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 여름 | 지큐 코리아 (GQ Korea)

서쪽 여름

2021-06-28T16:42:41+00:00 |car|

이번 여름은 서쪽에서 만나기로 했다.

만리저수지 ― 초콜릿색 카펫을 펼쳐놓은 듯 매끈한 신두리 해안을 따라가다 구름포 방향으로 유턴하듯 핸들을 돌리면 왼쪽에는 평야를, 오른쪽에는 서해를 두고 달릴 수 있는 귀한 풍경이 펼쳐진다. 서해 일몰을 보며 드라이브하기 좋은 숨은 명소로 알려진 소근진로다. 길게 뻗은 도로 바깥 쪽으로는 낚시꾼들이 분수처럼 늘어뜨려 놓은 낚싯대가 드문드문 보이는데, 바다 낚시와 민물 낚시를 같이 즐길 수 있는 재주 많은 어항이 양쪽으로 펼쳐져 있어서다. 이곳 의항리의 크고 작은 저수지 중에서도 만리저수지는 바다와 가장 가까이 닿은 저수지로, 위치로 보나 크기로 보나 낚시꾼들에겐 이만한 명당이 없다. 노란색 푸조를 타고 더 가까이 들어가본다. 만리저수지를 빙 두른, 허리 위로 올라오는 뻣뻣한 여름 갈대는 숨어 앉기 좋은 아늑한 담이 되고, 그 담을 도둑처럼 넘어 드는 바람은 어느 사이에 징글맞던 더위를 잘도 채간다. 그쯤이면 낚시꾼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살찐 고양이도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한다.

몽산포 ― 몽산포는 굽지 않고 길게 뻗은 백사장도 유명하지만, 2킬로미터 남짓 시원한 해안을 따라 울창하게 조성된 송림도 으뜸이다. 특히 해가 떨어지는 방향으로 몽땅 삐딱하게 자라난 소나무 군집은 묘하고 신비해서 보고 있으면 절로 머리가 기울어진다. 몽산포의 송림은 일반적인 송림과는 좀 다르다. 사구의 형성으로 토질이 온통 모래뿐인 것과 달리, 몽산포는 흙과 잔디가 드문드문 섞여 푹푹 빠지거나 무너지지 않고, 비교적 단단하다. 무엇보다 나무 사이사이의 간격이 꽤 넓은데, 서로 간섭하지 않고 잘 자랄 수 있도록 수십여 년 동안 솎아내고 가꾸기를 반복한 결과다. 그래서 몽산포 송림에는 몸집이 큰 SUV부터 캐러밴, 트레일러까지, 사이드미러를 접지 않고도 쉽게 들어온다. 파라솔을 닮은 둥근 나무 그늘 아래로 랭글러를 집어넣었다. 창문을 내리고 소나무가 칠해놓은 초록색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러다 문득 머리 위 검은색 하드톱이 답답해, 이럴 바엔 없는 편이 낫지 싶어 지붕을 몽땅 열어젖혔다.

천리포항 ― 만리포의 흰 모래를 따라 북쪽으로 2킬로미터 정도 올라가면 비교적 한적한 천리포항이 나온다. 천리포항 가까이에서 ‘닭섬’으로 불리는 두 개의 섬이 자연 방파제 역할을 하는 덕분에 천리포 앞바다는 비가 많은 여름에도 파도가 없고 잔잔하다. 그래서 여름이면 카약 피싱과 보트 피싱, 스노클링을 즐기는 사람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이곳 대부분의 고깃배는 항구가 큰 만리포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천리포항 부둣가에서는 밧줄을 매어둔 말뚝을 찾아보기 어렵다. 고깃배가 없어 바다를 가까이 두고 볼 수 있으니, 어쩌면 차를 가져온 이들에게는 이만큼 바다 풍경을 즐기기 좋은 주차장이 또 없다. 천리포에서는 만리포가 보이는데, 만리포에서 천리포 쪽을 바라보면 항구도, 고깃배도, 사람도 잘 보이지 않는다. 한적한 부둣가를 따라 북쪽으로 더 올라가면 백리포다. 활처럼 둥글게 휜 해변은 작고 좁아서 항구도, 인가도 들이지 못한다. 결국 백리포에 다다르면 파도 소리만 잠잠하게 남는다.

모항 ―피곤한 고깃배가 항구에 드러누워 있다. 고깃배 위로는 그물과 부표가 대충 벗어둔 옷처럼 널려 있다. 이 시간에는 어부도, 장사꾼도, 낚시꾼도 보이지 않는다. 고깃배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는 눈치다. 그런 모항의 긴 방파제를 따라 들어가면 저 멀리 만리포항이 보인다. 안개가 낀 날이면 만리포항은 신기루처럼 신비롭게 일렁이는데, 그럴 때면 낚시꾼들은 안개가 낀 만조 때 고기가 위로 올라온다며 방파제 높이 이동해 다시 자리를 잡는다. 그 분주한 풍경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부둣가를 돌아 내려온다. 매끈하던 해안선은 모항리를 빠져나오면서 삐죽삐죽 날카롭게 변한다. 봄이면 만개한 벚꽃이 절경을 이뤄 찾는 사람이 많고, 여름이면 바람이 시원한 ‘태안 해변길 3코스’를 걷는 이들로 사람이 많은 곳이다. 이래저래 사람이 많아 차는 속도를 늦추다가, 고깃배가 누워 있는 모항항이 보이는 지점에서는 전부 차를 세워두고 내려 한 곳을 바라본다. 누워 있는 고깃배 위로 이불처럼 붉은 해가 천천히 내려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