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줍지만 분명한 배우 '엄태구' | 지큐 코리아 (GQ Korea)

수줍지만 분명한 배우 ‘엄태구’

2021-07-28T19:11:50+00:00 |interview|

‘열심히 기도했다. 열심히 간절히 기도하며 살았다.’ 돌아보니 그러하다는 엄태구에게 무엇을 그리 바랐는지는 묻지 않았다.

톱, 뮌. 네크리스, 프리모떼. 그린 레더 글러브는 스타일리스트의 것.

GQ   갑자기 비가 쏟아지네요. 비오는 날씨 어때요?
TG   싫습니다.
GQ   왜 싫습니까?
TG   이따 밖에 나가야 하는데 비 오면…, 차갑잖아요.
GQ   아주 현실적인 이유군요.
TG   사실 크게 상관없습니다. 지금은 맑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GQ   엄태구 씨와의 대화를 활자로 옮길 때는 이 지문을 꼭 적어야겠어요. ‘수줍어하면서도 분명하게.’
TG   아학학학, 아닙니다.
GQ   새 작품에 집중하고 싶어서 이번 인터뷰 진행 여부를 하루만 고민해보겠다고 하셨죠.
TG   죄송합니다.
GQ   그런 의미로 말한 건 절대 아니에요. 일정이 바빠서, 시간이 없어서, 그런 대개의 이유보다 “작품에 집중하고 싶다”는 말이 순수하게 느껴졌어요. 캐릭터가 처한 상황에 배우가 안팎으로 무척 정제하는가 보다 싶기도 했고요.
TG   그렇게 하는 게 엄청난 도움이 되는 건 아니에요. 사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원래도 외출을 잘 안 하긴 하지만 웬만하면 작품 할 때는 좀 더 자제하려는 편입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하루 화보 촬영하는 게 절대 (작품) 촬영에 지장을 주지는 않거든요. 그래도 그렇게나마라도 더 잘해보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 같습니다.
GQ   더군다나 이번 신작 <홈타운>에서는 무차별 테러를 저지르고 외부와 소통을 단절한 무기수 역할이라면서요. 심리적으로 괜찮으려나, 괜히 밖으로 끄집어내나 우려스러웠어요.
TG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냥…, 이 작품이 특히 어렵긴 해요. 캐릭터가. 그런데 돌이켜보면 어렵지 않은 캐릭터가 없었고, 이번에도 똑같이 어렵겠지만 다른 색깔로 어렵겠구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홈타운>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감사한 건 배우분들과 현장 스태프분들, 감독님이 다 너무 좋으셔서 진짜 ‘나만 잘하면 되겠구나’라는 생각으로 하고 있어요.
GQ   박현석 감독님이시죠? KBS 드라마 스페셜 <아트>(2012)라는 단막극을 통해서 엄태구 배우를 처음 주연으로 발탁한.
TG   맞습니다. 주연으로는 <아트>가 처음이지만 그전에도 감독님과 많이 해서, 제가 저희 형(엄태화감독)이랑 한 작품 수와 감독님과 한 작품 수가 거의 비슷할 거예요. 당시 오디션에 많이 떨어질 때였는데 믿고 캐스팅해주시고 잘한다 잘한다 해주셨던 되게 감사한 감독님이시거든요. 이번에 다시 함께할 수 있어서 너무너무 좋습니다.
GQ   9년 사이 많은 게 달라졌죠?
TG   달라진 건 그때는 20대였는데 지금은…, 하하하. 달라졌다기보다는, 모르겠습니다. 이번 현장을 예로 들면 감독님은 어떠실지 모르겠는데 저는 더 돈독해진 느낌이거든요. 그때는 긴장만 많이 했는데, 물론 지금도 많이 하지만, 감독님과 이렇게 해볼까요 얘기도 많이 하고 밥도 같이 먹고 그러면서, 그냥 너무 좋아요. 감독님이 원래 파이팅이 넘쳐서 여전히 현장에서 힘 얻고 참 좋습니다.
GQ   “독립영화를 해온 열정이 마음에 들었다”고, 감독님은 당시 캐스팅에 대해 그러시더라고요.
TG   과찬이십니다. 감독님은 그 전 작품들에서 단역 할 때도 항상 존중해주셨어요. 지금도 한결같으세요. <아트> 촬영할 때 그렇게 많은 대사를 해본 적이 없어서 긴장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대본을 거의 머리맡에 두고 살았던…. 감독님이랑도 최근에 <아트> 얘기를 했어요. 감독님은 “그거 아쉽지 않냐, 다시 하면 나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시고, 저도 저대로 “다시 하면 그때보다는 조금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런 얘기를 농담 반 진담 반 식으로 했어요. 그럴 기회가 있으면 재밌을 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
GQ   배우 엄태구에게 ‘잘한다’의 기준은 뭐예요?
TG   좀 더…, 좀 더…, 재밌게 놀아보는 것? 사실 이 마음은 매 작품마다 느끼는 건데 지나고 나면 더 잘할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트>는 10년 된 작품이니까 10년 동안 겪은 것들이 합쳐지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GQ   연륜이 묻어나려나요.
TG   연륜까지는 아닌 게 막상 또 내일 촬영이라고 하면 똑같이 긴장될 것 같습니다.

GQ   연기에 발을 들인 계기는 고등학교 자퇴 후 친구가 연기를 배워보자 권유해서인 것으로 알아요.
TG   맞습니다. 친구가 더 정확히 기억하고 있더라고요. 본인이 연기하자고 한 순간을. “도서관 계단에서 내가 너한테 40분 동안 얘기했다.” 들으니까 얼핏 기억나더라고요.
GQ   그보다 앞선 시점의 선택부터 궁금했어요. 엄태구 학생은 왜 고등학교를 자퇴했을까? 왜 본가인 안산에서 최소 4시간은 가야 하는 진주 공군항공과학고등학교를 택했을까?
TG   그때가 열다섯인가 열여섯인가. 중학교 3학년이면 열여섯이네요. 열여섯…. 되게 이상하네요. 그때의 저한테 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GQ   열여섯 살의 엄태구 학생 좀 불러와주세요.
TG   하하하하. 일단 그런 거 있잖아요. 고등학생들이 중학교 수업에 들어와서 “저희 학교 오세요” 하는 시간이 있었어요. 제 기억으로는 그때 공군항공과학고등학교 학생분이 제복을 입고 들어왔는데 그게 멋있어 보이기도 했고, 월급을 준다고도했고…. (검지로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학교생활이 재미없었나? 어디론가 가고 싶었나?
GQ   월급을 받아서는 어디에 쓰고 싶었어요?
TG   그냥 돈을 벌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했어요. 그런데 월급이 10만 원이었고 휴가가 한 달인가 두 달에 한 번인가 있었는데 안산까지 오가는 차비만 해도 많이 들었죠. 그래도 당시 제게는 1만 원도 큰돈이어서, 딱히 어디 쓰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돈을 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했습니다.
GQ   10대에 엄마 아빠 품을 벗어나서, 게다가 아무 연고도 없는 타지에서 생활하기를 결심한다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죠.
TG   하필이면 그때 ‘어머님께’ 노래가 나와서.
GQ   god의 ‘어머님께’?
TG   네, 참 슬펐습니다. 아직까지 기억이 납니다. 그때 처음 느꼈어요. 부모님과 떨어진다는 것에 대해서. 그런 걱정은 전혀 안 하고 갔거든요. 어 근데, 이게 완전 진짜 다르더라고요. 그때 좀 놀랐죠. 이게 이렇게…, 이렇게 되는구나. 그때가 명확히 기억나요. 저기 멀리 부모님이 가시는 게 보이고 ‘어? 진짜 가네?’ 싶던. ‘나 혼자 여기 있으라고?!’
GQ   본인이 선택해놓고.
TG   저는 당차게 선택한 건데 깜짝 놀랐죠.
GQ   학교를 그만둔 건 그 영향인가요?
TG   졸업하면 7년 동안 의무적으로 군 복무를 해야 했어요. 스물일곱에 제대할 수 있었어요. 그때 제게 스물일곱은 너무나 먼 이야기였고 그래서 고민됐죠. 1학년 때 자퇴한 친구들은 종종 있었어요. 2학년 때는 거의 없었죠. 저도 처음엔 적응을 못 했지만 2학년쯤에는 재밌기도 하고 적응도 됐는데 뒤늦게 진로를 고민한 거죠. 군인도 정말 좋은 직업이지만 선택해야 했어요. 앞으로 무엇이 될지 알 수 없는 직업 대 군인 사이에서.
GQ   그때만 해도 배우를 꿈꾼 것도 아니었는데.
TG   전혀, 전혀 아니었습니다. 딱히 뭘 해야겠다 결심은 없었지만 나름대로 고민하고, 금식 기도도 해보고, 그러고 나오게 됐어요. 아빠 차 타고 돌아오던 길이 지금도 기억나요.
GQ   강단 있다고 해야 하나, 그럼에도 돌아오는 아버지 차 안에서 혼자 말없이 걱정했을 것도 같아요.
TG   사실 막막하긴 했죠. 그런데 모르니까. 예를 들면 군대 다녀오고 나서 군대 다시 가라고 하면 아니까 가기 싫은데 잘 모르니까 그냥 부딪혀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GQ   모르니까 부딪혀본다.
TG   여기가 (정강이를 문지르며) 계속 까졌습니다.
GQ   정강이가요?
TG   까먹고 있었는데 기억이 납니다. 삼수할 때 고시원에(삼수 끝에 건국대학교 영화학과에 입학했다), 검정고시 학원 다닐 땐 학원 옆 고시원에, 창문도 없이 정말 ‘요만한’ 고시원에 있었는데 여기에 (책상 밑을 가리키며) 다리를 넣고 잤거든요.
GQ   부딪쳤군요.
TG   네. 항상 여기가 까져요. 잘 때 발차기하는지 항상 부딪쳐서 까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고시원에만, 고시원에서 되게 오래 있었네.
GQ   뭐랄까, 아련한데 재밌어하는 표정이에요.
TG   재밌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슬펐죠. 그런데 슬프지만은 않습니다.

패턴 재킷, 뮌. 화이트 팬츠, 보스 맨.

GQ   태구라는 이름은 성경에 나오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뜻한다고요. 그 아홉 가지 중 지금 엄태구 씨에게 가장 필요한 키워드는 뭐예요?
TG   다 필요한데…, 아홉 가지를 포함하는 건 사랑과 겸손 같아서 사랑과 겸손이 많으면 좋지 않을까.
GQ   제가 아는 아홉 가지 키워드에 겸손은 없는데 무엇이 겸손한 것과 비슷한 거예요? 인내? 절제?
TG   아, 겸손은 아홉 가지 키워드에는 없습니다. 제 생각에 겸손하면 사랑도 하고, 인내도 하고, 절제도할 것 같고 그래서요. 그런데 약간 부끄럽네요.
GQ   왜 또 부끄러워요.
TG   제가 그렇지 않아서.(아홉 가지를 작게 중얼거린다.)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충성, 자비, 양선, 온유, 절제…. 그렇게 살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거리가 멀어질 것 같은 거죠, 이런 훌륭한 단어들과는. 가만히 있으면. 노력 안 하면. 그래서 노력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노력? 열심히? 그렇다 말하기도 민망한데.

니트, 디올 맨. 볼 캡, 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