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새만금, 그 길의 끝에서

2021.07.30김은희

새만금에 대한 기록

내측에 드러난 땅. 어부 P 씨가 말했다. “저게 원래 등이야. 물이 들어오면 묻히고, 쓰면 나는 데. 이제는 물이 낮아져서 땅처럼 매일 보이지. 옛날에 저기서 조개 캐고, 꼬막 잡고, 바지락 캐고. 저런 데서 엄청 많이 나왔어요.”

“여기가 바다여, 바다. 옛날에 소라 잡고 배꼽 잡은 데여. 우리 신랑도 여기서 배꼽 잡고 그랬어. 근디 여기를 다 막은 거여.” 그늘 아래서 적포도 와인을 마시고 계시던 할머니가 등지고 앉은 잔잔한 물결의 그곳을 뒤돌아 가리켰다. 소라 잡고 배꼽(골뱅이) 잡던 바다. 지금은 막은 곳. 그리하여 이제는 ‘여기가’와 ‘바다’ 사이 ‘과거에는’이라 덧붙여야 옳은 곳. 할머니가 앉은 그늘은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 야미도리 돌고래쉼터의 소나무 아래, 이곳은 새만금 방조제 위다.

방조제, 해안에 밀려드는 조수를 막아 간석지를 이용하기 위한 제방. “여기가 바다”였다는 사실과 “여기를 다 막은 것”이라는 설명이 선명해진 때는 방조제에 난 도로를 최소 세 번쯤 오가고 나서다. 새만금에 다녀온 독자분이라면 그 연유가 단지 나의 토목공학 및 공간 지각 이해력이 느려서만은 아니라는 걸 알아주시리라 믿는다. 길이 33.9킬로미터, 현시점 세계 최장 거리 방조제, 내측에 드러난 땅. 어부 P 씨가 말했다. “저게 원래 등이야. 물이 들어오면 묻히고, 쓰면 나는 데. 이제는 물이 낮아져서 땅처럼 매일 보이지. 옛날에 저기서 조개 캐고, 꼬막 잡고, 바지락 캐고. 저런 데서 엄청 많이 나왔어요.”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대 규모 간척 사업이라는 수식을 달고 사는 새만금을 실제로 마주하면 한눈에 담기지 않는 광활한 풍경과 웬만큼 간 것 같아도 계속 이어지는 제방 도로에 판단력이 흐려지고야 만다. 바닷길을 가르는 기적을 영원히 박제해둔 인간의 엄청나고 굉장하여 기이한 자취 앞에서.

“‘저어기’ 비응도 공사 시작할 때부터 많이 봤죠.” 할머니가 젊은 사람만큼 술을 드신다고, 평소 맥주만 즐기시는데 오늘은 분위기 있게 와인 한번 드셔보시라 드렸다고, 여든 살 어머니의 마흔 일곱 살 아들이 치즈와 쑥인절미를 구우며 웃는다. 군산 시내에서 제조업에 종사 중인 K 씨는 지역 토박이다. 그가 기억하는 새만금은 군산시에서의 방조제 출발점이자 과거 섬이었던 비응도에 기초 공사가 시작된 시절부터다. 어머니의 기억은 보다 앞선다. “내가 섬 출신이여, 선유도. 내가 79년도에 섬에서 나왔어. 야 어릴 때. 그때부터 얘기가 나왔어.”

군산, 김제, 부안 앞바다를 새만금 방조제가 가른다. 방조제가 바다를 막아 생긴 내측의 물결.

군산, 김제, 부안 앞바다를 새만금 방조제가 가른다. 방조제의 외측인 바다의 물결.

1991년에 착공해 19년 만에 완공된 새만금 방조제. 방조제를 이루는 거대한 돌들이 만든 해변 아닌 해변. 방조제 난간 너머로는 ‘출입 금지’라 적혀 있지만 바다 낚시를 즐기는 이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실제로 서해안 간척 사업이 국가 쟁점 사업으로 본격적으로 언급된 시점은 1970년대부터다. 1978년 10월 5일 <조선일보> 조간 4면에 실린 ‘79 새해 청사진’ 기사에 “공업화 과정에서 토지 수요가 크게 증가하고 있으므로 이에 대비하여 서남해안의 간척 사업과 산지 개발을 더욱 확대해 나갈 것”이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후 ‘국토 개발 10개년 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장기 국토 개발 계획안이 하나둘 발표되고, 새만금은 1987년 12월 12일 “정부는 그동안 논란이 많았던 전라북도 김제 金堤 – 만경 萬頃 지역의 간척 개발 사업을 오는 89년에 착공하기로 했다”(<조선일보> 기사)는 발표와 함께 가시화된다. 새만금이라는 이름은 예부터 옥토로 유명한 만경, 김제 평야 같은 땅을 일구어내겠다는 의미이자, 김제와 만경 평야를 금만 평야라 부르던 옛 명칭을 만금이라 뒤바꾸고 새롭다는 뜻의 ‘새’를 붙여 만든 신조어다. 그 이름 따라 이곳은 벽해상전, 그야말로 새로운 땅이 되었다. “10년이 뭐여, (개발한 지)30년 넘어. 우리 발전시킨다는데 뭐가 나쁘겄어. 좋지.” 와인잔을 든 할머니의 왼손이 새만금을 훑었다.

위치적으로 새만금 개발 사업은 전라북도 군산시, 김제시, 부안군 앞바다를 방조제로 막고 방조제 안쪽 바다를 땅으로 만들어 다목적 용지로 활용하려는 목표가 골자다. 군산에서 새만금 방조제를 건널 때를 기점으로 오른쪽이 바다인 외측 外側, 왼쪽이 방조제로 바다를 막아 생긴 내측 內側이다. 할머니가 가리킨, 옛날에 소라 잡고 배꼽 잡던 바다는 내측이다. 망망대해이던 이곳을 외측과 내측으로 가름하는 선이 새만금 방조제이고, 방조제는 ‘Longest Sea Dam’이라는 내용으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됐다. 내측 면적은 새만금개발청 발표 기준 4백9제곱킬로미터, 서울 면적의 3분의 2에 달한다.

 

 

“노태우가 저기서 축포 터뜨릴 때 내가 딱 왔거든.” P씨가 새만금 간척공사
기공식이 열리던 날을 떠올렸다. 1991년 11월 28일의 일이다”

 

그러니까, 대체 이 드넓은 새만금은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이 과정은 바다를 막기 위해 1991년 11월에 첫 삽을 뜬 이후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 진행하던 물막이 공사가 마지막 한 구역까지 끝난 2006년 4월의 현장과, 방조제가 개통된 2010년 4월의 새만금을 취재한 여러 신문 기사에 기록돼 있다. 그중 몇 개를 옮겨 적는다.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비포장길. 길 가장자리 곳곳엔 사석 沙石 더미와 무게가 3톤이나 되는 돌망태 (많은 암석을 철선으로 엮은 그물 속에 넣어 복주머니 형태로 죄게 한 돌더미. 호안, 하천, 제방 등에서 급류를 제어하거나 생태계 보호용으로 쓰인다), 바다에서 퍼 올린 해사 海沙 무더기가 사열대의 장병처럼 빼곡히 늘어서 있다. (중략)이 거대한 방조제를 쌓기 위해 투입된 연인원은 1백89만 명. 중장비도 덤프트럭 22만7천 대를 비롯, 총 82만8천 대가 동원됐다. 바다에 쏟아부은 흙과 돌의 양은 9천4백10만 톤에 이른다.” <주간동아> 2006년 5월 9일자 통권 534호 28 ~ 31페이지.

“간척 사상 처음으로 3톤 규모의 돌망태 2개(총 6톤)를 엮어 바다에 투입, 빠른 유속에도 견딜 수 있도록 하는 ‘사석 돌망태’ 공법이라는 독자적인 기술이 시도됐다. 당시 국내에는 20대뿐이었던 35톤 덤프트럭 가운데 사용이 가능한 16대와 2천 톤급 해상 바지선을 동원, 한꺼번에 많은 양의 암석과 돌망태를 바다에 투하하는 방법으로 시공성을 높였다. (중략) 새만금 방조제는 해일과 파랑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완경사형 사석제로 외측을 보호하고, 내측에는 바다 모래를 이용해 단면을 형성하는 해사·성토공법이 활용됐다. 이는 일본이나 네덜란드의 방조제 축조방식과는 전혀 다른 공법이다.” <전북일보> 2010년 4월 27일자.

“안쪽에서는 이변이 생기더라고.” 어부라는 업을 증명하듯 검붉게 탄 얼굴의 P 씨를 만난 것은 이 거대한 해상구조물에서 내측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이곳을 땅으로 메우고 이뤄내는 눈부신 발전이 새만금 간척 사업의 도달점 아니었나. 그러나 마주한 내측에는 바다보다 작은 물결의 수면만이 고요했다. 저것이 간척지인가, 간간히 작은 섬 같은 땅이 보이는 정도. 여기를 호수라 해야 할지 무어라 불러야 할지, 이곳을 떠다니는 작은 배들은 무엇을 잡고 있는지 궁금증만 일 때, 방조제 가까이 정박한 배들 사이 사람의 움직임이 보였다. P 씨 부부였다.

“노태우(전 대통령)가 저기서 축포 터뜨릴 때 내가 딱 왔거든. 기공식한다고 축포 터뜨릴 때.” P 씨가 새만금 간척공사 기공식이 열리던 날을 떠올렸다. 1991년 11월 28일의 일이다. 이 시기는 서울에서 직장 생활하던 P 씨가 부안으로 온 때이기도 했다. “그때 내 월급이 얼만 줄 알아요? 서울 직장 생활할 때는 40만원도 못 받았어. 그런데 여기 놀러 왔다 봤는데 하루에 5백만원씩 벌더라고, 하루에. 그때는 여기가 백합도 막 이 만 한 거, 대합이라고 그러지? 큰놈들. 그런 거 잡히고 얼마나 유명했는데.” 크기를 묘사하느라 굳게 쥔 P 씨의 두툼한 주먹도 검붉다.

하루에 5백만원씩 벌었다는 그의 만선기가 진실인지 과장인지 증명할 수 없으나 군산과 김제, 부안이 예부터 백합으로 유명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특히 지난해인 2020년에 완공된 새만금 동서도로를 통해 이제는 군산, 부안 어디서든 30분 정도면 가 닿는 김제 심포항은 전국 백합 생산량의 80퍼센트를 담당했다. 그러나 이 역시 과거형이다. 시원하게 뚫린 새만금 동서도로를 타고 다녀온 심포항의 식당가 유리창에는 백합죽이라는 메뉴가 스티커 자국으로만 남아있었다. “패류는 전멸이에요, 전멸. 원래 여기를 바닷물을 막고 담수화시켜서 땅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물이 썩으니까…. 여름 되면 말도 마요. 썩은 내 하며, 여기 있지도 모대.” 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사리 때마다 (관리청이 수문을 열어) 해수를 유통시키고 있는데 그러면 또 육지에서 내려온 민물고기가 다 죽지. 개판 오 분 전이에요.” 달리 무어라 해야 할까, 속상하겠다는 말에 P 씨가 도리어 크게 웃는다. “아유, 속상하기는, 죽을 지경이지.”

능청스런 웃음 뒤로 그는 곁에 있던 기계를 툭툭 두드렸다. “우리는 농사를 짓기를 해, 뭐를 해. 말 그대로 어업이 천직이야. 떠나면 직업이 없어지는데. 그러고 수협이고 어디고 금융에서 대출을 많이 받았잖아요. 헤어나오질 모대요. 할 수 없이 이거 붙들고 입에 풀칠하고 사는 것이지.” ‘이거’는 직접 만든 재첩잡이 기계다. “이변이 생기는데, 거기 적성에 맞는 어패물이 또 생겨요. 요즘은 재첩. 이게 앉아서 재첩 잡는 기계예요.” 저기 떠 있는 배들이 다 재첩 잡는 중이라고 P 씨 아내가 내측의 배들을 가리킨다. “해수 유통해서 짠기가 너무 많이 들어오면 또 다 폐사야. 그러니까, 나는 게 해마다 다르다고 보면 돼요. 일단은 이 기계로 재첩 잡아봐야지. 이렇게 사는겨, 그냥.” P 씨가 또 허허허, 속 좋게 웃는다. 그가 짚고 선 냉장고 두 대만 한 크기의 기계는 주호민 작가의 만화 <무한동력>에 나오는 무한동력장치를 닮은 것도 같았다.

바다를 막고 선 철문, 배수갑문. 내측으로 해수 유통 역할도 한다. 33.9킬로미터의 방조제 중 약 30미터씩 두 군데에 자리한다.

새만금 방조제 내측 간척지. 캠핑홀리데이라는 사설 업체가 몇 해 전까지 캠핑장으로 운영했다. 지금은 비어 있다. 그야말로 광야.

새만금 방조제 내측에는 휴게소가 여럿 있다. 그중 농구장이 있는 가력도체육공원센터.

외측 해넘이전망대에서는 서해의 석양이 광활하게 펼쳐진다.

새만금에는 쇠돌고래 상괭이가 산다고 한다. 상괭이를 테마로 한 돌고래쉼터도 있다. 사진은 구 캠핑홀리데이 광야 끝에 놓인 돌고래 그림 조형물.

멀리 보이는 방조제 도로와 들꽃이 자라난 간척지 풍경.

과거에 소라, 골뱅이, 백합, 광어, 농어, 하여튼 온갖 생선과 조개 잡던 바다. 이제는 방조제 내측인 내해가 되었고, 요즘은 민물조개 재첩이 난다.

“이낙연 ‘새만금에 VVIP용 메디컬센터 조성필요’” (<전민일보> 2021년 6월 10일자), “심상정 ‘새만금은 기후위기 시대 대비하는 대한민국 전초기지’”(<연합뉴스> 2021년 6월 7일자), “새만금개발청, 중국 기업 투자 유치 박차”(‘대한민국 정책 브리핑’, 2021년 6월 8일자)…. 이 시간에도 새만금을 검색하면 이곳을 기회의 땅으로 삼는 계획이 무진하다. 시대가 변할 때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만금 개발 사업은 느슨해졌다 속도를 내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여기까지 왔다. 취재 중 만난 사람 중에는 전부 뻘밭이던 이곳에서 망둥어 잡던 어린 날이 그립다면서도 “우리 애기 큰 20년 후쯤에는 새만금시라는 새로운 도시가 생겨 있지 않겠어요?” 청사진을 그리는 택시 기사님도 있었다. 직장 상사가 추천해 전주에서 와봤더니 바다가 푸르고 좋다는 젊은 커플이 있었고, 낚시가 좋아 경기도에서 왔다는 중년의 친구들은 ‘가둔 물’에서는 낚시하지 않는다며 외측 바다에서 잡은 우럭을 보여주기도 했다. 매운탕이 된 자태였다. 개발이 이뤄지다 보면 “좀 있는 자들이 더 벌어먹으려고 수작 부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말하는 이도, 지역이 발전되면 주민들로서는 일터가 생기고 사람들이 관광하러 오고 얼마나 좋냐며 “어업하는 사람들은 보상을 다 받았기 때문에 할 말이 없을 것”이라는 사람도 만났다. 후에 만난 어부 P 씨 앞에서 나는 사실을 물어보려던 말을 삼켰다. 1천 년 빈도의 파도에도 적응할 수 있도록 설계된 새만금 방조제의 밑부분 넓이는 평균 2백90미터, 최대 5백35미터. 높이는 평균 36미터, 최대 54미터. 그중 우리가 눈으로 보는 방조제 부분은 평균 해수면 기준 11미터 정도뿐. 이곳에 펼쳐진 삶은 저마다 다르고, 새만금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아 새만금에 왔으면 선유도에 가셔야지요.” 해무인지 미세먼지인지 알 수 없는 안개가 낀 다음 날, 잘 구운 쑥인절미를 건네며 채근하던 K 씨의 말을 떠올렸다. “거기를 가면 섬마다 다 연결이 돼 있는데. 신시도부터 쭉 이어져가지고 장자도도 있고, 무녀도도 있고. 이 다리를 놓은 목적들도 그런 데 있으니까.” K 씨는 목적이라는 단어와 함께 연결이라는 표현을 썼다. “우리 발전시킨다는데 뭐가 나쁘겄어. 좋지”라는 어머니의 말을 K 씨가 이었다. “여길 놓으면서 진짜 좋아진거죠. 옛날에는, 아버지 묘가 선유도에 있는데 배 타고 1박으로 가야 했으니까. 지금은 차 타고 금방 눈 깜짝할 사이에 가니까.”, “그게 사실이여. 30분 만에 가니까.” 한 모금 와인을 마시고 고개를 끄덕이던 할머니의 말도 떠올렸다. 나는 선유도로 떠날 채비를 했다. 너른 군산 새만금 공단 단지에 홀로 우뚝 솟은 호텔 베스트 웨스턴 군산에서 선유도까지 새만금 방조제를 타고 27킬로미터, 소요시간 30분. 이 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지 못하지만.

‘대한민국 희망의 날개, 새만금’, ‘새로운 문명을 여는 도시 새만금’,‘아이 러브 새만금’…. 새만금의 다양한 슬로건들.

 

    피처 에디터
    김은희
    포토그래퍼
    표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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