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능수능란하게 저글링해온 크리스토퍼 놀런이 <테넷>에서는 아예 시간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시간이 등장했다.
“와씨, 인강보다 어려워!”라는, 고해성사 같은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전까지 상영관을 빠져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선 알 수 없는 정적이 흘렀다. 그 누군가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도대체 내가 뭘 본 건가?”, “이거 다 이해한 사람은 천재이거나 거짓말쟁이!” 웅성웅성 쑥덕쑥덕 실시간 영화 감상평이 터져 나왔다. 과학 시간에 진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고3 수험생의 심정으로 스크린과 고군분투했던 나의 표정도 한결 편안해졌다. 나만 어려운 게 아니었구나. <테넷>이 프리미어 시사회로 공개된 첫날의 풍경이다. 그날 SNS에선 관객의 N차 관람을 유도하기 위한 놀런의 빅피처라느니, 문과생이라 운다느니, 논란의 놀런이라느니, 그 와중에 재미는 있다는 식의 <테넷> 관련 글들이 심심치 않게 발견됐다. 스포일러가 힘을 못 쓰는 영화라는 평이 우세하지만 그럼에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글임을 미리 밝히고 시작하자면, <테넷>은 마블의 타노스적 마인드를 가진 사토르(케네스 브래너)와 터미네이터적 임무를 지닌 인물들이 뒤엉키는 이야기다. 사토르가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찾아 헤매는 9개의 알고리즘은 타노스의 인피니티 스톤과 비슷하다. 사토르는 이것을 모아 지구를 파괴하는 게 목적이다. 그런 그를 막는 게 주도자(존 데이비드 워싱턴)와 닐(로버트 패틴슨)의 운명이다. 이야기 자체는 어렵지 않다. 그런데도 두통을 안기는 건 이야기를 실어나르는 방식 때문이다. 쏟아지는 과학적 이론과 물리적 정보량도 이를 거든다.
<테넷>의 시작은 <메멘토>다.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놀런의 2000년도 작품 말이다. <메멘토>의 오프닝을 잠시 호출해보자. 주인공 레너드(가이 피어스)가 폴라로이드 사진을 흔들고 있다. 선명해져야 할 사진이 도리어 흐릿해진다. 거참 이상하다 싶어질 찰나, 발사됐던 총알이 레너드의 총구로 거꾸로 빨려 들어간다. 총에 맞아 쓰러진 남자도 멀쩡히 일어난다. 관객은 비로소 눈치챈다. 필름이 역재생 되고 있구나. <메멘토>의 오프닝 구조를 아예 영화의 동력으로 삼은 게 바로 <테넷>이다.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도입된 게 있다. 사물의 엔트로피를 반전시켜 시간을 거스르게 한다는 ‘인버전’이라는 개념이다. 기존의 시간 여행 영화들은 어떤 시점으로 인물들이 ‘이동’하는 것이었다. <테넷>의 시간 룰은 현재에서 과거로 필름을 되감듯 ‘역행’한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이때 인버전 장치인 회전문을 통과한 인물의 시간만 거꾸로 흐르기에, 시간의 역행과 순행이 한 프레임 안에서 교차하는, 생경하면서도 황홀한 광경이 펼쳐진다. 그러니까 마이클 잭슨처럼 문워크하는 인물들과 정상적으로 워킹하는 인물들이 뒤섞이는 식이다. 도로 위로 홀로 역주행하는 자동차가 튀어나오거나, 대규모 폭발이 일어난 건물 잔해들이 마술처럼 재조립되는 헉 소리 나는 순간도 있다. 다만 역행과 순행의 동선을 한눈에 파악하는 게 쉽지 않다. 영화가 시간의 메커니즘을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을뿐더러,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정보량이 너무 많아서다. 두통을 안기는 고난도 영화는 보통 관객의 ‘관람 이탈’을 부르기 마련인데, <테넷>이 그 와중에도 관객을 스크린 앞으로 끌어당기는 건 크리스토퍼 놀런의 작품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뭔가 엄청난 걸 보고 있다’는 시네마틱한 체험을 던져주기 때문일 테다. 그래서일까. 영화를 본 뒤 며칠, 한강에서 뒤로 걷기 운동하는 어르신을 목격할 때, 회전문을 지나야 할 때, 후진하는 차를 만날 때, 과도한 상상력이 발휘되곤 했다.
크리스토퍼 놀런 인생의 화두가 있다면 그것은 필시 ‘시간’일 것이다. 실제로 그는 시간을 저글링하며 ‘시간 덕후’로서의 면모를 과시해왔다. 시간 순서를 ‘과거 시점에서 순행 전개되는 흑백 장면’과 ‘현재 시점에서 역순행으로 진행되는 컬러 장면’으로 뒤섞은 <메멘토>, 꿈과 꿈속의 꿈과 꿈속의 꿈속의 꿈이 서로 다른 속도로 달리며 관객을 기분 좋게 희롱한 <인셉션>, 밀러 행성에서의 1시간이 지구에서의 7년이라는 가설을 세워 눈물의 가족 상봉을 이끌어낸 <인터스텔라>, 하나의 사건을 세 가지 시공간-해안 1주일, 바다 1일, 하늘 1시간-으로 쪼개고 분해해 전장으로 관객을 후송한 <덩케르크> 등 그는 시간을 어떻게든 변형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같다는 인상을 안겼다. 그리고 <테넷>에서는 시간 자체를 아예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테넷>은 내가 만든 영화 중 가장 야심 찬 영화”라는 놀런의 말은 적어도 그에겐 뻥이 아닌 셈이다. 감독의 야심은 제목에서부터 드러난다. 똑바로 읽으나 거꾸로 읽으나 똑같은 단어와 문장이 되는 회문(回文)인 ‘TENET’처럼 (슈퍼주니어가 부른 <로꾸거>에 등장하는 회문 예시 참고. “소주만병만주소. 아좋다좋아. 다시합창합시다”) 영화 자체가 순환하는 회문의 구조로 설계돼 있다. 놀런의 놀라운 재능은 자신이 내세운 개념을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이미지로 구현해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는 많은 영화가 ‘상황이 이렇습니다’ 얼렁뚱땅 넘어가려 할 때, 편집증에 가까운 강박으로 그것을 물고 늘어져 결국 관객 앞에 사실감 있게 쏟아낸다. CG를 최대한 멀리한 채. 놀런의 영화가 참신한 척할 뿐 참신하지 않다는 의견도 없지는 않다. 구조가 반복된다는 게 이유 중 하나다. <메멘토>의 인트로에서 출발한 <테넷>이 그렇고, 시공간을 3개로 재편한 <덩케르크>의 트릭은 <인셉션> 후반부 플롯과 같다. <인터스텔라>와 <인셉션> 사이에도 시간을 다루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누군가에겐 확장의 일환으로 보일 테지만, 같은 이유로 ‘자기 복제’라는 비판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할 테다. 비판 이야기가 나와서 한 가지 더 언급하자면, 놀런의 영화는 여성 캐릭터 구축이 부실하다는 평가에서 늘 자유롭지 못했다. 세간의 평가에 맞서기라도 하려는 듯 놀런은 <테넷>에서 남자 배우들보다 키가 큰 장신의 여배우 엘리자베스 데비키를 캣으로 기용해 존재감을 드러낸다(농담이다). 하지만 데비키 특유의 고전적이면서도 미스터리한 얼굴은 영화 분위기와 근사하게 어울린다. 그러나 캣을 추동하는 동기가 모성애 외에는 부각된 게 딱히 없어 캐릭터 자체는 다소 촌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이건 진담이다). 캣 외에도 이 영화의 인물들은 심리적 변화나 고뇌를 표현할 기회를 충분히 제공받지 못한다. <테넷>의 핵심은 타임라인 교차를 통한 새로운 영화적 체험의 제공이지 인물들 사이에 형성되는 정서의 포착이 아니기 때문이다. 캐릭터 분석은커녕 내용을 파악하느라 애를 먹었다는 배우들의 진술이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대본 노출을 극도로 꺼려서 주연 배우들에게조차 철통 보안을 압박하는 놀런에게 <미션 임파서블> 방식을 추천하는 바이다. “이 시나리오는 마지막 장을 넘긴 5초 후에 자동으로 폭발합니다.” 관객을 과소평가하는 영화에 질색하는 관객들에게 놀런의 영화는 미더운 선택지였다. 그는 늘 풀기 어려운 게임을 관객에게 제안했고, 두뇌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여 마지막 퍼즐을 완성하곤 했다. 그 아슬아슬한 경쟁은 놀런의 영화를 즐기는 묘미 중 하나였다. 그에 반해 <테넷>은 놀런이 지나치게 관객을 과대평가한 영화라는 인상이 있다. 아니면 가혹하게 테스트하려는 심사였을까. 어찌 됐든 이번에도 게임을 완성하는 건 관객의 몫인 듯하다. 그가 던진 게임에 동참할 텐가. 글 / 정시우(칼럼니스트)
- 피쳐 에디터
- 김영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