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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공감 능력은 안녕한가요

2021.09.01김영재

부당 해고의 억울함, 계약직의 투쟁을 알리는 기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반응이 있다. “너만 아프냐? 나도 아프다.” 우리의 공감 능력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What is life worth?’(삶의 가치란 무엇인가?)
지난 7월 개봉한 영화 <워스>의 원제다. 영화는 협상 전문 변호사 케네스 파인버그(마이클 키튼)의 로스쿨 강의로 문을 연다. “농기계에 깔려 죽은 농부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 이 농부의 ‘목숨’을 값으로 환산하면 얼마일까?” 학생들이 저마다의 의견을 내놓자 파인버그가 말한다. “법적으로만 봤을 때 이 질문에는 정답이 있어. 숫자가 그 답이지. 그게 바로 우리들의 일이야.”
얼마 후 비행기 테러 사고가 발생한다. 정부는 피해자 유족들이 개별 소송을 제기할 경우 일어날 수 있는 항공사 파산을 염려해 피해자 보상기금을긴급 승인한다. 이 기금의 운영자로 파인버그가 임명된다. 기금이 활성화되려면 유족 80퍼센트 이상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상황. 기한은 2년. 협상대상자는 5천여 명. 파인버그는 자신한다. 인간의 삶을 돈이라는 숫자로 환산해 합의를 이끌어온 경험이 많고, 그것이 정답이라 믿기 때문이다.
파인버그의 행보는 그러나 시작부터 삐거덕거린다. 피해자의 직업, 소득, 연령에 따라 기계적으로 수치화한 보상금이 유족의 분노를 산 것이다. 유족들은 소중한 사람을 잃은 슬픔이 ‘숫자’로 치부된다는 사실에 치욕을 느낀다. 신청 마감일은 다가오는데 동의한 유족은 20퍼센트에 그치고 기금은 폐지될 위기에 놓인다. 답보 상태에 머무르던 프로젝트는 그러나 97퍼센트의 유족 동의를 얻으며 마무리된다. 2년 가까이 움직이지 않던 유족들이 파인버그의 제안에 동의하려면, 짧은 시간 동안에 어떤 일이 벌어져야 할까.
유족이 변한 게 아니다. 달라진 건 파인버그다. 객관적 정보에 준거해 계산기만 두드리던 파인버그는 유족을 직접 대면하고 숫자가 아닌 그들의 사연을 듣기 시작한다. 인간의 가치 worth는 법적 기준으로만 매길 수 없다는 유족들의 마음에 공감하는 순간 소통의 문이 열린다. 예상했겠지만 이건 9.11 테러에 얽힌 이야기. 피해자 보상기금 특별위원장이었던 파인버그가 실제로 겪은 공감에 대한 이야기다.
지난 6월 서울대학교 청소 노동자가 학내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인은 심근경색. 그러나 열악한 근무 환경과 비상식적 갑질로 인해 해당 노동자가 과로에 시달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공분이 일었다. 어째서 이런 비극이 일어났는지, 재발 방지책은 무엇인지 서울대의 입장이 나오길 기다렸다. 예상과 달리, 노동자의 죽음을 대하는 서울대의 태도는 절망적이었다.
행정대학원 교수는 “너도 나도 피해자 코스프레하는 것이 역겹다”라고 유족의 상처를 더 헤집었다. 지구환경공학부 교수는 “마녀사냥식으로 갑질 프레임을 씌우는 불미스러운 일이 진행되고 있다”라고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을 도리어 꾸짖었다. 이들에겐 사회적 약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이 없어 보였다. 마침 페이스북 서울대 대나무숲 페이지엔 ‘서울대 청소 노동자의 기회비용’이라는 글이 올라왔다. 청출어람이 이럴 때 빛을 보면 안 되는데….
이 땅에서 ‘피할 수 있는 죽음’을 맞는 이들의 상당수는 사회적 약자들이다. 이는 수치도 증명한다. 대한민국에서 일터로 출근했다가 퇴근하지 못하는 노동자는 한 해 2천4백 명. 지난 5월 청년 노동자 이선호 씨가 경기 평택항에서 개방형 컨테이너 벽체에 깔려 숨졌다. 그 이전에 태안 화력 발전소에서 근무하다 컨베이어 벨트에 몸이 끼어 숨진 김용균 씨가 있었고, 그 이전에 구의역 스크린 도어를 수리하다 숨진 열아홉 살 김 군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하청업체 비정규직이었다. 비용 절감이라는 미명하에 이들은 제대로 된 안전 조치를 제공받지 못했다. 위험의 외주화가 부른 사회적 타살이었다. 왜 막지 못했을까? 아니, 막지 않은 건 아닐까?
노동자가 일터에서 죽었을 때 기업들이 내는 벌금은 놀랍게도 평균 4백50만원이다. 기업들이 4백50만원의 벌금이 무서워 안전 조치를 강화할까. 설마. 안전 설비를 갖추는 데 드는 비용보다 벌금이 싸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목숨은 비정한 손익계산서 앞에서 그렇게 도매급으로 취급된다. 사람이 죽어 나간 자리에서 사람이 또 죽어 나간다. 한국의 산업 재해 현실을 기록한 르포집 <노동자, 쓰러지다>를 쓴 희정은 취재 도중 노동안전보건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을 찾아가 “인간이 일하다 죽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돌아온 답은 놀랍게도 시스템이나 안전 설비 점검이 아니라 ‘감수성’이었단다. 타인의 불행을 안타까워하는 감수성. 함께 아파할 수 있는 공감 능력 말이다. 어쩌면 노동자의 죽음보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죽음 앞에 무감각한 마음들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서 약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은 갈수록 연약해지고 있다. 다수가 힘들었던 시절엔 그래도 뭉쳐서 서로를 위로하고 연대했다. 그러나 빈부 격차가 커지고 불평등이 심화되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내 살길을 찾아 각자 도생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 이를 틈타 ‘반노동 정서’가 ‘반기업 정서’를 위협하는 상황도 여럿 포착된다. 부당 해고를 당해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계약직의 투쟁을 알리는 기사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반응은 “너만 아프냐? 나도 아프다”이다.
때로 공감은 정치적 이해에 따라 취사 선택되거나 이용당한다. 세월호와 천안함 사건이 그렇다. 진영 논리에 의해 갈라져 천안함은 보수, 세월호는 진보라는 이상한 구도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할퀸다. 정치권 밖에서도 두 재난을 향한 말들은 매섭다.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세월호 유가족들을 향해 일부 편향된 시민들은 말한다. “진짜, 징글징글하네.”. “작작 좀 하자.” 패잔병이라 비난받으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힘들어하는 천안함 생존자를 향해 한 고등학교 교사는 SNS에 이렇게 썼다. “천안함이 무슨 벼슬이냐?” 누군가는 살아남은 이들의 절규를 보상금과 결부시킨다. 공감하지 못하는 마음을 거친 말로 휘두를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물론 타인의 아픔을 완전히 이해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노력을 통해 조금 더 다가갈 수 있는 영역이긴 하다. 미국의 심리학자 자밀 자키가 쓴 <공감은 지능이다>에 따르면, 공감은 타고나는 능력이 아니라 후천적 능력이고, 연습을 통해 키울 수 있는 기술이다. 큰 고통을 겪거나 고통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이 아닌 사람에 비해 타인에 대한 공감도가 높은 건 역지사지의 경험에서 얻은 것일 것이다. 파인버그 역시 노력과 경험을 통해 이를 학습했다.
세월호 생존 학생, 천안함 생존자, 쌍용차 해고 노동자, 성 소수자 등을 연구해온 사회역학자 김승섭 교수는 저서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아름다운 사회는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예민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 그래서 열심히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자신의 자존을 지킬 수 없을 때 그 좌절에 함께 분노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회”라고 했다. 나는 ‘서울대 청소 노동자의 기회비용’이라는 글을 쓴 청년에게 교과서가 알려준 이론적인 기회비용이 아니라, 실제 삶의 터전에서 노동자의 삶을 가까이 보고 느끼는 기회가 생기길 진심으로 응원한다. 그가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이라는 곳에서 공부하는 것이 지식만이 아니라 “함께 아파할 수 있는 감수성”이길 바란다. 그럴 때 세상은 조금 덜 나빠질 것이다. 글 / 정시우(칼럼니스트)

    피처 에디터
    김영재