게 주는 상이야. 너는 이 중에 하나를 받게 될 거야.” 나는 아일리시에게 말했다. “또 다른 시작으로 끝맺는 동화라니!” 그녀는 특유의 의뭉스러운 웃음을 지었다.(그녀가 십 대들의 전형적인 뚱한 웃음을 짓는다고는 하나, 실제로는 아주 크게 웃는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무대에서 상을 거머쥔 것에 당황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정말 당황스러웠어요.” 아일리시가 웃으며 후디 소매로 반쯤 가려진 자기 손을 들어 얼굴을 감싸 쥐었다. “라나(델 레이)가 상을 타야 했어요. 아리아나(그란데)가 상을 타야 했어요. 그들 모두가 상을 타야 했는데….” 아일리시는 격려받는 것을 힘들어하는 걸까? “때로는 제 자신이 자랑스러워요. 사실 어제 그저 그렇게만 하라는 전화가 왔어요.(그날 밤 스테이플 센터에서 어린 나이에 그래미를 차지하면서 비교 대상이 된) 앨리샤 키스가 제게 전화를 걸어 말했어요. ‘약에 취해 곤란해지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 내가 그랬기 때문에 너에게 말하는 거야. 즐겨.’ 고마운 말이죠. 그래서 오빠 집에 가서 조용히 축하했어요.”
올해 그래미 시상식에 스캔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8년 여성이 동등한 대표성을 원한다면 “분발해야 한다”고 발언한 당시의 대표 닐 포트나우 Neil Portnow가 2019년 퇴출된 데 이어, 올해는 고작 행사 10일 전에 신임 대표이자 CEO였던 데보라 듀건 Deborah Dugan이 직권 남용 의혹으로 레코딩 아카데미에서 즉각 행정처분을 받았다. 그녀는 혐의를 부인했고 투표 과정에서 성희롱과 부패가 있었다는 이유로 소송을 제기하는 등 대응에 나섰다.
그날 밤, 베스트 랩 앨범을 수상한 직후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 Tyler, The Creator는 음악을 분류하는 것에 대한 질문에 도발적으로 답했다. “제가 만든 음악이 이런 세상에서 인정받을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며 등 뒤로 팔을 모아 접은 채 무대 뒤에서 리포터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또한 우리, 그러니까 저 같은 남자들이 장르를 넘어서 무언가를 할 때마다 ‘랩’이냐 아니면 ‘어번’이냐며 범주화하는 것은 정말 짜증 나는 일이에요. 저는 ‘어번’이란 단어를 싫어해요. 제게는 단지 ‘n-word’를 말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방법일 뿐이에요. 왜 그냥 팝일 수는 없는 걸까요?”
타일러의 이 발언에 대해 물으니 그녀도 동의했다. “저는 늘 범주화되는 게 싫었어요.” 음악계에서 여전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나이 지긋한 백인 남성들은 아일리시가 부른 노래, 입은 옷이나 감독한 비디오 등 독특한 이미지와 그녀의 창작물을 장르와 유형에 고정시키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스트림베이트 Streambait’나 ‘스포티파이-코어 Spotify-core’ 같은 새로운 단어는 그녀의 결과물을 의심하는 평론가들 사이에서 오르내리는 말이다.
작가 리즈 펠리Liz Pelly는 2018년 에세이에서 ‘사람들이 클릭 베이트(낚시성 기사)와 유사한 개념으로 스트리밍하고 계속해서 스트리밍할 음악을 만드는 발상’을 언급하며 ‘스트림베이트’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스포티파이-코어’는 <뉴욕타임스>의 저널리스트 존 카라마니카가 조용한 보컬에 현란하고 느린 백 비트를 지녀 흥겹지만 완전히 잊혀질 수 있는 음악인데 스트리밍을 멈추게 하지는 않는 곡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했다.
아일리시와 오코넬의 음악을 들은 사람이라면 이 섣부른 혼성어의 의미가 단순하게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알 것이다. 이 용어들은 단지 나이 든 사람들이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젊은이들의 청취 습관에 의해 떠오르는 산업 트렌드를 구분 짓기 위해 사용하는 이름표일 뿐이다.
“저는 사람들이 제게 ‘텅 비어 보인다’거나 소리가 ‘텅 빈 것 같’다고 말하는 게 싫어요. 타일러의 말은 정말 멋있었어요. 저는 그가 말한 ‘어번’이란 단어의 의견에 대해 동의해요. 외모나 옷을 보고 예술가를 판단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날 밤 리조가 베스트 알앤비 부문에 들지 않았나요? 제 말은 리조가 저보다 더 팝적이라는 거예요. 제가 백인이 아니었으면 저도 ‘랩’ 부문에 들어갔을 거예요. 왜? 그들은 단지 아티스트의 외모에 대해 자신들이 아는 것만으로 판단하거든요.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세상은 우리를 박스 안에 넣고 싶어 해요. 단지 제가 십 대 백인 여성이라서 제가 하는 음악이 팝이래요. 제 음악의 어떤 부분이 팝 같아요?”
아일리시는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스스로를 안정시켰다. 창작물에 대한 그녀의 열정은 조심스러우면서도 맹렬했다. 그녀의 왼쪽 눈썹이 깜박거리는, 잘 눈에 띄지 않는 틱 장애는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피곤하거나 너무 큰 압박감에 시달릴 때마다 틱 반응이 나왔는데, 기본적으로는 매 순간이 그런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웃었다. “가끔은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해 싸우는 법을 알기가 어려워요.”
소셜 미디어 시대에 자란 십 대, 부모 혹은 교사에게 물어보라.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던 연결성이 결합된 디지털 서부 개척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직면한 가장 큰 정신 건강 위험은 아마도 사이버 불링일 것이다. 빌리 아일리시는 사람들의 악플에 더 이상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걸까? “오 신이시여. 믿을 수가 없네요.” 아일리시는 웃음으로 고통을 감싸면서, 마치 안 좋은 소식을 막 전하려는 사람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몇 년 전에 트위터 때문에 자살할 뻔했어요.” 미소는 사라지고 그녀의 눈이 유리처럼 변했다. 갑자기 온 실내가 조용해졌다. 부엌의 주전자 스위치만이 물이 끓었다고 달깍거릴 뿐이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무대에 오르고 사람들이 저를 응원해주는 것뿐이에요.” 신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싶어 하던 서너 살의 짧은 시기를 제외하면(“믿기 어렵겠지만 저는 일 년 동안 깊이 있고 온전한 신앙생활을 했어요.”) 언제나 음악은 빌리 아일리시의 18년 인생의 중심에 있었다. 이는 모두 그녀의 어머니 매기 베어드와 아버지 패트릭 오코넬이 두 아이를 키우기로 결심한 교육법과 관련 있었다. 그들은 강압적이고 성공에 굶주린 다른 부모와 거리가 멀었다.
“처음 6년은 제가 음악을 가르쳤어요.” 매기가 설명했다. 아일리시는 다양한 장기자랑에서 노래를 부르곤 했다. 사실 그녀가 처음 무대에 오른 것은 뮤지컬 <애니Annie>의 ‘Tomorrow’를 부른 것이었지만, 일곱 살이 되자 비틀스의 ‘Happiness Is A Warm Gun’을 부르겠다고 직접 선택했다.
“우리는 <뮤직 투게더>라는 음악 프로그램을 통해 아일리시를 가르쳤어요.” 그녀가 말을 이었다. “온라인 음악 자료 같은 것인데, 왜 그런 거 있잖아요, ‘가족 음악’. ‘아이와 함께 부르는 노래’ 같은 것들. 우리는 차에서 그런 음악을 항상 틀었어요. 그때쯤 홈스쿨링을 결심했어요. “빌리가 비교적 늦둥이라 저희 부부는 아이와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었어요.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이 벌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산업혁명 시대에 노동자를 먹이기 위한 수단으로 고안된 시스템을 모든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따르고 있는 학교라는 곳에서 아이들을 빼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당연히 LA 같은 코스모폴리탄에서 자란 십 대 소녀인데 분명 힘든 시절이 있지 않았을까? “물론이죠. 하지만 빌리는 의지가 꿋꿋해요. 강심장이에요. 그 애가 코첼라 같은 무대의 엄청난 관중 앞에 서서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고정되는 시선을 보세요. 그리고는 이렇게 생각하죠. 저 아이는 내가 머리카락을 뽑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키우기 힘들었던 아이였어.”
어머니에 따르면, 아일리시의 우울증은 세 가지 특정 사건을 중심으로 한다. 일생일대의 위기는 그녀가 여섯 살 때 처음 찾아왔는데, 아일리시나 어머니, 오빠 모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 채 지나가버렸고, 열세 살이 되던 해 댄스 수업 시간에 부상을 입으며 다시 재발했다.
“합창단에서 시작되었어요.” 아일리시가 내게 말했다. “저는 LACC(로스앤젤레스 어린이 합창단)를 정말 좋아했어요. 사람들은 제가 예쁜 스커트에 타이츠, 스웨터 조끼로 깔끔하고 단정하게 입는 것을 좋아했을 거라고 생각조차 못 하겠지만, 진짜 멋있었어요. 한동안 제 인생에서 가장 좋아하는 모습이었는데 지옥처럼 엄격했던 것이 진짜 이상했죠. 공연 중에 가려워도 얼굴을 못 긁게 했어요.”
아일리시가 말을 이었다. “저는 항상 음악 안에서 움직였어요.” 약간 가식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녀가 하는 모든 말은 적어도 감정적인 관점에서 레이저로 잰 듯 정직했다. “댄스 수업은 그 연장선상에 불과했어요. 항상 전문 체조 선수나 전문 승마 선수 등 제가 하고 싶던 다른 것들처럼 너무 늦게 시작했어요. 너무 늦게 시작하거나 돈이 부족해서 그만뒀어요.”
“여덟 살 즈음에 발레 수업을 몇 번 들었어요. 전 싫었어요. 하지만 탭 댄스에는 관심이 있었어요. 좋아했죠. 그래서 탭 댄스에서 힙합 댄스로 그리고 컨템퍼러리 댄스로 넘어갔어요. 무용단에 들어가서 좋아지기 시작했는데 부상을 입은 거죠.” 심하게 넘어진 건지 묻자, “아니요. 그냥 이상하게 움직였던 거예요. 심지어 착지가 잘못된 것도 아니었어요. 알고 보니 성장판이 찢어졌어요. 저를 완전히 죽여 놨어요. 다시는 열심히 춤을 추지 말라는 신호였죠.” 그녀의 배출구이자 감정이 흐르는 장소, 신체를 느끼고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장소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고속으로 돌아가던 회전탑에서 완전히 움직이지 않는 상태로 갑자기 멈춰버린 것이다. 힘든 일이었다. 어머니가 말한 대로 ‘큰일’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꿈을 좇는 자유는 말할 것도 없고, 그래미 수상과 전 세계적인 거대한 성공으로 빛나는 여운을 남긴 아일리시는 길목에 있는 걸림돌에서 작은 희망 보는 법을 배웠다. “아마 제가 다치지 않았다면 그렇게 많은 음악을 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아일리시 같은 십 대가 시간표, 선수단 훈련, 수업, 대회 등 스포츠식 생활 구조에서 벗어나면 갑작스럽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잘못된 무리와 어울릴 결심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술을 좀 마셨나요? 대마초를 좀 피웠나요? 반항의 유혹은 없었나요? 홈스쿨링 공동체 사람들 사이에서 또래가 갖는 압박감은 없었나요?
“또래들과 겪는 압박은 현실이에요. 그런 일이 좀 있었어요.” 그녀가 설명했다. “학교에 다니지 않았고 실제로 학교가 어떤지 몰랐기 때문에 어느 정도 방과 후나 학교 복도 등에서 일어나는 그런 미친 괴롭힘은 당연히 면했죠.” 나는 그녀에게 우리 큰딸이 학교에서 평범하지 않은 것을 싫어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진부한 말은 사실이다. 그녀는 단지 그 안에서 어울리고 싶을 뿐이었다. 아일리시는 부모님에게 ‘학교에 가고, 교복을 입고, 방과 후에 남아 벌을 서고, 사물함 안에 스티커를 붙이는 등의 평범함(그 말이 무슨 뜻이건 간에)’을 원한다고 요구한 적이 있었을까?
“사물함도 가지고, 다른 사람들처럼 되고 싶었던 시간이 있었죠. 저는 소위 유행하는 상점에 가서 어떤 사람들이 유행이라고 생각하는 옷을 입었어요. 매우 불편한 시간이었어요. 또한 저는 부자가 아니었지만, 친구 대부분이 잘살았기 때문에 같이 어울리기가 매우 힘들었어요. 그러나 그런 것들은 꽤 금방 사라졌어요. 왜 그런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어요. 그 이후로 남들처럼 보이는 것이 편한 적은 단 한번도 없어으니까요.”
술이나 마약은? 해보고 싶은 충동이 없었나요? “물론 술은 마셨지만 좋지 않더라고요. 흥미로웠던 적이 없어요. 어릴 때는 사람들이 그런 것들 하라고 압박을 가하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하고 싶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술에 취해 제 앞에서 다른 무언가가 되어서는 사라지는 모습을 종종 봤어요. 담배는 멋있을 거라 생각하고 한 주를 펴봤는데 아니었어요. 게다가 제 폐는 소중하고 아름다워요. 미치도록 아름다운 개자식.”
아일리시는 2018년 2월 베를린의 한 호텔 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뻔했다. 이 일은 전부 그녀가 소셜 미디어에 올리고 있는 혐오와 관련이 있었다. 아일리시를 포함해 차세대 아티스트 대부분은 그들에게 사로잡혀 완전 충성하는 온라인 군대를 키운다. 이러한 ‘스탠스 Stans(스토커 Stalker와 팬 Fan의 합성어)’는 보통 아티스트의 작업을 상업적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레이블이나 경영진이 개입하기 이전에 나타난다. 아일리시는 이들을 온전히 이해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가장 유명한 저스틴 비버의 오랜 ‘스탠’이었다. 빌리 아일리시가 소셜 미디어와 완벽하게 단절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이유다. 그녀는 테일러 스위프트, 아리아나 그란데 그리고 마일리 사이러스처럼 자신도 죽고 못 사는 수백만 명의 팬이 있다는 것을 안다. 소셜 미디어는 그들의 긴밀한 플랫폼이자 중요한 영역이다. “지금처럼 피하려고 해도 결국은 보게 돼요. 실제로 저를 옹호하고, 그들 피드에 올라온 원색적 비판에 답하고 다시 게시하는 팬들 때문에요. 저는 그들을 이길 수가 없어요. 인스타그램 댓글을 보지 않으려고 하지만, 아시잖아요, 저도 완전히 제 자신을 차단할 수는 없어요. 인스타그램에서 여러분이 이상한 댓글을 하나씩만 달아도 제 세상은 완전히 망가져요. 물론 저도 악플은 읽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쓰긴 하는데···.”
2년 전 2월 베를린에서의 그날. 그녀는 당시에도 트위터를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스크롤 내리고, 읽고, 스크롤 내리고, 읽고. 마치 그녀가 그 속에 압도당하는 것처럼 그 독이 퍼졌다. “죽을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녀는 혼자 울고 있었다. 아일리시가 스스로 정정했다. “이제 기억이 나네요. 그리고 제가 현실로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나요. 그 직전에 엄마와 오빠랑 같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들이 ‘우리 밥 먹으러 갈 거야. 혼자 있어도 괜찮겠어?’ 물었고 저는 ‘응 괜찮아’ 그랬거든요.” 물론 그녀는 전혀 괜찮지 않았고, 아주 예민한 감정적 촉을 지닌 아일리시의 어머니는 딸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예감했다. 혼자 두면 괜찮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들이 알고 있었나요? “물론이죠. 저는 분명히 혼자 있고 싶었어요. 제 마음에 확고한 계획이 서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들은 나가지 않는 대신 떠나는 길에 같은 호텔에 있던 투어 매니저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어요.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침대 옆 창문에 앉아 있다가 그를 봤어요. 제가 열네 살 때부터 같이 일한 브라이언요. 그리고 그가 호텔 반대편에서 저를 향해 걸어왔어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브라이언이 황급히 들어왔어요. 그는 저를 웃게 만들려고 실 없는 농담을 던졌어요. 제가 그에게 물었죠. “엄마가 여기 오라고 했어요?” 그가 대답하더라고요. “그럴지도.” 그 순간, 어머니와 아주 쾌활하고 믿음직한 크루 덕분에 순간적으로 어둠의 주문이 깨졌다. 하지만 그녀의 불안한 생각이 즉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요즘 아일리시와 소셜 미디어의 관계는 더 철학적이다. “저는 사람들의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안 보고, 트위터는 몇 년 전에 그만뒀어요. 가끔 밈을 보는데 팬들이 원하는 대로 포스팅을 더 올리지 않는 게 미안하지만 포스팅할 게 없어요. 솔직히 그냥 입을 닫는 거죠. 최근에 깨달은 것이 있어요. 어느 정도 명성이나 악명을 얻는다면 어떤 말이나 행동과 상관없이 잘 알려진 사람이라는 거죠. 완전히 미움을 받을 거예요. 동시에 엄청난 사랑을 받겠죠. 비욘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1백만 명이나 되는데, 도대체 어떻게 최고의 팝 스타인 그녀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리한나도 마찬가지고요. 트럼프도 그래요. 실제로 그런 바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니까요! 그런 사람을 어떻게 좋아할 수가 있어요? 모든 사람은 미움을 받으면서 사랑도 받아요.” 그렇다면 그녀는 미움을 무시할 수 있는 걸까? 훌훌 털어버릴까? “꼭 그렇지는 않아요. 스스로에게 어떤 말을 하더라도 여전히 미움받는 것은 기분 좋지 않아요.”
중간에 잃어버린 우정 역시 빌리 아일리시의 정서적 안정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데뷔 앨범이 나오기 전인 2018년 중반부터 2019년 초까지 그녀 스스로 ‘중간 시대 The Middle Era’라고 부르는 시기에 사건이 일어났다. 진짜 팬들은 맹렬한 식욕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 누구도 아일리시의 궤적을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친한 친구 몇몇은 달랐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작년 2월과 3월은 베를린 때보다 기분이 더 안 좋았어요. 이 전체 게임에 발 담그기로 했던 모든 결정을 후회한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어요.” 아일리시가 솔직하게 설명했다. “험난한 투어였어요. 일이 지나치게 많았죠. 아직 폭발적인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팬들의 광적인 열정만이 그곳에 있었지만, 투어를 둘러싼 구조적인 문제와 저의 정신 건강, 보안에 대한 확인이 없었어요. 내가 더 크게 성공할수록 안전해진다고 느꼈어요. 더 넓은 공간을 컨트롤하는 법을 알아야 했고, 제가 원하는 것을 스스로 찾아야 했어요. 관광, 호텔, 새벽 비행기, 언론, 회의 등등 모든 것을요. 그런 것 때문에 친구를 다 잃었어요.” 스케줄 때문인가 아니면 성공 때문인가? “투어, 질투, 오해. 제 생각엔 전부 다예요. 언젠가는 거의 50명의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순간 두 명이었어요. 그 당시 저는 진심으로 슬펐어요. 지금도 울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아일리시의 그래미 다부문 수상은 그녀의 예술성이나 직업 윤리의 성공, 죽여주는 데뷔 앨범, 충성스러운 팬들, 가족과 그녀 부모의 양육법의 승리만은 아니다.
“너무 많은 친구가 함께 놀러 다니고 밖에 돌아다닐 수 없다고 토라졌어요. 저는 가족 모임이나 친구의 연극을 보러 가고 싶지 않다고 느꼈던 기억이 나요. 왜냐하면 제가 가진 작은 명성이나 성공을 다른 모든 사람이 너무 웃기게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누구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아 그래, ‘ocean eyes’ 부르는 여자애 우리는 신경 안 써’ 그런 거죠. 자만하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겠어요. 저는 어땠는지 솔직히 말하고 싶을 뿐이에요.”
시작과 오늘의 ‘중간’ 사이인 열네 살에게 지금 이 순간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래요. ‘긴장 풀어 얘야. 넌 잘하고 있어. 절대로 자살하지마.”
세상이 안팎으로 뒤집힐 때는 3월 중순이었다. 지난 1월 LA에서 그녀를 본 이후 그녀는 구찌에서 맞춘 의상을 입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비틀스의 ‘Yesterday’를 커버해 불렀고, 인터내셔널 여자 솔로 아티스트상을 수상하기 위해 런던 브릿 어워드에 참석했으며, 제임스 본드 주제곡 ‘No Time To Die’는 영국에서 1위를 했다. 그녀는 또한 <Where Do We Go?>의 월드 투어를 시작했다. 내가 ‘시작했다’고 말하는 이유는, 노스캐롤라이나 롤리에서 3회 공연을 한 후에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의 영향으로 공연이 연기되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기 이틀 전에 맨해튼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을 테고, 아일리시를 만나서 이야기를 더 나누고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매진된 공연을 보려 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가 국경을 폐쇄했고 나는 이곳 런던에서 줌으로 그녀에게 전화를 하고 있다. 빌리 아일리시는 로스앤젤레스의 집에서 자가 격리하며 햇빛과 씨름하고 있었다.
격리 생활은 어떤지 물었다. “꽤 나쁜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요. 우리는 앞으로 유령의 도시에서 살아야만 해요. 물건을 가져오기 위해 오빠네 집으로 차를 몰았는데 여전히 사람들이 사방에 있더라고요. 사람들은 진짜 진짜 멍청해요! 완전히 미쳤어요. 차를 타고 가다 보면 어떤 곳은 모든 것이 정상처럼 보여요. 저는 믿을 수가 없어요. 이렇게 하드코어하게 3년을 살아야 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에요. 스케줄은 이미 너무 많이 잡혀 있는데 갑자기 가까운 미래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져요. 우리는 <앵무새 죽이기>의 주인공 이름을 딴 핏불 강아지 두 마리 젬 Jem과 부 Boo를 키우면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험을 부인하는 듯 보이는 몇몇 미국 사람에 대한 그녀의 반응은? “저는 이 상황에 정말 화가 나요. 특히 이번 경우는 전염성이 강한 것이 사실이잖아요. 사람들은 100퍼센트 이기적으로 굴고 있어요. “걸려도 상관없어. 죽으면 죽는 거지”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뭐라고요? 진짜? 너희들의 부모님은? 제 주변에는 조부모님과 함께 사는 친구들도 있어요. 걸려도 상관없다 이건가? 네 할머니 죽음의 이유라고 생각해봐 응? 자기 자신을 절대 용서 못 할걸요? 그리고 파티에 가서 전자 담배와 대마초를 나눠 피우는 애들이 있어요. 진짜 돌겠어요.”
빌리 아일리시는 사람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하게 될 거라 여기고 있을까? “대자연이 인간에게 반격하고 있다는 둥,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만, 이 일이 벌어진 진짜 이유는 사람들이 박쥐를 잘게 썰어서 그 똥을 먹으려 했기 때문이에요. 다들 미쳤어요. 모두가 너무 이기적이고 멍청해요. 물론 저는 이 일을 계기로 우리가 지구를 더 아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길 바라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이 거지 같은 행동은 계속해서 변하지 않을 거예요.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하잖아요.”
빌리 아일리시의 새로운 투어에서는 공연 중간에 비디오를 보여준다. 비디오 속에서 그녀는 검은 액체가 계속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갓 뽑아낸 원유처럼 끈적인다. 그녀는 그것을 ‘구 Goo’라고 불렀다. 똑딱거리는 메트로노믹 사운드트랙이 정확하게 울리는 가운데 아일리시의 목소리가 그 위에 들린다. “내가 태어난 몸은 네가 원했던 것이 아니니?” 비디오 속 그녀가 처음에는 후디, 다음에는 조끼 그리고 브래지어까지 옷을 겹겹이 벗기 시작하면서 관중에게 물었다. “내가 입은 옷이 편하다면 나는 여자가 아니다. 만약 내가 겹겹이 입은 옷을 벗으면 나는 난잡한 년이다. 내가 더 껴입든 덜 입든 그게 나를 어떻게 만드는지 누가 결정하나? 그게 무슨 의미인가? 나의 가치가 단지 그들의 인식에 근거한다는 말인가? 아니면 나에 대한 의견은 나의 책임인가?”
신체 이미지를 둘러싼 문제들과 여성 팝 스타가 어떤 모습으로 보여야 하고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미디어의 규정된 인식은 언제나 아일리시에게 소용돌이쳤다. 그녀는 항상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정확히 해왔으며, 다른 사람을 넘어 자신의 미학을 위해 깃발을 꽂거나 남성이든 여성이든 다른 예술가들을 아주 다른 방식으로 표현했다는 이유로 헐뜯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그 비디오가 의심의 여지 없이 처음 공연을 보러 온 수많은 청소년에게 신체 수용에 대한 강한 메시지를 제공하며 힘을 실어주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고 이야기했다. “저는 그 비디오를 찍고 싶은 의욕이 강했어요. 물론 다음 날 <데일리 메일> 헤드라인에 ‘빌리, 새 투어에서 브라를 벗다’라고 실렸더라고요. ‘진짜 죽고 싶나?’라고 생각했어요. 얼마나 예측 가능한 상황인가요. 우선 그날 저는 옷을 벗지 않았어요. 중요한 건 제가 브래지어까지 벗지 않았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보기 전에 사라졌으니까요. 너 따위가 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황당한 건 그 사진이 온통 폰허브에 깔렸다는 거예요.” 아이러니가 만든 상황에 아일리시가 웃었다.
그녀는 요즘 자신의 신체 이미지를 더 많이 받아들이고 있을까? “그건 잘 모르겠어요. ‘쟤는 이제 열여덟 살이야. 네 몸이 좋아’라는 식으로 저에 대한 인식이 벗겨지기를 바라지 않아요. 제 몸에 대해서는 아직 고백하지 않은 큰 이슈가 있어요.” 그녀는 밖을 내다보면서 한참 동안 침묵했다. 입에서 터져 나오려는 말이 무엇이든 자신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쨌든 그녀가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오늘 폭탄선언 같은 고백을 하려고 해요. 저는 그동안 성적 욕구를 느낀 적이 없어요. 과거 남자친구들은 한 번도 제 욕구를 자극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누군가로부터 육체적 욕구를 느껴본 적이 없다는 것은 제 인생에서 커다란 일이죠. 누구도 저를 함부로 판단하는 게 싫어서 이렇게 큰 사이즈의 옷을 입어요. 그렇다고 탱크톱을 입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뜻은 아니에요.” 탱크톱을 입었을 때는 어떤 기분일까? “글쎄, 제가 그렇게 입었더니 갑자기 제 가슴이 트위터에서 유행하더라고요. 괜찮아요. 그 모습은 좋았으니까. 가끔은 소년처럼 옷을 입어요. 어떨 때는 스웨그 넘치는 소녀처럼 입고요. 그리고 때로는 제가 만든 이 페르소나에 갇힌 기분이 들어요. 사람들이 저를 여자로 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성욕에 대한 질문은 아일리시 같은 폭풍의 중심에 선 아티스트에게 흥미롭다. 물론 그녀에게 가족과 일이 있지만 이성 교제는 어떨까? 다른 사람을 위한 자리가 있을까? 음악, 산업, 팬들이 그녀를 위한 누군가의 공간을 만들어줄 수 있을까? “결국 누군가를 찾을 것이라는 건 알지만 현재로서는 상상이 안 되네요. 누군가와 함께하면 저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져요. 이상해요. 제가 원한 것은 남자친구뿐이었어요. 비가 오거나 흐릴 때 어떤 소년과 함께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제 바람이었어요. 사람들이 제게 끔찍한 짓을 했어요. 제가 겪은 일은 정말 미친 짓이에요. 저는 연애에서 한 번도 강렬함을 느껴본 적이 없어요. 그거 알아요? 한번 해봤는데 그 사람의 친절을 이용했어요. 그런 것이 익숙지 않아요. 몇 달이 지났고, 그 사람에게 더는 끌리지 않음을 깨달았어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연애란 게 실은 일종의 환각 상태 같아요.”
마침내 빌리 아일리시가 웃었다. 그녀는 승승장구 중이다. 그녀는 편안하게 솔직함을 즐기고, 자신의 소신을 앞으로 밀고 나가고, 친밀감과 취약함 사이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으며 사람들을 무장 해제시킨다. 만약 그녀가 돌아갈 수 있다면? 전부 지워보자. 빨간 망토를 모호하게 입은 슈퍼맨처럼 지구를 반대 방향으로 돌려보자. 그녀가 인생을 다시 시작해본다면? “저는 제가 가질 수 있었던 순간을 항상 기억할 거예요. 저는 매니저 대니 루카신 Danny Rukasin의 사무실에 있었고, 막 열네 살이 되었을 때였어요. 그가 제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정말 이 모든 것을 원하니?’라고 물었어요. 그래서 저는 멈춰 서서 생각해봤죠. 한참 후에 제가 말했어요. “네, 그래요. 정말 원해요.” 길이 갈라지는 순간이었어요. 저는 그때 거기서 음악을 접을 수 있었어요.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었죠. 이제 저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영원히 되돌릴 수 없어요. 그게 다예요.”
- 글
- Jonathan Heaf
- 포토그래퍼
- Danielle Levitt
- 스타일리스트
- Samantha Burkhart
- 헤어
- Mara Roszak
- 메이크업
- Robert Rums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