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축구 역사 시작 이래 이토록 요란하게 등장해 과감한 퍼포먼스를 선보인 후 빠르게 사라진 선수가 있던가. ESL이 축구계를 뒤흔들었다. ESL이 그은 한 획.
유러피언 슈퍼리그(이하 ESL)는 2021년을 넘어 2000년대 유럽 축구계의 가장 큰 뉴스로 기록될 것이다. 개괄은 간단했다. 유럽 최고의 팀들이 모여 자신들만의 리그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기존의 시스템과 가장 다른 점은 UEFA나 FIFA, 각국 축구협회와 상관없이, 엘리트 팀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리그였다는 점이다.
ESL 이야기는 순식간에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한국 시간 기준 2021년 4월 19일 출범이 발표됐다. 최초의 고정 12개 팀은 잉글랜드 6개 팀, 이탈리아 3개 팀, 스페인 3개 팀이었다. 런던, 마드리드, 밀라노 등을 홈그라운드 삼은, 국제적으로 인지도가 있는, 유럽 내 대도시 연고지 팀이 참가했다. ESL의 아이디어는 발표 즉시 강한 반발을 불렀다. UEFA, 잉글랜드 축구협회와 프리미어리그, 스페인 라리가, 이탈리아 축구연맹과 세리에 A 등 관련 단체 모두가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해당 클럽은 모든 국제 경기 출전을 박탈당할 거라는 강한 경고가 따라왔다.
관료와 정치인도 이 문제에 동참했다. 특히 축구 종주국인 영국이 빠르고 예민하게 반응했다. 영국 디지털문화미디어스포츠부 장관 올리버 다우든은 공식 성명을, 총리 보리스 존슨은 본인 SNS에 반대 메시지를 냈다. 이윽고 ESL 발표 하루 만인 4월 20일 세금과 선수 비자 등 정부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제재 방안들이 발표됐다. 결국 4월 21일 안에 영국의 6개 팀이 모두 탈퇴했다. 밀라노의 2개 팀과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까지 탈퇴하면서 슈퍼리그는 사실상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
왜 이런 시도를 하게 됐을까? 돈 때문이다. ESL이 잘 진행되면 참가 팀은 더 큰돈을 벌 것이다. 여기 참가한 축구 팀들은 이미 부자 아니냐고?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유럽 축구는 아주 큰돈이 도는 동시에 축구 팀들은 큰 빚을 지고 있다. 영국 BBC 기사에 따르면, ESL에 참가하기로 했던 영국의 축구 클럽 6개는 최소 4천4백80만 파운드(맨체스터 시티)에서 최대 5억 9천1백80만 파운드(토트넘 홋스퍼)의 부채를 가지고 있다. 이 기사에는 전직 프리미어리그 사장의 코멘트도 실려 있었다. “우리 팀의 내년 예산이 1천7백만 파운드가 될지 7백만 파운드가 될지는 시즌의 마지막 날까지도 알 수 없어요.”
예산 규모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배경에는 유럽 축구의 특징적인 승강제 구조가 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주요 축구 리그는 1부부터 4부 리그까지 있고, 리그가 끝날 무렵 특정 팀은 리그가 바뀐다. 하부 리그의 최상위권 팀은 상부 리그로 승격하고, 상부 리그의 최하위권 팀은 하부 리그로 강등된다. 이런 시스템이 있어도 실질적인 강팀의 목록은 비슷하지만, ‘내가 응원하는 팀이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는 늘 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서양 건너 미국은 반대 구조다. 여기서 미국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프로젝트의 투자자가 미국 자본인 JP모건이고, ESL에 참여한 영국의 6개 팀 중 3개 팀의 구단주가 미국인이라서다. 미국 스포츠 리그는 철저히 닫힌 구조로 꼴찌를 해도 팀은 그대로 간다. ESL은 국제적인 축구 팀들이 모인 미국식 축구 리그였다.
승강제와 비승강제의 결정적인 차이는 누가 협상의 주도권을 갖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경제학자 스테판 지만스키의 지적처럼 축구 팀이 만드는 상품은 결국 입장권과 중계권이다. 입장권은 각 구단의 수입이지만 중계권은 다르다. 현재 유럽 축구의 중계권료는 대부분 협회가 다른 단체와 협상한 후 각 참가 구단에 분배한다.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중계권료는 영국 축구협회가 각 팀에, 챔피언스리그 중계권료 역시 UEFA가 각 팀에 분배한다. 강팀 입장에서는 ‘축구는 우리가 하는데 돈은 다 같이 나눠 가진다’는 불만이 생길 수도 있다.
유일한 예외는 스페인이다. 스페인 팀들은 방송사와 중계권료를 개별 협상한다. 경제학자 스테판 지만스키는 <축구 자본주의>에서 축구 팀을 데이터에 입각해 경제 모델로 분석했다. 2010년대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최고수입 팀과 최저수입 팀의 수입 차이는 6:1 정도였으나 스페인은 2007년에 이미 최고수입 팀과 최저수입 팀의 수입 차이가 20:1 수준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ESL이 사실상 붕괴된 마당에도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가 남아 있는 게 이해가 된다.
지금은 ESL이 흐지부지됐지만 언제든 비슷한 논의가 또 이루어질 수 있는 건 아닐까? 아닐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이 비즈니스의 불공평한 측면을 받아들이면서도 기꺼이 돈을 쓰는 부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에게 축구는 비즈니스의 수단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축구는 미술품 수집처럼 자신의 명예를 위한 것이다. 그러니 축구 전체가 수익 추구 모델이 될 수 없다.
이는 축구를 인류학적으로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축구에 인류학이라니 무슨 말인가 싶을 수 있으나, 인류 최대 규모의 모객 이벤트는 축구 경기다. 많게는 경기 하나를 위해 9만 명이 한 자리에 모이고, 월드컵 결승 같은 경우 10억 명이 동시에 본다. 영국의 동물학자 데즈먼드 모리스는 이런 관점으로 <축구 종족>이라는 책을 썼다. 그의 논지에 따르면 축구는 동물로의 인간 본능을 강력하게 자극하는 다양한 의미가 있다. 그의 정리에 따르면 축구는 사냥 의식, 유사 전쟁, 지위를 상징하는 시스템, 유사 종교, 대중의 마약, 비즈니스, 그리고 한 편의 공연 예술이다. 축구 팬들은 이런 의미로 인해 자신이 원하는 팀과 자신을 굉장히 일치시키고, 축구 팀과 축구에 굉장히 감정적인 유대를 느낀다.
모리스의 정의에 따르면 ESL은 축구가 가진 ‘공연 예술’ 산업으로서의 가치를 보고 ‘비즈니스’로만 접근했고, 그 결과 사냥, 전쟁, 지위, 종교, 대중의 마약을 건드렸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불같이 화를 내고, 그 사람들을 유권자로 두고 있는 정치권이 반발하고, 축구라는 종교의 사제 집단인 국가별/유럽권 축구협회를 건드린 것과 다를 바 없다.
ESL에 이렇게 큰 투자금이 끼었던 이유는 역시 축구처럼 매력적인 콘텐츠가 없기 때문이다. 축구의 기본 규칙은 19세기부터 지금까지 거의 같다. 간단한 규칙과 인간의 야성을 자극하는 면모 덕에 미국식 스포츠인 야구나 미식축구보다 세계적인 콘텐츠가 될 수 있었다. 지금 미국발 글로벌 콘텐츠 플랫폼 대기업은 너 나 할 것 없이 독점 콘텐츠를 노리고, 스포츠야말로 최후의 독점 콘텐츠가 될 가능성이 크다. 스포츠는 라이브 이벤트이므로 전통적인 의미의 방송 편성이 힘을 쓸 수 있는 마지막 분야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니 JP모건이 리스크를 안고도 거액의 투자에 들어갔을 것이고, 유럽의 12개 엘리트 축구 구단도 리스크를 안고 이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종교의 대단하고 무서운 점은 신성 불가침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십계가 나온 지 2천 년이 넘었지만 십계는 여전히 십계, 구계나 십일계가 될 수는 없다. 축구도 마찬가지다. 앞으로도 누군가 축구의 가치를 노리고 뭔가를 할 수는 있겠으나 축구 역시 점점 강하게 대응할 것이다. 이미 UEFA는 ESL에 참가하기로 했다가 불참을 발표한 9개 팀에 1천5백만 유로의 기부금을 물리고, 유럽 클럽대항전에 참가했을 때 수익의 5퍼센트를 재분배하기로 했다. UEFA가 승인하지 않은 대회에 참가하면 벌금 1억 유로를, 합의 조항을 위반하면 벌금 5천만 유로를 내야 한다. 신성 불가침 조약을 어기면 늘 가혹한 징벌이 따른다.
- 글
- 박찬용( 부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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