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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 헤어질 결심

2020.11.26GQ

모든 걸 말할 순 없듯, 전부 끌어안고 살 순 없다. 어떤 물건은 잊히고 어떤 물건은 사라지고 어떤 물건은 남는다. 몇은 버리기로 했다.

1. 셔츠

앤 드뮐미스터의 블랙 셔츠. 이걸 입고 한 짓이 너무 많아서 잘 빨지도 않았다. 어떤 날은 입고도 잔다. 셔츠 밑단을 꺼내 안경을 닦아주던 기억이 선명하지만, 이젠 ‘어쩔 수 없다’는 마음만 든다.

2. 팬츠

런던 도버 스트릿 마켓 문 앞에서 레이 가와쿠보를 우연히 만났다. 아방가르드의 성전에서 그곳의 여왕으로부터 “당신 바지 핏이 마음에 들어요.” 란 얘길 들었다. 몹시 흡족한 기분이 들면서, 최신 유행도 중요하고 세련된 것도 좋지만 룩에는 뭔가 재미있는 부분이 필요하다는 그녀의 조언이 번쩍 기억났다. 원래도 팬츠를 다소 짧게 입었으나 좀 더 ‘게릴라적이면서 리버럴하게’ 시도하기로 하고 아제딘 알라이아와 부디카 사이에서 꼼 데 가르송 남성용 팬츠를 한 벌 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누군가에겐 무척 어울리겠으나 내게는 이도저도 아닌 그저 오리무중. 가격표도 떼지 못했다.

3. 향수

빈 병에도 잔향이 있으니 다 쓰고 버리는 대신 소파 아래도 두고 침대 모서리에도 끼워두었다. 대부분 앰버와 머스크 계열이라 무작위로 섞여도 집 안에선 일관되고 정돈된 향이 났다. 열 아홉 살 때부터 향수를 썼으니 빈 병 숫자도 만만치 않다. 어느 날 욕실 타월장에 있던 병 하나가 떨어져 발등에 길쭉한 흉이 생긴 후로 레지스탕스처럼 구석구석 숨어있던 것들을 다 꺼내 큰 박스에 한 데 모아두었다. 보이는 곳에 두든지, 버리든지 하려고. 왜 숨기려고 했나 모르겠다. 나쁜 것도 아닌데. 어떤 얼굴에 대해서도 생각이 나면 생각나는 대로 내버려두기로 마음 먹었다.

4. 명함

뉴욕의 오후, 톰 포드가 기자들에게 새로운 남성복 숍 소개를 하기 직전. 그는 물 한 컵을 요청했다. 비서는 높이 솟은 나선형 계단 아래(풀 서비스 바가 감춰진 곳)로 몸을 숙이고 들어가 납과 크리스털로 된 컵을 들고 돌아왔다. 차콜 그레이 스리피스 수트와 공격적으로 단추를 푼 셔츠를 입은 톰 포드는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스웨이드를 바른 벽, 흑단 바닥, 대리석 벽난로, 천장까지 드레스 셔츠를 쌓아놓은 방(굴러다니는 도서관 사다리가 두 개), 유리 진열장에 대해 설명했다. 7가지 넓이의 타이, 셀 수 없이 많은 칼라와 커프스의 조합으로 완성된 셔츠, 초콜릿 브라운 벨벳 슈즈, 지독하게 비싸지만 혹독하게 멋진 수트. 다 둘러 본 후, 그 가게에서 가지고 나온 건 주소가 적힌 명함 한 장이었다. 돈이 없었으니까. 놀라운 건 그 때도 없던 돈이 지금도 ‘어쩌면 그렇게 한결 같이’ 없다는 사실.

5. 담배

다른 사람이 피우고 내가 샀다. 무시무시한 경고 메시지가 없던 시절의 담배 박스는 아주 예뻤다. 테이블 위에 탁 하고 내려놓는 소리가 특히 좋았다.

6.

길을 잘못 들어서 뜻밖의 골목을 만났다. 얼핏 기차 한 량을 떼어놓은 것 같은 단충 건물을 대 여섯 개의 가게가 나눠 쓰는데 한 집당 공간이 경이로울 만큼 작았다. 떡집, 도너츠 집에 닭튀김 집, 국수집이 있고 가운데에 커피 가게가 있는 조촐한 건물. 워낙 좁다 보니 가게 안에는 주방과 계산대 정도만 있고 탁자는 다 한 데 나와있었다. 집집마다 의자며 파라솔이 다른 와중에 옹색한 공간을 나누느라 의자 궁둥이는 이 집 저 집 가릴 것 없이 죄다 붙어있는 풍경이 동남아 어디쯤 시장 같기도 하고 좀 크게 벌인 좌판 같기도 했다.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내일모레쯤 다시 와야지 하는 생각으로 골목을 기억해 뒀다. 주말에 걸어서 거길 갔다. 커피 사 마실 돈하고 피츠제럴드 책 한 권만 들고 갔다. 민음사에서 나온 <피츠제럴드 단편선>은 바다에 갈 때마다 하고 끌도 다녀서 책장 사이에서 모래가 예고도 없이 후두둑 떨어진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오해하고 이해했던 시간들처럼. 모퉁이마다 삼각형으로 접어논 탓에 위쪽이 불룩한 아코디언처럼 된 책을 녹색 테이블에 두고 나왔다.

    편집장
    강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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